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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현의 시선] 기상청 체육대회 날, 비가 오는 나라

중앙일보 2020.08.17 00:35 종합 28면 지면보기
김승현 정치에디터

김승현 정치에디터

20년 넘은 옛날 개그가 한반도를 덮친 폭우로 되살아났다. “기상청 체육대회 날 비가 온다”는 비아냥은 유서 깊은 금언처럼 채근담에 실릴 판이다. 날씨 예측의 임무에서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는 기상청을 향한 분노가 만들어낸 촌철살인이다. 가족의 생명과 재산을 잃은 수재민에겐 그마저도 외람된 느낌이다. 잘못된 예보로 하루를 날린 공사 현장의 불만도 상상을 초월한다.
 

틀린 날씨 예측은 빙산의 일각
정부 무능과 폭주에 법치 흔들
일기예보보다 헌법 더 불안정

“예보가 아니라 중계”라는 비난을 받는 한심한 실상은 빙산의 일각이다. 정부 기능의 실패는 꼬리를 문다. 한국수자원공사는 금강 상류의 용담댐 방류량을 줄였다가 집중 호우 때 늘렸다는 의혹이 일자 냉큼 기상청을 탓했다. “강 하류의 펜션과 래프팅 업체에서 방류량을 줄여달라는 민원을 했고, ‘장마가 곧 끝난다’는 기상청 예보에 따라 관리 지침 대로 수위를 조절했다”면서다. 진상이 무엇이든 취약한 댐 관리 시스템이 들통났다. 수재민 돕기 생방송 중 성금 봉투를 찾아 헤맨 여당 대표의 팬터마임은 애교 수준이다.
 
치수(治水)를 책임질 것 같은 이름을 가진 수자원공사도 ‘개밥에 도토리’ 신세다.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은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이 홍수 피해를 키웠는지, 아니면 줄였는지를 싸움으로 가릴 기세다. 민주당은 이전 정부에 책임을 돌리고 싶고, 이전의 여당은 “4대강 보가 홍수의 원인이라 생각하면 폭파하라”고 맞선다. 신·구 권력의 거친 책임 논쟁에 전문가들은 소외된 도토리가 되어도 마다치 않는다.
 
문재인 정부의 태양광 사업도 홍수 피해의 용의 선상에 올랐다. “온 나라를 파헤쳐 만든 태양광 시설이 자연적인 홍수 조절 기능을 마비시켰다”(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주장이 그럴 법하다. 이에 산업통상자원부 등은 전국 1만2000여 개 산지 태양광 발전 시설 중 12개에서만 산사태 피해가 발생했다는 통계를 내놓고 있다. 정부 통계는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곧이들리지 않는데 서두른 티가 역력하다. 조만간 감사원의 감사와 국회의 국정조사로 진상 규명의 바통이 넘어가겠지만, 정치권의 악다구니는 그저 소음에 불과할 것이란 의심은 합리적이다.
 
구원투수격인 감사원도 먹구름에 뒤덮여 있다. 속사정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객관과 공정을 담보하는 헌법기관으로서의 권위와 신뢰는 무너졌다. 월성 원전 1호기 폐쇄 결정에 대한 감사를 진행하고도 결과 발표를 안 하는지, 못 하는지 ‘동작 그만’ 상태다. 외부에 구조 신호를 보내는 듯한 최재형 감사원장에게 여권은 맹공을 퍼붓고 있다. “한국수력원자력이 경제성 평가를 왜곡해서 원전 폐쇄를 수행했다는 그림을 가지고 있다” “친정부 성향이라는 이유로 감사위원 추천을 거부한다”고 비판한다.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낸 조기숙 교수는 이런 여권의 ‘찍어내기’ 움직임에 “박근혜 정부의 (양건 전 감사원장 사퇴) 사건이 데자뷔로 떠올랐다”고 페이스북에 적었다. “민주당은 지난 정부에서 자신들이 했던 말만 기억하고 그대로 실천하면 좋겠다”는 조 교수의 제안이 먹구름 속 한 줄기 빛이 될 것으로 기대하는 순수 천사는 없을 것이다. 당시 민주당은 “감사원장에게 법으로 보장된 감사위원 제청권마저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다면 감사원의 독립성을 제대로 지켜낼 수 있느냐”고 주장했다.
 
‘바른 감사 바른 나라’가 원훈이라는데 최 감사원장이 ‘제2의 윤석열’로 불리는 게 현실이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법무부 장관과 여권으로부터 ‘개혁의 걸림돌’ 취급을 받는 상황에 빗댄 것이다. 최 원장은 일부 시민단체가 월성 1호기 감사에 대한 공익감사를 청구하면서 감사 대상이 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검찰총장(2019년 7월 임명)과 감사원장(2018년 1월 임명)은 권력의 폭주에 수사와 감사의 대상으로 내몰렸다.
 
헌법의 원리가 부여한 권한과 권리마저 무참히 짓밟히는 이율배반은 반복되고 있다. 사유재산제, 거주 이전의 자유, 시장경제 등 우리 삶의 근간을 헌신짝처럼 여기는 부동산 정책은 또 어떤가. 이쯤 되면 막가자는 것인지 의문이 커지는 와중에 문 대통령은 광복절 기념사에서 다시 헌법을 내세웠다. “모두가 함께 잘 살아야 진정한 광복”이라며 인간의 존엄과 행복추구권(10조)을 강조했다. "개인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나라”는 헌법의 다른 조항엔 관심없다는 얘기인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그 나라에선 헌법보다 일기예보가 더 미더운 것인가. 신뢰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국민은 뫼비우스의 띠를 돌아 다시 불신의 출발점에 섰다.
 
김승현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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