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Focus 인사이드]북한군 만난 미군 불과 6시간만에 도망쳐

중앙일보 2020.08.17 15:58
죽미령에서 밀려난 후 평택 인근에서 2.36인치 바주카포로 적 전차 요격을 시도하는 스미스 특임대 병사 [wikipedia]

죽미령에서 밀려난 후 평택 인근에서 2.36인치 바주카포로 적 전차 요격을 시도하는 스미스 특임대 병사 [wikipedia]

 
6·25 전쟁이 일어난 지 5일이 지난 1950년 6월 30일, 미국이 지상군 투입을 결정했다. 일본에 주둔한 미 육군 제24 보병사단에게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명령을 받은 사단장은 전황을 고려해서 본대 투입에 앞서 선발대를 항공편으로 먼저 투입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예하 제21연대에서 차출한 1개 대대에 1개 포대를 증강해 7월 1일 한반도로 보냈다. 이 선발대는 대대장의 이름을 따서 스미스 특임대로 정했다.
 
하지만 그들은 전쟁과 관련한 아무런 사전 정보가 없었다. 이다츠케 비행장에서 부산으로 가기 위해 한창 준비에 여념이 없던 스미스 중령에게 하달된 명령은 다음과 같았을 정도였다.
 
“부산에 도착하면 대전으로 올라가 전방 지휘소의 처치 준장과 접촉한 뒤 정보를 얻어라. 그리고 이후에 선편으로 부산에 도착할 사단 본부와 연락을 취하라. 만일 이때까지 사단과 연락이 되지 않으면 대전에서 가능한 한 북쪽으로 더 전진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고 적의 진격을 막아라. 더는 정보가 없다”
  
대전역에 도착한 스미스 특임대. 이들은 자신만만하게 전쟁에 뛰어들었지만 치욕의 주인공이 됐다. [wikipedia]

대전역에 도착한 스미스 특임대. 이들은 자신만만하게 전쟁에 뛰어들었지만 치욕의 주인공이 됐다. [wikipedia]

 
한마디로 알아서 싸우라는 것이었다. 당시 미군은 불과 5년 전에 독일과 일본을 동시에 상대하여 모두 격멸한 군대라는 하늘을 찌르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북한군은 자신들을 보면 도주할 것이고 그다음은 오늘날 평화유지군처럼 잠시 주둔하면서 치안 활동만 할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그들은 북한군을 미개한 후진국 군대라고 평가했지만, 시나브로 나약하게 변모한 자신의 모습은 전혀 돌아다보지 않았다.
 
애당초 스미스 특임대는 평택에 방어선을 설치하려 했다. 그러나 후속한 제34연대가 평택-안성 선까지 올라올 예정임을 통보받고 좀 더 북상해 오산 북방 4㎞ 지점 능선에 진지를 구축하기로 결심했다. 7월 5일 오전 3시 1번 국도와 경부선 철도가 지나는 천혜의 교통로인 죽미령에 도착한 스미스 특임대는 양측 고지에 예하 중대를 나누어 배치하고 포대는 후방 수청리에 전개했다. 하지만 북상 중인 제34연대와 연결이 단절된 상태였다.
 
오전 8시가 되자 북한군 제107전차연대 소속 전차 8대가 제4사단 정찰대의 호위를 받으며 1번 국도를 따라 죽미령 방향으로 다가오는 것이 관측됐다. 이들을 뒤이어 30여대의 전차와 5000여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본진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체 따라오고 있었다. 이처럼 북한군의 전력이 예상을 넘었지만, 스미스 특임대는 위기를 느끼지 못했다. 그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상황이 종료될 것이라 낙관했다.
 
2008년 죽미령에서 거행된 기념행사. 만용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뼈저리게 깨달은 미군은 죽미령 전투를 잊지 말아야 할 반면교사의 사례로 삼고 있다. [wikipedia]

2008년 죽미령에서 거행된 기념행사. 만용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뼈저리게 깨달은 미군은 죽미령 전투를 잊지 말아야 할 반면교사의 사례로 삼고 있다. [wikipedia]

 
북한군 선두가 1.8㎞까지 접근하자 수청리에 방열한 포대가 일제히 포격을 가하면서 전투가 시작됐다. 이것은 6·25 전쟁이 국제전으로 비화했음을 의미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자신만만하게 선공을 가했지만, 북한군의 전차는 전진을 계속했다. 전방 600m 부근까지 다가오자 75㎜ 무반동총으로 전차를 공격했지만, 북한군의 전차는 날아온 포탄을 간단히 튕겨내고 주포와 기관총을 난사하며 죽미령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들은 미군의 저항을 간단히 물리친 뒤 방어선을 지나쳐 곧바로 오산을 향해 내려갔다. 국군이 북한군 전차와 처음 부딪혔을 때 당했던 T-34의 공포를 미군도 서서히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군은 여전히 오만했다. 전사에 나와 있는 대목이다.
 
북한군 전차가 진지를 돌파하면서 미군들을 무시하듯 통과하자 미군 중사가 외쳤다.
 
“야 이놈들아! 우리는 한국군이 아니다. 우리는 미군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미군인 것을 몰라 북한군이 건방지게 공격을 하는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이었다. 뒤이어 북한군 본진이 나타나 죽미령 좌우를 포위하고 집중적으로 공격을 가하자 더는 버틸 여력이 없었다. 6시간의 전투에서 540명으로 구성되었던 스미스 특임대는 전사 120명, 포로·실종 36명, 부상자 150여 명과 더불어 대부분의 중화기와 장비가 완전히 포기하는 참패를 당했다.
 
죽미령 전투의 패배를 상징하는 그림 등을 포함한 워싱턴 홀의 스테인드글라스. [forwhattheygave.com]

죽미령 전투의 패배를 상징하는 그림 등을 포함한 워싱턴 홀의 스테인드글라스. [forwhattheygave.com]

 
미군은 병력, 화력은 물론이거니와 병사의 질과 훈련에서도 북한군에 뒤졌다. 만약 훈련 상황이라면 핑계라도 댈 수 있겠지만, 실전에서는 그 대가가 패배였다. 더구나 그들의 뒤에는 증원군도 없었고 당연할 것으로 믿었던 항공 지원도 기상 상태로 인해 기대할 수 없었다. 하다못해 연락을 통해 조언을 구할 최소한의 방법조차도 없었다. 한마디로 적을 깔보고 준비를 게을리한 대가였다.
 
미 육군사관학교의 생도 식당인 워싱턴 홀 창문에는 역사적으로 유명하거나 미군이 참전한 전투들을 기념하기 위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다. 특이하게도 그중에는 한심한 이유로 패하거나 어려움을 겪은 전투들도 포함돼 있다. 그중 하나가 죽미령 전투다. 그만큼 미군 역사에 길이 기억될 충격적인 패배였던 것이었다. 이러한 미군의 노력은 우리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듯싶다. 굴욕을 잊으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