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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 한·일 갈등 ‘역사 화해 프로세스’가 해법

중앙선데이 2020.08.22 00:21 700호 21면 지면보기
갈등에 휩싸인 한일관계-현안, 리스크, 대응

갈등에 휩싸인 한일관계-현안, 리스크, 대응

갈등에 휩싸인 한일관계
-현안, 리스크, 대응

외교·교류 실종 민간이 풀자
집단지성 46명 17차례 포럼

분야 가리지 않고 난상토론
청소년 교류 등 실천안 마련

한일비전포럼 지음
늘품플러스 
 
그리스어 ‘아포리아(aporia)’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뜻이다. 앞뒤가 꽉 막혀 나아가지도, 돌아가지도 못하는 막다른 골목이다. 지금 한·일 양국 외교관계가 바로 이런 경우다. 그 갈등의 방아쇠는 2018년 10월 30일 한국 대법원이 신일철주금(현 일본제철)에 대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1억원씩 배상하라는 판결이었다. 파장은 메가톤급이었다. 소송 당사자가 많고 잠재적인 배상 대상자가 수십만명에 이르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즉각 반발했다. “징용 피해자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따라 해결이 완료됐다”면서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삼권 분립에 따라 대법원 판결을 존중한다고 맞선다. 대법원의 판결 논리는 “개인 청구권이 국가 간 조약에 의해 소멸하지 않는다”였다. 일본 정부도 과거 이런 취지로 답변한 적이 있고, 국제인권법도 “개인의 배상권을 국가 간 협정이나 조약에 의해 소멸시킬 수 없다”고 보는 게 주류다.
 
그야말로 양국 관계가 아포리아에 빠졌지만, 양국 정부는 한 치도 물러설 조짐이 없다. 양국이 서로 정상회담을 기피하고, 외교라인의 실무 대화도 줄어들었다. 한일비전포럼은 이런 배경에서 지난해 초 출범했다. 민간 차원에서라도 한·일 대화의 물꼬를 터야 한다는 취지였다. 『갈등에 휩싸인 한일관계 - 현안, 리스크, 대응』은 지난해 초부터 최근까지 17차례에 걸쳐 개최된 이 포럼의 논의 내용을 담았다.
 
한·일 관계를 원상 복구하려면 더디더라도 역사의 앙금을 덜어내는 수밖에 없다. 2017년 서울 청계광장에 전시됐던 소녀상 500점. [중앙포토]

한·일 관계를 원상 복구하려면 더디더라도 역사의 앙금을 덜어내는 수밖에 없다. 2017년 서울 청계광장에 전시됐던 소녀상 500점. [중앙포토]

포럼 대표를 맡은 홍석현 한반도평화만들기 이사장과 위원장을 맡은 신각수 전 주일대사를 비롯한 참여 전문가 46명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보여줬다. 포럼은 추우나 더우나 매번 오전 7시 30분에 열렸고, 참여자들은 7시쯤 포럼 장소에 도착해 커피와 샌드위치로 아침을 때우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전문가 발제 30분에 이은 전체 토론은 언제나 오전 9시 30분까지 이어졌다.
 
참여자들은 한·일 갈등 해소에 필요한 지혜라면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부터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일본발 경제 쇼크 가능성, 양국 정부·기업·국민이 배상에 함께 참여하는 방안(일명 문희상안)까지 망라됐다. 논의 내용과 전문가 제안은 즉각 중앙일보 지면에 소개돼 큰 반향을 일으켰다. 주한 일본 대사관에서도 주요 내용을 본국 외무성에 보고했다. 무엇보다 포럼에는 외교부 장관(유명환)·대사(최상용, 위성락, 안호영)를 지낸 외교관과 한·일 관계를 연구하는 학자(김광두 서강대, 박철희·김현철 서울대, 정재정 서울시립대, 양기호 성공회대, 이원덕 국민대)에 그치지 않고 국회의원(김진표, 강창일, 김세연)과 기업인(구자열 LS그룹회장, 김윤 한일경제협회장)도 참여해 논의의 수준을 높였다. 신현호 대한변협 인권위원장도 힘을 보탰다.
 
지난해 7월 한일비전포럼 장면. [중앙포토]

지난해 7월 한일비전포럼 장면. [중앙포토]

이런 노력 와중에도 한·일 관계는 요동쳤다. 일본 정부가 지난해 7월 전격적으로 수출규제에 나서면서 대립의 골이 깊어졌고, 한국에서는 일본 제품의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코로나19 사태가 덮치면서 한·일 간 민간교류마저 줄어들었다. 지난 4일에는 대법원 판결과 관련, 주한 일본 기업의 자산을 압류하기 위해 대구지법 포항지원이 내놓은 공시송달 효력이 발생하면서 양국 관계는 더욱 냉랭해졌다.
 
포럼은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참여자들은 코로나19 사태와 함께 미·중 패권경쟁이 격화하는 세계적 대전환기에 한·일 양국의 지정학적 협력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홍 이사장은 책 서문에 “포럼은 앞으로도 청소년 교류 등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며 “한일국교 정상화 60년이 되는 2025년을 목표로 양국이 역사 화해 프로세스에 돌입할 것을 제안한다”고 썼다. “양국 갈등을 대물림하지 말자”고 했던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의 생각과도 일맥상통한다.
 
한·일 양국은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대립과 화해를 반복해왔지만, 이렇게 극명한 아포리아에 빠진 적은 없었다. 아포리아는 하나의 명제에 대해 증거와 반증이 동시에 존재하므로 그 진실성의 입증은 쉽지 않다. 그러나 무엇이 문제인지 또렷해지는 만큼 아포리아의 발견은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 책은 치열했던 그 과정을 생생히 담았다. 집단지성으로 빚어낸 한일비전포럼의 기록이 빛나는 이유다.
 
김동호 논설위원 dong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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