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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다' 원했지만 '고구마' 답변만 내놨다···靑국민청원 3년

중앙일보 2020.08.16 05:00
청와대 국민청원 답변 분석.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청와대 국민청원 답변 분석.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경찰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투입해 철저히 수사하겠습니다."

 
지난 3월 성 착취 텔레그램 대화방인 'n번방' 사건과 관련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글에 대한 민갑룡 당시 경찰청장의 답변이다. 그는 "국민 요구에 어긋나지 않게 불법 행위자를 엄정 사법처리하고 신상공개도 검토하는 등 단호히 조치할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언뜻 보면 모범 답안처럼 보이지만 해당 청원은 n번방 가입자에 대한 '신상공개'를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474만여명이 동의한, 말 그대로 '국민' 청원이었다. 하지만 답변은 핵심을 비껴갔다. 당시 인터넷 카페 게시판 곳곳에선 '보여주기식' 답변에 실망했다는 글이 줄줄이 올라왔다.
 
3주년을 맞은 국민청원 게시판이 개설 취지와 달리 국민 욕구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는 2018년 7월 문재인 대통령 취임 100일을 맞아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는 취지의 국민청원을 도입했다. 누구나 이용할 수 있고, 기준을 충족하기만 하면 청와대가 답한다는 점에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청원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20만명 이상 동의를 얻은 경우에도 '수박 겉핥기식' 답변을 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답변한 청원 '해결' 11% 불과

15일 현재 '30일간 20만 회 이상 추천' 기준을 만족해 청와대로부터 답변을 받은 청원은 178개다. 본지 분석 결과 문제를 해결하거나 해결을 약속한 경우는 19건(10.6%)으로 나타났다. 국민은 '사이다' 질문을 던졌지만 돌아온 건 정부의 '고구마' 답변이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구체적으로 해결하거나, 해결을 약속한 경우는 ▶이국종 교수 권역외상센터 지원 관련 ▶초·중·고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 ▶자주포 폭발 사고 치료, 국가유공자 지정 ▶웹하드 카르텔 특별수사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임명 ▶조국 장관 가족 인권침해 조사 ▶섹시 팬티 남교사 파면 등이다.
 
나머지는 속 시원한 해결과 거리가 멀었다. 구체적으로 ▶즉각적인 해결이 어렵다며 방향을 제시하거나(44건·24.7%) ▶사회적 논의가 우선돼야 한다는 식으로 모호한 입장을 밝히거나(54건·30.3%) ▶불가능하거나 해결 권한이 없다는 식으로 답하거나(53건·29.7%) ▶기타 응원하는 내용이거나 가짜 뉴스에 대한 답변(8건·4.4%)으로 조사됐다.
 
예를 들어 '삼권분립의 법칙'을 들어 국회·법원 소관이라 정부 권한 밖이라며 답변이 곤란하다는 경우가 많았다. '국회의원 연봉 인상 반대' '퀴어 행사 개최 반대' '유승준 입국 금지' 등 청원에 대해 청와대는 "삼권분립에 위배돼 답변 권한이 없다"며 답변을 마무리하는 방식을 택했다. 개별 사건에 대해 호소하는 청원에 대해선 주로 "수사·재판 중인 청원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 캡처]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 캡처]

직장인 허승진(38)씨는 "국민청원 도입 초반엔 신선한 시도라고 생각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면서도 "시간이 갈수록 20만명 기준을 채워도 형식적인 답변만 돌아와 무용지물이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주부 이민영(36)씨는 "어떤 문제를 사회적으로 논의하려면 '청와대 국민청원 20만 동의'가 기본 항목으로 자리잡힌 느낌"이라며 "국민 마음을 알겠다면서 어쩔 수 없이 해결은 안 된다는 정해진 레퍼토리가 반복된다"고 지적했다.
 
강정수 청와대 디지털소통센터장은 "양형기준에 대해 법원을 비판하는 청원이 올라오면 답변에서는 성범죄 관련 현 정부가 추진 중인 정책을 설명하는 식"이라며 "청원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 의미에 관해 설명하려고 하고 있다"고 했다.
 

보수vs.진보 격돌장 되기도

국민청원 게시판이 진보와 보수 세력 간 격돌의 장이 되면서 분열을 부추긴다는 지적도 나온다. 해결하는 일은 없고, 국민 갈등만 심화시킨다는 얘기다. 지난 2월에는 '문재인 대통령을 응원합니다'란 제목의 청원에 150만4597명, 그보다 앞서 올라온 '문재인 대통령의 탄핵을 촉구합니다'란 청원엔 146만9023명이 각각 동의해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다. 지난해 4월 22일 올라온 '자유한국당 정당해산 청원'에는 183만1900명, 같은 달 29일 올라온 '더불어민주당 정당 해산청구' 청원에는 33만7964명이 각각 서명했다. 
 
지난해 '조국 사태' 당시에는 당시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법무부 장관 임명을 두고 국론이 갈렸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임명을 반드시 해달라'는 청원에는 75만7730명,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법무부 장관 임용을 반대한다'는 청원에는 30만8553명이 각각 서명했다.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국민청원이 이슈 현안을 파악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순 있지만, 문제 해결 기능은 하고 있지 못하다"며 "어떤 사안의 경우 오히려 청원이 논란을 야기한 측면도 있다. 과도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은 지양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터무니없는 청원 개선 필요"

지극히 사적이거나 무분별한 내용, 혐오 표현을 담은 청원이 난무해 불필요한 갈등을 부추기고 본래 취지를 흐린다는 우려도 나온다. '군내 위안부 재창설' '남성도 의무적으로 인공 자궁을 이식받도록 하라' '커플들에게 데이트 비용을 지원해달라' '특정 아이돌 그룹의 팬클럽을 해체해 달라'는 등 청원이 대표적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금 같은 게시판 형식으로는 본질을 벗어난 청원에 대해 개선 가능성이 없다"면서 "누구나 글을 올려 노출할 수 있고 또 누구나 동의를 해서 20만이 넘어가면 답해야 하는 시스템이 계속된다면 끝없이 자극적이고 기존 제도를 뛰어넘는 요청들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청와대는 국민청원이 소통의 장으로서 순기능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적 사안에 대해 여론을 환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강 센터장은 "인권·성 평등같이 사안이 청원을 통해 이슈화하고 있다"면서 "여론을 환기하는 계기라 많은 국민이 참여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직접적이진 않더라도 간접적인 제도 개선이 이뤄진 부분이 많다"며 "과거엔 초등학교 이상에서만 성교육이 이뤄졌지만, 아동 간 성범죄 관련 청원을 계기로 보육원 성교육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라고 설명했다.
 
권혜림 기자 kwon.hyer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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