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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인사이트] 미국 제재 리스트 오른 중국 변경의 군산복합체

중앙일보 2020.08.19 00:13 종합 25면 지면보기

신장 생산건설병단과 위구르족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서쪽 허톈시 재래시장 입구의 보안검사대 뒤 대형 전광판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동정 뉴스가 상영되고 있다. 지난 7월 미국 상무부는 11개 중국 기업을 신장에서의 인권 탄압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제재했다. [AP=연합뉴스]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서쪽 허톈시 재래시장 입구의 보안검사대 뒤 대형 전광판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동정 뉴스가 상영되고 있다. 지난 7월 미국 상무부는 11개 중국 기업을 신장에서의 인권 탄압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제재했다. [AP=연합뉴스]

지난달 31일 미국 재무부가 중국의 신장(新彊) 생산건설병단(生産建設兵團·Production-Construction Military Corps, 이하 병단) 수뇌부 두 명을 ‘핀셋 제재’했다. 인권을 탄압한 외국 관리의 제재를 규정한 매그니츠키 법안이 근거다. 병단 당서기를 역임한 쑨진룽(孫金龍·58) 현 생태환경부 당서기, 펑자루이(彭家瑞·59) 병단 사령관을 전 세계 달러 금융망으로부터 퇴출시켰다.
 

마오쩌둥 자력갱생 전략의 산물
신장 전역에 14개 사단 270만명
90% 한족…6개 병단기업 상장도
2014년 위구르족 테러 뒤 강압책

미국은 병단에 앞서 신장위구르자치구 당·정 수뇌부부터 먼저 제재했다. 천취안궈(陳全國·65) 자치구 당서기, 훠류쥔(霍留軍·68) 공안국 당서기, 왕밍산(王明山·56) 공안국장, 주하이룬(朱海侖·62) 전 정법위 당서기가 지난달 9일 미 재무부 제재 리스트에 올랐다. ‘저승사자’로 불리는 미 재무부가 인권 유린의 온상으로 지목한 병단이 지나온 길을 살폈다. 
  
한국전 직후 국민당군 기반 창설
 
병단은 마오쩌둥(毛澤東)의 역작이다. 1954년 12월 창설했다. 직접적 계기는 한국전쟁이었다. 1949년 신장을 접수한 왕전(王震)의 부대는 식량이 부족했다. 멀리 란저우(蘭州)로부터 받는 군량의 운송 부담이 한국전쟁 참전으로 가중됐다. 마오가 “전투 무기를 내려놓고 생산의 무기를 들라”고 지시했다. 왕전은 항일전쟁 시기 옌안(延安) 인근 난니완(南泥灣)에서의 황무지 개간 경험을 되살렸다. 신장에서 흡수한 국민당 패잔병을 둔전(屯田)병으로 바꿨다. 이후 정치범과 죄수를 포함한 수십 만명의 한족 이주민을 받아들였다.
 
중국은 건국 초 마오의 ‘생산자급, 자력갱생’이란 군사전략에 따라 신장 외에도 12개 지역에 병단을 설치했다. 문혁을 거치며 모두 폐지됐지만 1981년 덩샤오핑(鄧小平)의 지시로 신장 병단만 부활했다.
 
1930년대 실크로드 초입의 성문. ’회족(이슬람 교도)과 한족은 나눌 수 없다(不分回漢)“는 구호가 선명하다. [사진 하버드대 옌칭도서관]

1930년대 실크로드 초입의 성문. ’회족(이슬람 교도)과 한족은 나눌 수 없다(不分回漢)“는 구호가 선명하다. [사진 하버드대 옌칭도서관]

초기 병단의 모델은 소련식 국영농장이었다. 수리 사업과 농업 기계화에 주력했다. 자급자족을 넘어 신장 정부가 필요하던 식량 20%를 공급했다. 주더(朱德)는 “두 주먹으로 혁명 과업을 이뤘다”며 기뻐했다.
 
1960년대 중국과 소련이 충돌했다. 구소련과 마주한 신장의 전략적 지위가 급부상했다. 병단을 확충했다. 1961년 말 86만6000명이던 병단 총인구는 1966년 148만, 1990년에는 230만, 지금은 270만 명이 넘는 방대한 조직으로 발전했다. 병단의 90%를 한족(漢族)이 차지하면서 현지 반발이 이어졌다. 1962년에는 수만 명의 위구르인이 소련으로 도주하는 ‘이리·타청(伊犁·塔城)사건’이 터졌다.
 
