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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호의 시선] 김종인 무릎꿇기 사과, CVID 원칙으로 만들라

중앙일보 2020.08.24 00:23 종합 28면 지면보기
강찬호 논설위원

강찬호 논설위원

집권세력이 아프긴 아픈가 보다. 연일 미래통합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을 공격한다. 불과 4년 전 자신들이 대표로 모셨던 팔순노인에게 입에 담기 어려운 막말을 마구잡이 던진다. 그건 역으로 김종인이 잘 싸우고 있다는 방증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보수의 환부(患部) 였던 광주 방문이다. 그는 망월동 5·18 민주 묘지에서 무릎 꿇고 울먹이며 사과했다. 보수정당 대표로는 처음이다. 비서실장인 송언석 의원의 회고다. “대표(김종인)가 취임 직후부터 ‘광주 가자’고 틈만 나면 채근하시더라. 그래서 일부러 가장 평범한 날(8월 19일)을 골랐다. 그래야 오로지 광주를 위해 내려간다는 의미가 살지 않나. 광주 가기 전날, 대표가 내게 ‘그동안 당에서 사과다운 사과를 안 했는데 제대로 해야 한다.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지 않겠나’고 하더라. 느낌이 왔다. 아니나 다를까. 묘지에서 대표가 분향하더니 돌연 무릎을 꿇더라. 순간 배석한 우리도 따라야겠다는 생각에 김선동 사무총장, 김은혜 대변인과 무릎을 꿇었다. 역사적 순간이었다. 우리 당이 마땅히 떼어내야 했음에도 달고 살아온 혹이 떨어져 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진심어린 참회, 호남 호응 높지만
김종인 물러나면 도루묵될 우려
비가역적 개혁 밀어붙여야 살 길

자화자찬이라고 깎아내리기만은 어렵다. 아직도 5·18을 ‘빨갱이들의 난동’으로 믿는 사람들이 지지기반의 일부로 있는 정당의 대표가 무릎 꿇고 사과한다는 건 철학과 결단이 없고선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선지 호남의 반응도 예상 이상이다. “쇼라도 이 정도라면 인정한다”는 분위기다. “통합당이 져온 멍에의 절반을 김종인 홀로 덜어낸 것 같다”“김종인이 민주당에 있어야 했는데 통합당 가니 뼈아프다”는 호남발 문자가 통합당 의원들 전화에 가득하다. 50년 전 바르샤바 게토 추모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과한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를 빗대 “한 사람(브란트)이 무릎 꿇어 수천만 독일인 전체가 일어난 역사를 광주에서 김종인이 재연했다”는 말까지 나왔다. 5·18 유족이 통합당 쪽에 해준 얘기가 압권이다. “김종인이 여기(광주) 오기 직전 민주당 의원들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우리가 무슨 법안을 해주면 당신들께 유리하냐’ 묻더라. ‘그동안 아무것도 안 해주다 김종인 온다니까 화들짝 놀라 돕는 시늉에 나선 거냐. 참 게으르다’고 쏘아줬다. 아무 말도 못 하더라.”
 
보수정당이라고 광주 챙기기를 안 한 건 아니다. 2004년 한나라당 대표에 오른 박근혜의 첫 행선지는 광주였다. 그래선지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는 호남에서 역대 최고인 10% 안팎의 득표를 올렸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김영삼 정부에서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한 5·18에 대한 후임 보수 정권들의 인식은 갈수록 뒷걸음질 쳤다. 급기야 황교안이 이끈 자유한국당 치하에선 5·18에 대한 막말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그러나 당은 해당 의원들에게 솜방망이 징계에 그쳐 국민의 분노를 샀다. 이뿐 아니다. 4·15 총선을 앞두고 호남 28개 지역구 중 12곳만 공천하는 죄를 범했다. 민주화 이후 4차례, 근 20년이나 집권한 책임정당으로서 용서받을 수 없는 패착이었다. 그 대가는 혹독했다. 통합당은 수도권 121석 중 16석만 얻는 궤멸적 참패를 당하고, 상임위원장 한명 없는 난쟁이 야당으로 전락했다. 선관위 고위 소식통의 분석이다. “호남이 고향인 수도권 유권자들이 유달리 똘똘 뭉쳐 민주당에 몰표를 줬다. 이낙연 효과도 있었겠지만 ‘너희는 없어도 돼’라며 호남을 대놓고 버린 통합당을 응징한 측면이 더 컸다”
 
그런 만큼 김종인의 무릎 꿇기로 상징되는 통합당의 ‘호남 껴안기’는 시작일 뿐이다. 선거 때만 호남을 위하는 척하다 돌아선 보수정당의 흑역사를 국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정치 좀 안다는 호남 인사들은 “김종인만 물러나면 도로 영남당 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대놓고 한다. 그런 만큼 통합당은 5·18에 대한 사과와 존중을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원칙’으로 못 박아 대대손손 이어 가야 한다. 그 원칙을 정강·정책에 못 박는 건 물론 광주에서만 열려온 5·18 기념식을 서울에서 치러 ‘전국화’하는 걸 대선 공약으로 제시해야 한다. 5·18은 광주만이 아니라 전 국민의 역사임을 통합당이 선제적으로 선언한다면 무릎 꿇기의 진정성은 절로 입증될 것이다.
 
김종인은 팔순이다. 당내에 목숨 걸고 충성하는 측근도 없다. 그런 그가 권위를 갖는 건 지금 보수에 요구되는 시대정신에 유일하게 부합하는 행보를 해왔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김종인도 대표직을 내려놓을 것이다. 그때에도 통합당이 수권 가능한 정당으로 살아남으려면 김종인이 지금 추진 중인 개혁을 지지하고,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굳히는 것 외엔 방도가 없다.
 
강찬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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