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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기안84 웹툰 논란 뒤에 숨은 네이버, 주류 플랫폼의 무게 느껴야

중앙일보 2020.08.18 00:04 경제 2면 지면보기
심서현 산업기획팀 기자

심서현 산업기획팀 기자

11년 전 웹툰 작가 기안84(본명 김희민)가 내민 세계는 생경했다. 입시 경쟁에서 밀려나 ‘노스페이스 패딩’으로 한 덩어리가 되는 고교생(‘패딩신드롬’), 만인이 만인을 갈구는 전·의경의 군생활(‘노병가’)을 거칠게 그려냈다. 거기엔 주류 문화가 외면해 온, 열정도 능력도 꿈도 없는 청소년의 ‘매운맛 현실’이 있었다.
 

K-웹툰 간판으로 성장한 기안84
성상납 암시, 장애인 비하 내용
‘표현의 자유’로 방치하면 안 돼

네이버웹툰에 2011년 연재한 ‘패션왕’이 시쳇말로 터졌다. 존재감 없는 ‘아싸’(아웃사이더) 남고생이 패션에 눈을 떠 ‘인싸’(인사이더)가 된다는 내용에 청소년이 열광했고, 영화로도 제작됐다. 난무하는 비속어와 산으로 가는 전개는 여전했지만 독자들은 이해했다. 비주류 감성, 그게 기안84니까. 연간 수억원의 콘텐트 수입을 올리는 김 작가는 청소년의 선망의 대상이요, MBC 예능에 고정 출연하는 셀럽(유명인)이 됐다.
 
웹툰 작가 기안84의 네이버 웹툰 ‘복학왕’의 한 장면. 지난해 청각장애인 희화화로 비판 받았다. 최근엔 인턴 여직원의 성상납 암시로 논란이 됐다. [사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웹툰 작가 기안84의 네이버 웹툰 ‘복학왕’의 한 장면. 지난해 청각장애인 희화화로 비판 받았다. 최근엔 인턴 여직원의 성상납 암시로 논란이 됐다. [사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16년 전 네이버 웹툰은 포털사이트 한쪽 코너였다. 이젠 시총 50조 기업 네이버의 콘텐트 사업을 이끄는 주류 서비스다. PC·기성세대 중심이던 네이버에 ‘모바일·밀레니얼’을 끌어들인 성과로, 2017년 CIC(사내독립법인)로 분사했다. 지난 2일에는 콘텐트 하루 거래액이 30억원을 넘겼고, 연간으론 1조원을 바라본다. 마감 어기는 작가들 ‘잡아 오던’ 웹툰 담당 ‘김준구 대리’는 네이버의 유망 계열사 대표이사가 됐다.
 
지난해 9월 네이버웹툰 서비스설명회에서 성과를 발표하는 김준구 네이버웹툰 대표. [사진 네이버]

지난해 9월 네이버웹툰 서비스설명회에서 성과를 발표하는 김준구 네이버웹툰 대표. [사진 네이버]

이들은 지난주 홍역을 치렀다. 기안84가 네이버웹툰 ‘복학왕’에 그린, 지방대 출신의 무능한 20대 여성 인턴이 대기업 40대 팀장과 성관계 후 정직원이 되는 것처럼 암시한 내용 때문이다. 이 웹툰은 ‘15세 이상 이용가’이지만 인증 없이 누구나 볼 수 있다. 웹툰과 예능 프로그램(MBC ‘나 혼자 산다’) 게시판은 전쟁터가 됐다. “여자는 성상납해서 취업한다는 거냐”는 비판과 “만화에 도덕을 요구하냐”는 옹호가 맞섰다. 예전 일도 소환됐다. 작가는 지난해 같은 작품에서 청각장애인을 희화화해 장애인단체의 항의를 받고 사과한 적 있다. 이번엔 네이버가 사과 공지를 올리고 작가는 문제 된 부분을 삭제했다. 하지만 ‘웹툰 연재 중지’ 청와대 국민 청원에 11만 명이 동의하며, 논란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기안84와 네이버웹툰은 억울할 수 있다. ‘비주류 감성’은 예술의 영역이니까. 그러나 비주류의 거칠고 독함이 표현의 자유로 인정받는 건, 강자와 사회 구조를 비판·풍자하는 약자의 무기일 때다. 기안84 만화 속의 동남아 출신 노동자, 장애인, 여성 묘사가 비판받는 것은 단지 거칠어서가 아니다. 한국 사회의 약자에 대한 편견을 굳히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자기보다 약한 계층을 거칠게 다루는 것을 우리는 ‘문화’가 아닌 ‘폭력’이라고 부른다.
 
그래도 억울할 것이다. 기안84는 원래 그랬으니까. B급 감성, 거친 묘사는 변함없는 그의 특징 아닌가. 그게 문제다. 기안84와 네이버웹툰이 선 자리가 변했다. 이제 이름 없는 마이너 작가가 아니라 ‘K-웹툰’의 대표주자다. 웹툰이 더 이상 하위 문화가 아닌 거대한 지적재산권(IP)이기에, 네이버는 웹툰 본사를 미국으로 옮겨 사업을 키우려 한다. 이들은 이미 한국 대중문화의 강자이자 청소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제는 주류의 무게를 느낄 때다. 커져 버린 존재를 외면한 채 ‘표현의 자유’ 뒤에 숨어 약자 비하를 방치하는 것은 플랫폼, 네이버의 게으름이다. 이번 사건의 방점이 작가 개인의 품성론보다는 ‘주류 플랫폼의 책임’에 찍혀야 하는 이유다. 제 힘을 모르는 강자는, 위험하다.
 
심서현 산업기획팀 기자 shsh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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