병단의 본부는 우루무치(烏魯木齊)에 위치한다. 2019년 말 기준으로 14개 사단(師), 179개 여단(團)이 신장 전역에 분포한다. 사단과 도시를 통합한 자치구 직할 도시 10곳과 대규모 농장 격인 진(鎭)급 도시 37개가 중앙 정부와 신장 정부의 이중 지휘를 받는다. 1949년 왕전 부대원으로 신장에 정착한 노병 류충푸(劉聰普·91)는 지난해 “65년간 땀을 흘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첨단 신소재·과학기술 개발 주력
 
2014년 발표한 『병단의 역사와 발전』백서는 병단을 “국가가 부여한, 주둔하고 개간하며 변경을 수비하는(屯墾戍邊·둔간수변) 임무를 수행하는, 당·정부·군대·기업을 하나로 합친 시스템”으로 정의했다. 병단이 군사조직이자 국영기업이며 행정기관인 동시에 당조직인 군·산·정 복합체라는 의미다. ‘중국 인민해방군 신장군구 신장생산건설병단’이란 명칭으로 창설해 1981년 ‘신장 생산건설병단’으로 이름을 바꿨다. 군장을 벗고 현역 군인 임무를 수행한다고 하여 ‘제복을 착용하지 않은 국경방위군’으로 불린다.
 
신장 생산건설병단의 뿌리

신장 생산건설병단의 뿌리

장쩌민(江澤民) 주석은 병단에 “생산건설의 모범, 안정단결의 모범, 신장 안정과 변경 수호의 모범” 역할을 요구했다. 시진핑 시대에 들어서 “국가 이익 수호가 곧 병단의 이익”이라며 “변경을 안전하게 지키며 각 민족을 용광로에 응집하는 모범이 될 것”을 요구했다. 신장에서 발생한 수많은 소요사건을 진압하는데 병단의 활약을 요구했다.
 
병단은 운영 면에서도 변신을 거듭했다. 1983년 국영농장식 구체제를 버리고 새로운 경영체제로 개혁했다. 1987년 농목·공업·교통·건설·상업·유통·재정·금융·간부·임금·교육과학기술제도 등을 개혁해 생산을 촉진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서부 대개발 전략에 맞춰 고분자·비금속 재료 등 신소재와 첨단 과학 기술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2000년 말에는 6개 병단 기업이 상하이 주식시장에 상장했다. 우루무치에서 서북쪽으로 136㎞ 떨어진 스허쯔(石河子)시에는 국가급 경제기술개발구가 들어섰다. 세계 최대의 면화 밭을 경작하는 스허쯔는 농업·공업·상업을 모두 갖춘 종합 도시로 탈바꿈했다. 스허쯔 신장 병단 군간박물관(軍墾博物館)은 병단의 66년 역사를 한데 모았다.
 
스허쯔의 국유기업 톈예(天業)그룹은 현재 108개국과 무역 관계를 유지하며 ‘일대일로(육·해상 신실크로드)’ 정책뿐 아니라 신장의 경제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지난해 병단의 1인당 가처분 소득은 3만3403위안(572만원)으로 전국 평균 3만733위안보다 많았다.
  
미국과 서방국, 군사·인권 압박
 
병단의 기여에도 불구하고 위구르족의 분리 독립운동 역시 계속되고 있다. 이를 막기 위해 중국은 회유와 억압 정책을 병행한다. 197명이 숨지고 1700여 명이 다친 2009년 7·5 우루무치 유혈사태가 터지자 유화책을 시행했다. 2014년 4·30 우루무치역 폭탄테러 이후 강압 정책으로 회귀했다. 4·30 테러는 시진핑 주석의 현지 시찰 마지막 날 발생해 파장이 컸다. 위구르족과 이슬람교도 100만여 명이 수용된 것으로 전해지는 직업재교육 캠프의 등장 시점과 맞물린다.
 
이달 4일에는 쇼핑몰 타오바오(淘寶) 모델로 활약하던 위구르족 메르단 가파르(31)가 사슬로 묶인 채 수용소에 수감된 영상을 영국 BBC가 공개했다. 중국은 가짜 뉴스라고 발끈했지만, 미국에 이어 영국까지 인권 탄압을 이유로 제재를 검토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1964~65년 신장에서 진행된 원자탄 실험은 생태학적 재난을 불러왔다. 대규모 이주와 관개 농업은 사막화를 촉진했다. 위구르족 문제는 종교뿐 아니라 환경 민족주의 갈등도 내포한다.
 
중국은 병단과 더불어 신장지역의 역사 연구 프로젝트인 ‘신장항목(2004-2009)’을 활용해 통합을 꾀했다. 한족과 위구르족을 중화민족으로 통합하려는 노력이다. 재교육 캠프와 같은 민족 분리 정책도 병행한다.
 
미·중 갈등이 첨예화하면서 미국이 인도·태평양 전략을 내세워 중앙아시아까지 군사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여기에 위구르족 인권을 문제 삼는 서방 국가가 늘고 있다. 도전에 맞선 병단의 귀추가 주목된다.
 
박선영 세종대 국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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