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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잠, 책, 상념, 그리고 부침개…빗소리가 부르는 것

중앙일보 2020.08.23 09:00

[더,오래] 권대욱의 산막일기(62) 

어디로 가야 하나. 멀기만 한 세월.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은 누구나 유사하다. 절대 양(quantity)이 아니라 절대 질(quality)로 그렇다는 말이다. 질이 더 중요하다고 보면 위 말은 그대로 진리이기도 하다. 부자는 부자인 대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인 대로, 권력이나 명예가 있는 자는 있는 대로, 없는 자는 또 없는 대로 모두 그만그만한 걱정거리와 희망을 안고 오늘을 살아간다.
 
그럼에도 각자의 삶이 다 같지 않은 것은 대부분 생각과 습관과 기술의 문제라고 본다. 행복의 메커니즘은 망각과 몰입에 다름 아니다. 이 기전을 잘 활용해야 한다. 좋고 기쁜 일은 몰입을 통해 배가시키고, 나쁘고 슬픈 일은 재빨리 잊을 수 있다면, 그리고 긍정하고 희망할 수 있다면 우리는 늘 기쁘고 행복할 수 있지 않겠나 믿는다.
 
무엇으로 잊는가? 몰입과 몰아를 통한 망각이 가장 유효함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무엇에 몰입할 것인가? 그 몰입할 일을 찾고 만드는 것이 삶의 기술 첫 번째 미션이다. 나의 경우 그것은 쓰고 말하고 노래하는 것이다. 노래하고 있으면 모든 걱정과 근심과 불안을 잊는다.
 
Real generosity toward the future lies in giving all to the present.
- Albert Camus, French Author and Philosopher
 
‘미래에 대한 진정한 관용은 현재에 모든 것을 몰입하는 것이다’라는 앨버트 카뮈의 말은 심오하다. 미래는 어차피 온다. 어차피 올 미래 걱정한다고 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자. 오늘을 열심히 사는 것, 그것이 미래에 대한 최고의 준비일지 모르겠다. 미래가 관용의 대상이라니 놀라운 통찰이요, 천하본무사 용인자요지(天下本無事 庸人自擾之, 세상이 본래 조용한데 어리석은 사람들이 일을 만들어 번거로이 하누나) 아닌가 싶다.
 
폭우가 쏟아지는 어둠의 산막. [사진 권대욱]

폭우가 쏟아지는 어둠의 산막. [사진 권대욱]

 
밤새 엄청난 폭우가 내렸다. 도저히 앞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비였다. 오늘 나갈 일이 걱정이다가 이내 거둬들인다.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창랑의 물 맑으면 갓끈을 씻을 것이고 창랑의 물 탁하면 내 발을 씻으리라).
 
그렇다. 물이 많아 건너지 못하면 머물면 될 것이고, 편안해 건널 만하면 노래하고 만날 것이다. 쌀 한 됫박에 라면 서너 개, 꽁치 통조림 셋에 계란이 10개, 게다가 밭에는 토마토까지. 이만하면 열흘은 족히 버티지 않을까 싶다. 약속이 하찮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목숨 걸 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고, 다른 수단으로도 얼마든지 대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그렇지 않다면 헬기라도 타고 나갔을 것이다.
 
예전 같으면 어림없는 일일 것이다. 이 또한 코로나가 주는 여유 아닐까 싶다. 오전 중까지 기다려보고 나갈 만하면 나가 볼 것이다. 빗속에 갇혀 근 일주일을 지내다니 이것도 할 일이 아님을 느낀다. 연못물의 높이를 보고 개울물의 높이를 짐작할 연륜이 되었다. 잘 살펴 안전에 유의해야겠다. 아침은 빵 한 조각에 계란프라이, 토마토, 우유 반 잔으로 해결한다. 오늘도 안전한 하루를 보내보자.
 
 
오락가락 장대비는 잠을 부른다.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자고 또 잤다. 빗소리는 책을 부른다. 빗소리는 또한 상념을 부른다. 빗소리는 마지막으로 부침개를 부른다. 곡우를 졸라 호박전, 고추전, 파전을 만든다. 굴과 오징어도 넣는다. 두부찌개도 끓인다. 술 한 잔이 빠질 수가 없다. 비는 계속된다. 추적추적추적 지글지글지글.
 
‘함·또·따’는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워야 따로 있는 시간이 빛나고,  또한 따로 있는 시간이 빛나야 함께 있는 시간이 즐겁다는 말이다. 김치찌개 점심을 잘 먹고 2층에서 한잠을 푹 잤다. 곡우는 내가 자는 동안 유튜브 방송 두 개를 보았다며 즐거워한다. 심심할 틈이 없다고 말한다. 나는 내 유튜브도 봐라 나는 가끔 심심하다 말한다. 함·또·따가 반드시 물리적이지만은 않다. 함께 있어도 따로이고 따로 있어도 함께일 수 있다. 저녁엔 메밀 냉면에 소고기를 준다 하여 즐거워하고 있다. 만일 혼자였다면 차가운 밥상에 많이 외로웠을 것이다. 비가 많이 온다. 함께 밥 먹는 사이는 소중하다. 많이 아끼자.
 
내일 공부 때문에 오늘 올라가는 곡우를 에스코트했다. 물이 많이 빠졌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한다. 만나고 이별하고, 또다시 만나는 우리. 우리는 오늘도 함·또·따다.
 
(주)휴넷 회장·청춘합장단 단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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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욱 권대욱 ㈜휴넷 회장·청춘합장단 단장 필진

[권대욱의 산막일기] 45년 차 직장인이자 32년 차 사장이니 직업이 사장인 셈이다. 일밖에 모르던 치열한 워커홀릭의 시간을 보내다 '이건 아니지' 싶어 일과 삶의 조화도 추구해 봤지만 결국 일과 삶은 그렇게 확실히 구분되는 것도 아니고 애써 구분할 필요도 없음을 깨달았다. 삶 속에 일이 있고 일속에 삶이 있는 무경계의 삶을 지향하며 쓰고 말하고 노래하는 삶을 살고 있다. 강원도 문막 산골에 산막을 지어 전원생활의 꿈을 이뤄가고 있다. 60이 넘어서야 깨닫게 된 귀중한 삶과 행복의 교훈을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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