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피아노의 원조 하프, 심장 운동도 되는 ‘장수 만세’ 악기

중앙선데이 2020.08.22 00:02

[아티스트 라운지] 하피스트 한혜주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천사들이 연주하는 악기로 묘사되는 하프는 가장 오래된 악기이자 가장 낯선 악기다. 가구 수준의 몸집에다 비싸다는 인식 때문에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악기였다. 실제로 관현악 오케스트라에서도 가장 구석에 놓인다. 그런데 올해 초 MBC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서 유재석이 ‘유르페우스’로 하프에 도전해 예술의전당 무대에 서면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한국 관객들은 낯설어하지만
모든 피아노곡 하프로 연주 가능

준비한 무대 코로나로 줄취소
유튜브로 더 많은 관객 만날 것

 
사실 그 전부터 하프의 대중화를 외치고 나선 사람이 있다. 지난해 말 유튜브 채널 ‘하피스트 한혜주TV’를 개설한 한혜주(42)다. 서울대와 독일 뮌헨 국립음대를 나와 뉴욕 카네기홀, 베를린 필하모니홀 등에서 독주회를 열던 정통 클래식 연주자가 갑자기 바이크 라이더와 퍼포먼스를 하고 길거리 버스킹 영상을 찍어 대중의 관심을 호소하고 나선 것이다. “유럽에선 하프가 한국의 가야금 정도로 일반적인 악기거든요. 한국에선 낯설어들 하시니 유튜브를 통해서라도 많은 분들에게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코로나가 터질 줄 모르고 채널을 열었지만, 지금 결과적으로 너무 소중한 소통 창구가 되고 있네요.”

 
한혜주는 하프가 돋보이는 곡으로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를 꼽았다. 박종근 기자

한혜주는 하프가 돋보이는 곡으로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를 꼽았다. 박종근 기자

코로나 사태로 그간 준비하던 행사와 공연이 줄줄이 취소됐다. 26일 예정됐던 예술의전당 초청 ‘아티스트 라운지’ 공연도 최근 사태 악화로 공연 1주일을 앞두고 취소 통보를 받았다. 하지만 ‘쇼 머스트 고 온’이다. 피아니스트 신상일, 남성사중창 그룹 ‘트레콰트로’ 등 협연자들과 함께 영상 콘서트를 열기로 했다. “이번 연주 준비 때문에 유튜브를 좀 쉬었거든요. 연주회가 끝나면 그동안 못했던 재즈 등 다양한 장르를 포함해 채널을 더 활성화하려 했는데, 취소됐으니 연주회부터 영상으로 보여드려야죠. 속상하지만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해요.”

 
하프가 베일에 싸인 악기인 건 사실이다. 부피가 큰 만큼 악기 중 가장 비쌀 것 같고, 연주할 수 있는 곡도 괜히 제한적일 것 같다. 추측은 모두 틀렸다. “하프의 구조는 피아노와 거의 같아요. 피아노의 원조가 하프거든요. 그랜드 피아노가 하프를 눕혀놓은 모양이잖아요. 피아노로 연주할 수 있는 건 다 하프로 연주 가능해요. 물론 테크닉은 다르죠. 하프의 47현은 피아노의 흰 건반 역할을 하고, 페달 7개가 ‘도레미파솔라시’의 검은 건반을 각각 담당합니다. 페달이 많아 복잡해 보이지만 운전할 때 브레이크 밟는 감각과 비슷해요.”

  
유럽에선 한국 가야금만큼 일반적

 
작고 싼 것도 있다. 초보나 어린아이들은 페달이 없는 30만 원짜리 레버 하프로 시작하고, 전공자도 몇백만원이면 좋은 중고 악기를 구할 수 있다. “하프가 크고 화려해 보이니까 비쌀 거라고 생각하지만, 바이올린이나 첼로처럼 억대는 없어요. 전문가용 그랜드 콘서트 하프는 어차피 어린아이들은 못쓰죠. 어깨에 10kg 이상 얹고 연주하는 악기라서요. 대신 심장 운동이 돼서 어른들에게 좋은 ‘장수만세’ 악기예요. 연주자들이 제일 오래 살죠. 영화 ‘라붐’에 보면 소피 마르소 할머니가 하피스트인데, 구십 노인이 계속 오케스트라에 나가서 연주하잖아요.”

