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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칼럼니스트의 눈] ‘김종인 효과’…돋보이는 싸움의 기술

중앙일보 2020.08.18 00:23 종합 22면 지면보기

여·야 지지율 역전에 숨은 또하나의 비밀

부동산에 대한 분노의 절반은 문재인 대통령의 유체이탈 화법 때문이다. 그의 어록은 끝이 없다. “부동산 문제는 자신 있다(2019년 11월 19일)”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에서 결코 지지 않을 것이다(2020년 1월 7일)” “집값이 급등한 일부 지역은 취임 전 상태로 원상복귀 돼야 한다(2020년 1월 4일)”…. 모두 빈말이 돼 버렸다. 신뢰와 믿음이 사라졌다.
 

문 대통령 빈말과 진보의 거친 표현
중도 향한 김종인의 세련된 발언들
통합당, 극우와 선 긋고 품격 되찾길
상식과 합리적 전문가 의견 따라야

요즘 SNS에 퍼지는 “문 대통령은 얼마나 약속을 지켰나”는 글도 마찬가지다. ▶중요 사안은 대통령이 직접 언론에 브리핑하겠다 ▶북한이 제일 무서워하는 대통령이 되겠다 ▶저에 대한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훌륭한 인재를 삼고초려해 일을 맡기겠다 ▶불가능한 일을 하겠다고 큰소리치지 않겠다 ▶잘못한 일은 잘못했다고 말씀드리겠다…. 모두 실없는 이야기가 돼 버렸지만 사과나 변명조차 없다. 기억에 남을 딱 하나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다짐뿐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종인 위원장 어록

문재인 대통령과 김종인 위원장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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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진보 쪽 인사들의 언어는 거칠기 짝이 없다. 최강욱 의원은 당선되자마자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도록 갚아주겠다”고 했다. 임은정 검사는 떠나는 선배 검사장 등 뒤로 “간교한 검사”라는 섬뜩한 비수를 꽂았다. 이런 난폭한 언어들은 중도층의 거부감과 역풍을 부르고 있다. 지난주 민주당과 통합당의 지지율이 역전된 배경의 하나다.
 
요즘 통합당의 모습은 달라졌다. 단순히 청와대와 여당의 헛발질에 따른 반사이익 때문만은 아니다. 특히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의 싸움 기술은 남다르다. ‘김종인 효과’라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그는 자신의 말과 글이 되는 몇 안 되는 정치인 중 한 명이다. 최근의 대통령들 중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신의 말과 글을 가진 대표적 인물이다. 사전에 써준 원고만 줄줄 읽는 정치인들과 달리, 자신의 가치관과 논리가 분명히 서 있다. 이런 정치인들은 어떤 질문에도 망설이지 않고 답변하며, 그 말을 글로 받아적으면 대체로 근사한 문장이 되곤 한다. 생각이 정리돼 있기 때문이다.
 
최근 극우와 극좌 정치인들의 이야기는 지루하다. 미리 결론을 정해 놓은 뒤 자신들의 지지층을 향해 ‘기·승·전-문재인 퇴진’으로 몰고 가거나, ‘기·승·전-과거 정권 탓’이라 우긴다. 제목만 들어도 너무 뻔한 스토리에 지겨울 정도다. 표현이 세다고, 목소리가 크다고 메시지가 선명한 것도 아니다. 이에 비해 김 위원장의 눈과 입은 중도층을 향해 있다. 첫 비대위 회의에서 “진취적 정당이 되겠다. 진보보다 더 국민 마음을 사고, 진보보다 더 앞서가겠다”고 했다. 아예 통합당에 ‘보수·자유 우파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말라’며 선을 그어 버렸다.
 
그는 민주당 비대위원장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2016년 초 개성공단이 빤히 보이는 경기도 파주 군부대를 방문해 “장병들이 국방 태세를 튼튼히 유지하고 우리 경제가 더 도약적으로 발전하면 언젠가 북한 체제가 궤멸하고 통일의 날이 올 것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진보 쪽의 신앙이나 다름없는 햇볕정책을 정면으로 뒤엎어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민주당 의원들은 아무 소리도 못 했다. 단지 조국 서울대 교수만이 “다른 건 몰라도 햇볕정책과 개성공단 ‘우클릭’에 대해선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영입된 ‘계몽절대군주’에 충실히 따르면 만사 오케이인가”라며 잠시 태클을 걸었을 뿐이다.
 
김종인의 언어는 메시지가 선명하다. 이에 비해 표현은 점잖다. “천박한 도시” “XX 자식” 같은 극단적 단어를 툭툭 내뱉는 이해찬 민주당 대표와 다르다. 김종인은 “독재 정권” “사퇴하라” 같은 거친 표현을 잘 쓰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상대방 급소를 찌른다. 그는 윤석열 검찰총장에게 마구 총질하는 추미애 법무부 장관을 향해 “인성의 문제”라고 저격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와 김현미 국토부 장관에겐 “능력 없으면 스스로 그만두라”고 했다. 대놓고 “해임시켜라” “퇴진하라”며 주먹을 휘두르는 것보다 맞는 사람에겐 훨씬 아프다. 중도층 입장에서도 속이 뻥 뚫리는 신선한 사이다 발언이다.
 
