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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모습만 본 고과평가, 부전나비에 속는 개미 되는 셈

중앙선데이 2020.08.22 00:20 700호 14면 지면보기

자연에서 배우는 생존 이치

일러스트=전유리 jeon.yuri1@joins.com

일러스트=전유리 jeon.yuri1@joins.com

나비는 오랫동안 아름다움의 화신이었다. 꽃 속을 너울거리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장자는 나비가 되어 꿈 속을 노닐기까지 했다. 하지만 과학의 발달로 나비의 숨은 얼굴이 드러나고 있다. 특히 예전 우리가 흔히 볼 수 있었던 부전나비는 가히 두 얼굴의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을 정도다.
 

애벌레 때 개미 유충의 냄새 풍겨
개미집에서 23개월간 호의호식

여왕개미 소리 흉내, 시중도 받아
인식의 한계 교묘히 이용한 전략

인간 역시 보이는 모습에 현혹
제대로 된 평가 못 할 가능성 커

이 나비는 풀잎에 붙은 알에서 태어나 애벌레로 삶을 시작한다. 풀에서 내려와 땅바닥을 어슬렁거리며 새로운 삶을 모색하지만 곧 부지런한 개미에게 발견되기 일쑤다. 알다시피 개미는 작지만 뭉치는 힘이 대단한데, 태어나자마자 녀석들에게 붙잡혔으니 이제 끝일까? 이상한 건 애벌레들이 어떤 저항도 없이 순순히 끌려간다는 것이다. 겁을 먹고 포기한 걸까? 천만의 말씀이다. 애벌레는 개미들의 식량이 되기는커녕 호의호식을 누린다. 부쩍부쩍 자라니 먹는 양도 엄청나지만 개미들은 줄지어 먹을 걸 갖다 바친다. 더구나 이런 애벌레가 개미집에 한두 마리가 아니다. 도대체 개미들은 왜 이럴까?
  
#이 애벌레는 땅바닥을 어슬렁거릴 때 개미 유충 냄새를 풍긴다. 개미들이 그냥 놔둘 리 없다. 집에 있어야 할 유충이 밖에 있으니 고이 모셔가 보살핀다. 엄청난 먹성을 감당하느라 그렇지 않아도 가느다란 개미 허리가 휠 지경인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렇게 어느 정도 덩치를 키운 애벌레는 아예 한 술 더 뜬다. 여왕개미 소리를 흉내 내는 것이다.  
 
영국 옥스퍼드대의 제러미 토머스 교수와 이탈리아 토리노대의 마르코 살라 교수의 각기 다른 연구에 따르면 개미집에서 ‘성대모사’를 하는 부전나비는 두 종류가 있다. 잔점박이 푸른부전나비(Maculinea alcon) 애벌레와 고운점박이 푸른부전나비(M. teleius)인데 둘은 전략이 다르다. 잔점박이 애벌레는 개미들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는 편인 반면, 고운점박이 애벌레는 개미 알이나 유충을 먹는다. 그런데도 개미들은 가만 놔둔다. 먹이가 부족해지면 개미 유충은 버려두고 이 애벌레들을 먼저 챙길 정도다.
 
이유는 하나, 성대모사 때문이다. 개미는 페로몬과 소리로만 세상을 인식하는데 여왕과 똑같은 소리를 내니 여왕으로 착각하고 우선적으로 보호한다. 특히 받아먹기만 하는 잔점박이 애벌레는 갈수록 성대모사의 강도를 높여 극진한 시중을 하게 한다. 애벌레 중에는 등에서 분비되는 달콤한 액체로 개미와 공생하기도 하지만 그렇다 해도 축내는 양이 어마어마하니 개미들에게 이익이 있을까 싶다. 이렇게 무려 23개월 동안 호사를 누리다 고치를 만든 후 아름다운 나비로 탄생하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짝을 찾아 날아가버린다. 하지만 개미를 잊지는 않는다. 짝짓기를 마치면 개미들이 잘 다니는 길 근처 풀잎에 알을 낳아 대를 이어가며 개미에 기생할 수 있게 한다.
 
개미들은 왜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할까? 애벌레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개미들이 가진 인식의 한계를 애벌레가 교묘하게 이용하기 때문에 속는 줄도 모른다. 흉내내기 어려운 페로몬을 만드는 개미도 있지만 아직은 일부에 그치고 있다. 개미의 뇌는 이 글의 마침표 만한데, 그래서 속는 걸까? 그러면 지구 최고의 지능을 가진 우리 인간은 어떨까?
 
미국 로체스터 대학 연구진이 심장 질환이 있는 치과 환자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수술에 항생제가 필요한데 먹어도 되는지 주치의 처방전을 받아오라고 했다. 연구진은 네 명의 주치의에게 각각 다른 처방전을 쓰도록 했다. 주치의 1은 두말없이 자신 있게 써줬다. 주치의 2는 항생제가 필요한지 잘 모르겠다고 갸웃하며 써줬다. 3번 주치의는 “써서 나쁠 건 없겠다”며 써주었고, 4번 주치의는 관련 서적을 찾아본 후 써주었다. 환자들은 어떤 주치의를 가장 믿음직스러워 했을까?
  
#1번 주치의였다. 가장 낮게 평가한 의사는 4번이었다. 애매하거나 모르는 걸 찾아보고 확실하게 안 다음 처방전을 써준 의사를 무능하다고 평가한 것이다. 어쩌면 가장 믿을 만한 의사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개미가 애벌레의 페로몬과 소리에 속은 것처럼 우리 역시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면 속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예는 의외로 많다. 한 연구에 따르면 따뜻한 음료수를 들고 있으면 상대를 따뜻한 사람으로 평가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자신은 절대 아니라고 하지만 말이다(중요한 만남이라면 여름에도 뜨거운 걸 마셔야 한다는 뜻이다!).
 
긴 장마를 잇는 불볕 더위가 지나고 가을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회사마다 고과평가가 시작된다. 평가는 단순한 수치나 연봉, 승진으로 끝나지 않는다. 조직의 활력, 더 나아가 회사의 운명을 좌우한다. 개인적으로는 기분 나쁘고 마음 상하는 차원을 넘어 삶을 좌우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포스코를 설립한 박태준 전 명예회장은 “직원들은 평가하는 대로 움직이게 마련”이라며 평가를 중시했다. 제대로 받는 평가만큼 강한 동기부여도 없다. 그러니 평가를 하는 이들은 스스로에게 먼저 물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제대로 평가를 하고 있는가?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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