 
하프의 매력이 두드러진 곡이라면 말러의 교향곡 5번 ‘아다지에또’가 떠오른다. 실연의 아픔을 대변하는 배경음악으로 단골로 사용되는 이 곡에서 현악기들의 구슬픈 선율을 달래듯 받쳐주는 게 하프의 잔잔한 반주다. 하지만 한혜주가 꼽는 하프의 매력은 좀 다르다. “하프가 잔잔하기만 한 건 아니니까요. 하프가 제일 멋진 건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 같아요. 잔인한 왕에게 공주가 매혹적인 천일야화를 들려주는 이야기잖아요. 바이올린 선율을 하프가 반주하면서 세헤라자데의 베일에 싸인 관능미를 돋보이게 하죠.”

 
실제로 하프가 마냥 우아한 악기도 아니다. 마침 연습을 위해 모인 트레콰트로와 연주를 들려주겠다더니, 연장을 꺼내와 직접 조율에 나선다. “10분이면 된다”면서 작은 체구로 땀을 뻘뻘 흘리며 커다란 하프의 47개 현을 일일이 손보는 모습이 곧 ‘노동’의 현장이다. “하프는 반전투성이예요. 손가락에 굳은살이 생기지만 말랑말랑한 ‘애기 살’이 예쁜 소리가 나기 때문에 사포로 굳은살을 갈아줘야 하죠. 줄이 끊어지면 잘라내야 하니 니퍼도 늘 갖고 다니고, 쇠줄이 잔뜩 든 가방을 들고 다니니 의심도 받아요. 해외 공연 갈 때도 세관에서 자주 걸리죠.(웃음)”

 
국내에선 낯선 이름이지만 폴란드 쇼팽심포니·러시아 국립 타타르스탄·루마니아 야쉬 필하모닉 등 해외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했고, 프랑스 보르도TV 초청 독주회, 뉴욕 카네기홀과 베를린 필하모니 홀 독주회 등 해외에서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하프가 해외에서 훨씬 인기가 많으니까요. 독일 유학 시절엔 매주 연주회에 설 정도로 연주가 많이 들어왔죠. 2016년 카네기홀 데뷔를 하고 나니 한국에서도 좀 달라진 것 같아요. 독일의 하프 마이스터 학위를 딴 첫 한국인이란 걸 흥미롭게 생각한 공연 제작자의 초청으로 카네기홀에 서게 됐는데, 그 후로 한국에서도 ‘하피스트’라고 알아봐 주시네요.(웃음)”

  
가방에 쇠줄·니퍼 … 공항서 자주 걸려요

 
유튜브 영상으로 보여줄 공연도 ‘하프 대중화’를 위해 누구나 좋아하는 곡들로 선곡했다. 베토벤의 ‘오드 투 조이’,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부터 ‘시네마 천국’‘대부’ 등 영화음악까지, 피아노와 플룻, 남성 사중창과 다각도로 협업하는 컨셉트다. “김바로 작곡가가 편곡해준 듣기 편한 곡들이에요. 음악을 30년 넘게 해보니,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 남이 듣기 좋은 음악을 하는 게 좋더라고요. 뭐든 해석이 중요한 거니까요.”

 
그는 “먹방 유튜버처럼 많은 구독자가 생겼으면 좋겠다”면서 “많은 분들이 보시는 게 목표”라고 했다. “음악가로서의 일기장처럼 시작했어요. 공연은 한 번으로 끝나는 ‘순간의 예술’이잖아요. 남기고 싶어서 음반을 제작하지만, 이젠 음반도 듣지 않는 시대로 넘어온 것 같아요. 카네기홀에서 연주를 해도 거기 모인 분들만 알고, 그 기억에서도 언젠간 사라지겠죠. 유튜브 채널에서라면 클래식에 영상미를 더한 또 다른 장르의 예술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무도 안 했으니 제가 한 번 열어보려고요.”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