김 위원장은 유체이탈 화법과 거리가 멀다. 라임이 살아있고 제목이 바로 나온다. ‘황세모’(동그라미도 아니고 가위표도 아닌)라는 황교안 전 대표나 ‘엄중’이란 별명이 붙은 이낙연 전 총리와 비교된다. 황 전 대표는 어떤 질문에도 “여러 얘기를 듣고 있다”며 두루뭉술하게 넘어갔고, 이 전 총리는 주요 현안들에 “엄중히 지켜보고 있다”는 답답한 말만 반복한다. 이에 비해 김종인은 한마디로 ‘기사가 되는’ 이야기를 한다. 사회적 관심을 집중시키는 법을 잘 아는 것이다. 이를테면 “차기 대선 주자로 백종원 같은 분이 어떨까”라고 툭 던지는 식이다. 비정치인이라도 대중 친화적 인물이라면 누구라도 리더가 될 수 있다는 대담한 제언이다. 놀랄만한 은유를 동원해 자신의 말을 돋보이게 하는 빼어난 솜씨다. 대중들의 감정선을 건드려 공감을 끌어내는 이른바 ‘뼈 때리는 발언’의 감각이 뛰어나다.
 
또 하나 돋보이는 것은 세련된 논리다. 거친 직설화법이 아니다. 지난주 중앙일보와 일문일답도 그러하다. “통합당이 장외투쟁에 나서지 않는다고 야성이 없다고 하는데, 세상 바뀐 걸 알아야 한다. 옛날식 우격다짐만으로 지지율이 높아지지 않는다. 정권 교체가 불가능했던 시절에나 거리에서 악을 쓰는 것이다. 지금은 얼마든지 선거로 정권을 바꿀 수 있다.” 소수 야당의 한계와 비애를 거꾸로 뒤집어버리는 대담한 발상의 전환이 놀랍다. 삭발·단식 같은 투쟁을 안 해도 정권은 바뀔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중도층에 불어넣고 있다. 세련된 논리다.
 
김종인의 가장 큰 경쟁력은 유연한 노선이다. 그는 상식적 시각에서 현안을 조리 있게 정리하고, 합리적 논리로 풀어가며, 마지막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생각이 궁금하다”고 되묻는 화법을 자주 사용한다. 조국 전 장관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는 발언에 대해 “문 대통령은 국민의 고통에는 진짜 미안한 마음이 없는지 묻고 싶다”고 반문했다. 추미애 장관의 칼춤에 “문 대통령에게 묻고 싶다. 실질적으로 검찰이 어떤 모습을 갖추게 하려는 것인지 입장을 분명히 밝혀달라”고 했다. 일선 행동대장들을 건너뛰어 대통령에게 직접 묻는 형식으로, 그 최종 판단은 중도층 대중에게 맡기는 화법이다. 이런 형식은 진영논리에도 빠지지 않는다. 국민적 시각에서 반문하는 만큼 더 큰 공감을 부르게 된다.
 
그제 김원웅 광복회장의 광복절 축사에 대한 반응도 마찬가지다. 통합당 대변인은 “김 회장은 즉각 사퇴하라”고 했다. 야당 공격수들의 “깜냥도 안되는 망나니짓” “국민을 이간질하는 매국 행위”라는 습관적 비아냥도 뒤따랐다. 여당이 “통합당은 친일파의 대변자냐”며 ‘쌍방폭행’으로 몰고 간 것 역시 익숙한 풍경화다. 하지만 김종인은 “무엇을 목적으로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겠다”며 “그런 사람이 어떻게 광복회 행사장에 나와서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됐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한마디로 ‘고급진’ 대응이다. 진보 쪽의 ‘친일 대 반일’ 프레임을 되치기해 중도층으로 하여금 그런 편가르기에 거부감과 불편함을 느끼도록 만드는, 고도로 계산된 발언이다. ‘무슨 목적’ ‘그런 사람’ ‘그런 분위기’라는 표현 자체에 저질적 도발을 일삼는 상대편과 차별되는 품격이 녹아있다. 남편 오바마를 뛰어넘는 명연설가 미셸 오바마는 “저들이 비열하게 굴더라도 우리는 품위를 지킨다(when they go low, we go high)”고 했다. 박근혜 탄핵으로 망가진 보수 야당이 다시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해법도 경험과 능력, 품격이 아닐까 싶다.
 
통합당, 코로나는 정은경의 지침 따라야
통합당과 김 위원장에게 발등의 불은 제2의 코로나 사태다. 8월 15일을 기점으로 다시 좌우 진영이 서울 도심으로 쏟아져 나왔다. 특히 일부 기독교 진영은 코로나 위험 속에 예배와 거리 집회를 고집하고 있다. 이제 통합당은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극우 진영은 굳이 끌어안지 않아도 여야 맞대결에서 결코 진보 쪽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없다. 결국 판세를 좌우하는 중도층을 잡으려면 극단적 세력과 분명하게 선을 긋고,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들은 목소리가 크지만 확장성이 없다. 중도층에겐 비호감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통합당은 1차 코로나 사태 때 반사이익의 떡고물만 챙기다가 총선에 참패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중도층 입장에선 코로나 때문에 다시 아이들을 학교나 어린이집에 못 보내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을까, 가장 고민이다. 만에 하나 그런 악몽이 재연된다면 가혹한 책임을 물을 게 분명하다. 동료 시민에 대한 배려나, 같은 공동체에서 더불어 살아가겠다는 의지가 전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통합당도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과 권준욱 중앙방역대책 부본부장의 지침에 충실히 따르는 게 중요하다. 코로나에 관한 한 두 사람이 최고의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집회나 예배를 자제하라고 하면 자신의 지지계층을 향해 집회와 예배 자제를 주문해야 한다. 물론 통합당은 금단현상에 시달릴 수 있다. 하지만 다원화된 사회에서 각 분야의 전문가 의견을 따르는 게 민심을 얻는 일이다. 통합당으로선 ‘김종인 효과’를 계속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른다.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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