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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행적만큼 애국심도 충직···애국가 작곡 안익태 두 얼굴

중앙일보 2020.08.18 12:00
지휘자이자 작곡가였던 안익태. [사진 이경분 제공]

지휘자이자 작곡가였던 안익태. [사진 이경분 제공]

 “최근 광복회는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의 친일ㆍ친나치 관련 자료를 독일 정부로부터 받았습니다. 그 중에는 안익태가 베를린에서 나치와 함께 만주국 건국 10주년 축하 연주회를 지휘하는 영상이 있습니다. 민족 반역자가 작곡한 노래를 국가로 정한 나라는 전 세계에 대한민국 한 나라뿐입니다.” (김원웅 광복회장, 지난 15일 광복절 경축식 기념사)
 

"안익태 애국가 교체, 정답 아니다"

작곡가 안익태(1906~65)가 다시 불려나왔다. 애국가 작곡가인 안익태의 친일 행적 논란은 2006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전까지 주로 위인전에 등장하던 안익태에 대한 자세한 연구가 탄생 100주년을 맞아 활발히 이뤄지면서 구체적 행적이 드러나면서다. 두번째 논란은 2019년 정치학자 이해영이『안익태 케이스』를 출간하면서 일었다. 이해영은 안익태의 친일, 친나치 행적을 세세히 밝혔다. 일본 외교관과 베를린과 한 집에 머물며 스파이 역할을 했을 거란 심증까지 더했다. 
 
친일 행적이 드러날 때마다 애국가도 출렁였다. 애국가의 적정성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새로운 국가를 만들자는 주장도 나왔다. 급기야 이달 15일 75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김원웅 광복회장이 “대한민국은 친일파의 나라, 친일파를 위한 나라가 되었다”며 안익태를 예로 들기에 이르렀다.
 
안익태가 일본 지휘자로 활동했다는 사실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특히 김 회장이 밝힌 ‘만주국 건국 10주년 축하 연주 영상’은 이미 2006년 밝혀져 논란이 됐던 것이다. 당시 독일 유학생이었던 송병욱이 음악잡지 ‘객석’를 통해 이 영상을 공개했고 안익태 친일 행적을 대표하는 자료로 자리잡았다. 이 영상에서 안익태는 일본인이 쓴 가사에 오케스트라와 합창을 위한 ‘만주국 환상곡’을 작곡해 이를 직접 지휘했다. 이 곡엔 안익태 애국심의 상징이던 ‘한국 환상곡’의 선율까지 인용돼 있어 당시 100주년의 분위기를 급랭시켰다. 이 영상이 14년 만에 새롭게 논란이 된 것이다.
서울 이화여대 강당에서 지휘하고 있는 안익태. [중앙포토]

서울 이화여대 강당에서 지휘하고 있는 안익태. [중앙포토]

 
안익태를 수십년 연구한 음악학자들은 이미 밝혀진 자료를 가지고 10여년동안 정치적 공방이 벌어지는 점을 안타깝게 본다. 또 "이제 논의의 수준을 기계적 이분법과 흑백논리 이상으로 높일 때가 됐다"고 지적한다.
 
안익태의 친일 행적만큼이나 확실한 것은 모순적이게도, 그의 충직했던 애국심이었다. 안익태 기념재단은 “1919년 3ㆍ1 운동 때 수감자 구출운동에 가담했다가 평양 숭실중학교에서 제적당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또 애국가(1935년), ‘한국 환상곡’(1930년대, 정확히는 미상)을 썼던 30년대 중반까지도 미주 한인 신문 ‘신한민보’에 식민지 조국에 대한 슬픔을 토로했다.  
 
특히 애국가를 작곡하면서 “사방으로 헤매이는 불쌍한 우리 이천 만 동포”라는 표현을 신문에 기고하며 겨레가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를 꿈꿨다. 30여년 동안 안익태를 연구해 온 허영한(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학과 교수)은 “안익태는 미국 신시내티, 필라델피아에서 공부하던 1937년까지만 해도 애국자로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하지만 허영한도 “1941년 이후 안익태의 유럽활동이 친일임도 확실한 사실”이라고 할 정도로 안익태의 삶은 변화했다. 만주국 10주년 경축 음악을 작곡·지휘한 것 뿐아니라 1940년 로마에선 독일ㆍ이탈리아ㆍ일본의 파시즘 3국 동맹의 축하 무대에도 지휘자로 섰다. 친일 친나치 단체인 독일회(獨日會)의 다양한 행사에도 참여했다. 친일을 넘어 친나치 행적도 보였다. 음악학자 이경분(한국학 중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은 2007년 낸 책 『잃어버린 시간 1938-1944』에서 안익태의 ‘나치 제국음악협회 회원증’을 공개했다. 여기에 안익태의 출생지는 평양이 아닌 도쿄로 표기돼 있다. 무엇보다 유럽에서 ‘에키타이 안(Ekitai Ahn)’이라는 일본 지휘자로 1944년까지 일독 동맹을 위해 활동한 기록이 곳곳에 남아있다.
 
이경분은 ‘다시 안익태의 애국가 논란’이라는 지난해 논문에서 이렇게 분석했다. “그는 처음에는 선교사들이 만들어 놓은 미국으로의 길을 따라 갔던 평범한 유학생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제2차 대전 발발 후, 일본 제국이 만들어 놓은 나치제국으로의 길을 이용하면서 큰 스케일의 인물이 되었다. 물론 이 길은 친일과 친나치의 위험한 길이기도 했다.”
 
안익태는 이처럼 1930년대 말부터 일제에 동조했고 일본 지휘자로 활동했다. 또 해방 후에는 다시 애국자의 모습으로 돌아와 광복 10주년인 55년엔 청와대의 전신인 경무대에서 ‘한국 환상곡’을 연주한다. 안익태의 애국가는 1940년대 상해 임시정부가 공식 국가로 인정한 후 대한민국 국가가 된 것으로 전해진다.
 
학계에서는 안익태의 애국가 작곡과 친일 행적을 상반된 것으로 본다. 이경분은 “‘애국가’를 작곡했던 안익태와 ‘일본 지휘자’로 활동했던 안익태의 모순된 삶을 통해 어떤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을지 성찰해야 한다”고 했다. 허영한도 “이제 안익태에 관한 자료들은 그의 생애를 종합할 정도로는 어지간히 밝혀졌다. 그 똑같은 걸 놓고 과격한 해석을 통한 서로다른 주장만 반복되고 있다”며 “애국자로 미화하는 것도, 반민족적 친일파로 섣불리 단죄하는 것도 잘못된 주장”이라고 했다. 
 
이경분 역시 “소위 말하는 ‘친일잔재청산’ 방법으로서의 애국가 교체보다 더 중요하고 절실한 과제는 은폐되고 미화돼온 일제시기 음악가들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 “친일음악가에 대한 토론이 10여년째 똑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에 대해 한국의 음악학자로서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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