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최상연의 시시각각] 믿을 수 없는 게 부동산뿐입니까

중앙일보 2020.08.21 00:42 종합 30면 지면보기
최상연 논설위원

최상연 논설위원

미국 정치는 그나마 점잖고 품위 있는 줄 알았는데 트럼프 대통령을 보면 그게 또 그렇지도 않다. 입만 열면 잘난 체하고 툭하면 허풍이다. 취임 후 3년 반 동안 2만 번 넘는 거짓말 혹은 사실 왜곡을 했다고 워싱턴포스트는 분석했다. 하루 평균 20번에 가깝다는 건데, 엊그제 기자회견장에선 “대통령님, 재임기간 국민에게 했던 모든 거짓말을 후회하지 않나요”란 백악관 출입기자의 돌직구 질문까지 받았다.
 

국정 전반이 아슬아슬 위기인데
‘청와대 정부’ 자화자찬 어깃장뿐
전 정부가 오만·독선에 망했다

참고 들어야 하는 국민은 괴롭다. 맞서야 하는 야당도 힘들다. 민주당 대선 후보 조 바이든이 ‘비백인 여성’인 카멀라 해리스 의원을 러닝메이트로 정한 건 ‘상대방을 생선 내장 도려내듯 공격할 여전사’란 쌈닭 기질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거침없이 상대를 모욕하고 공격하는 트럼프식 격투기 토론에 야당은 겁을 먹었다. 지난번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의 대선 토론전이 그랬다.
 
힐러리가 트럼프의 성추행을 공격하자 “당신 남편 스캔들만 하겠느냐”고 받아쳤다. 반칙을 제지하는 앵커에겐 “당신 프로그램은 시청률도 낮잖아”라고 깔아뭉갰다. 민주당에선 ‘트럼프처럼 허풍 떨고 천박하게 빈정대라. 절대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를 인정하지 마라’는 토론 매뉴얼까지 나왔다. ‘졸린 조’ 소리를 듣는 바이든은 이런 식의 공격에 익숙하지 못하다.
 
“주택시장이 안정화되고 집값 상승세가 진정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말을 들으며 “우리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경제를 건설했다”는 트럼프를 떠올렸다. 딴 나라 세상 얘기하는 것 같은 동떨어진 내용이 우선 그랬다. 한두 번이 아니란 점도 같았다. 이런 말을 듣고도 도무지 덤빌 줄 모르고 존재감 없는 야당까지 어슷비슷하다. 그런데 좀 더 생각해 보면 트럼프는 기자들의 질문은 받는다. 우린 물어볼 방법이 없다.
 
문 대통령 발언은 청와대 수석회의에서 나왔다. 원고지 10장이 넘는 긴 분량을 참모들 앞에서 읽어 내려갔다. 당연히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왜 국민 체감과 다른 진단을 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받지 않는 구조다. 대통령의 중요 메시지가 대부분 이런 식으로 나온다. 트럼프보다 오히려 1년에 한 번꼴로 기자회견을 한 전 정권의 일방통행을 되풀이하는 중이다. 이 정부 사람들은 야당 시절 이런 걸 ‘불통’이라고 맹공했다.
 
트럼프와 다른 점은 또 있다. 트럼프는 그래도 원맨쇼다. 하지만 내각과 집권당을 수직 통치하는 ‘청와대 정부’에선 당이건 정부건 국민 혈압 올리는 어깃장이 원팀이다. 경제부총리는 “고용 상황이 꾸준히 나아지고 있다”는 낯 뜨거운 자랑이고 토지주택공사 사장은 “주택 정책은 문재인 정부가 제일 잘한다”고 부아를 돋웠다. 여당 의원은 TV 토론회에서 집값 떨어진다고 해놓고 방송이 끝나자 “그래 봤자 집값 안 떨어진다”고 했다. “고가 아파트에 살고 부동산값이 올라도 우린 문제없다. 다만 세금만 열심히 내라”는 의원도 있었다.
 
‘이념 프로, 행정 아마추어’로 불리는 이 정부에서 부동산은 무능과 무책임의 대표 사례에 올라 있다. 하지만 부동산만도 아니다. 가뜩이나 코로나 공포로 불안한 일상에 국정 전반이 아슬아슬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도 부동산이건 물 난리건 문제만 생기면 이명박근혜 탓이고 토착왜구 탓이다. 그러면서 나만이 옳고, 언론과 여론 비판엔 신경 쓰지 않겠다는 오만은 또 전 정부와 판박이다. 대통령 목소리가 나와야 할 때 외면하거나 딴소리가 나오는 것까지 따라 하는 중이다. 부동산이 그렇고, 식물총장 된 검찰총장이 그렇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사건, 광복회장의 광복절 기념사도 마찬가지다.
 
나라가 위기면 믿을 건 정부밖에 없다. 그런데 정부 말과 반대로 가야만 사는 길이 나온다고들 한다. 정부 실종이다. 그렇게 만든 전임자의 유체이탈을 마구 두들겨 패고 정권을 잡았다. 그러곤 같은 길이다.
 
최상연 논설위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