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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비웃음’을 ‘함께 웃음’으로 돌려주다

중앙일보 2020.08.16 00:03

집단적 조롱 현상을 대하는 자세 놀라워... 유머로 전환한 ‘진짜 깡’

사진: MBC

사진: MBC

 
 

조지선의 심리학 공간

 
 
 
“제발 초심을 잃어주세요.”
 
“형, 나는 이 춤이 멋있다고 생각하며 한 땀 한 땀 무지하게 노력했을 형을 생각하니 괜히 슬퍼진다. 대충하지 그랬어….”
 
누리꾼들이 가수 비의 ‘깡’ 뮤직비디오에 달아놓은 댓글이다. ‘깡’은 2017년 12월 비가 발표한 미니앨범 ‘마이 라이프 애(MY LIFE愛)’의 타이틀곡이다. 발표 당시 이 곡을 둘러싼 분위기는 처연했다. ‘이게 뭐냐’는 차가운 비판과 ‘어쩌다 이렇게 된 거냐’는 쓸쓸한 소회가 교차했다. “빈틈없이 촌스럽고 끊임없이 어긋났으며 쉴틈없이 안타깝다.” 기사에 많이 인용되며 널리 알려진 분석 댓글이다.
 
가사를 들어보자. “내 이름 레인. 왕의 귀환. 스케줄 All Day. 내 매니저 전화기는 조용할 일이 없네. 귀찮아 죽겠네. 섭외 받아 전 세계 왔다 갔다. 화려한 조명이 나를 감싸네. 불 꺼진 무대 위 홀로 남아서 떠나간 그대의 목소릴 떠올리네.”
 
일관성과 개연성이 무너진 가사 때문에 적잖은 이들이 괴로워했다. 한 댓글은 ‘지 잘났다고 랩 하다가 갑자기 애절해지는 게 이 노래의 킬링 포인트’라고 했다. 시대착오적 장치들이 포진한 의상과 함께 그의 춤이 도마 위에 올랐다. ‘괴랄하다(괴이할 뿐 아니라 악랄하다)’는 평이 돌았다.
 
 

‘사회적 왕따 경험’ 성인 절반 ‘비웃음 공포증’ 앓아

3년 전에 사라진 이 노래가 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은 지난 3월 한 여고생이 커버댄스를 유튜브에 올리면서다. 순식간에 ‘깡’의 뮤직비디오에 ‘조롱놀이 댓글잔치’가 펼쳐졌다. 영상보다 댓글을 보러 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면서 가장 핫한 ‘댓글맛집’이 돼버린 거다.
 
“모자와 조끼 만들어 준 사람 모두가 잘못이 있습니다.”
 
“누가 그러던데, 저 RAIN 모자가 숙주가 아니냐고….”
 
“4살 남자 조카보다 더 만진다(신체 주요 부위를 만지는 꼬만춤을 보며).”
 
“전 국민 김태희 눈치 보는 노래”
 
깡팸(깡 패밀리)을 결성한 누리꾼들은 1일1깡(하루에 한 번 깡 영상 보기)을 서로 독려하며 출석부까지 만들었다. ‘이런 수준의 노래로 컴백할 수 있는 깡을 표현한 노래’, ‘이 정도면 이혼 사유’ 등 조롱 댓글은 그칠 줄 모르고 거세졌다. 한바탕 웃고 나니 슬슬 비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온 국민의 놀림거리가 된 비의 마음은 어땠을까.
 
웃음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함께 웃음(laughing with)’와 ‘비웃음(laughing at)’이다. 전자는 유쾌한 유형의 사회적 상호작용으로 즐겁고 정겨운 유머를 이른다. 후자는 조롱과 야유, 냉소적인 빈정댐을 말한다.
 
‘비웃음’은 승자가 아닌 패자를 향해 표출하는 일종의 공격이다. 사람들은 성공적인 것을 조롱하지 않는다. ‘비웃음’은 불인정의 표명이다. 대체 왜 저런 노래를 만든 것일까. 실망한 팬들의 야유는 ‘비, 당신의 시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집단적 표현이다.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라’는 직설적 요구다. 이는 상대를 제압하는 효과를 발휘하는데 조롱이 불러일으키는 부끄러움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부끄러움은 사회적 정서로, 항상 다른 사람의 평가와 반응을 가정한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에게 이는 무척 고통스러운 감정 경험이다. 타인의 평가로 먹고 사는 연예인은 오죽하랴.
 
누구나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개인차가 있다. 한 극단에는 놀림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자기를 놀리는 말에 박장대소하며 함께 즐기기도 한다. 다른 극단에는 부끄러움에 죽을 만큼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병리적인 수준으로 남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에 공포심을 가지고 있는 상태를 겔로토포비아(gelotophobia)라고 한다. 그리스어로 gelos는 웃음을 의미하고, phobos는 두려움을 뜻한다.
 
심리학자 트레이시 플라트에 따르면 겔로토포비아는 어린 시절에 반복적으로 놀림을 당했거나 성인이 된 후 웃음거리로 전락한 트라우마 경험과 관련이 있다. 사회적 왕따를 경험한 성인의 절반 정도가 비웃음 공포증의 고통을 겪는 것으로 알려졌다. 34.5%는 경미한 수준이지만, 15.5%는 그 정도가 상당하다.
 
연예인은 언제든 대중의 놀림감이 될 수 있는 부담을 안고 산다. 비는 이미 한바탕 조롱바가지를 뒤집어 쓴 아픈 과거가 있다.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의 흥행 참패 덕분이다. 초라한 관객 수인 17만명을 뜻하는 신조어, 1UBD(엄복동의 이니셜)가 등장하더니 누적 관객 수 등을 UBD 단위로 표현하는 조롱이 들불처럼 번졌다. 예를 들어 34만명이 본 영화는 관객 수가 2UBD이다. 심지어 대한민국 통계청조차 깡의 당시 조회 수를 39.831UBD라고 표현하며 비를 놀려먹는 대열에 끼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죽자고 덤벼도 웃자고 응수하면 짜릿

그래서 놀랍다. 집단적 조롱 현상을 대하는 비의 자세 말이다. 지난 5월 MBC 예능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 출연한 그는 1일1깡은 부족하다며 ‘아침 먹고 깡, 점심 먹고 깡, 저녁 먹고 깡’으로 1일3깡 정도는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laughing at’의 거센 기류를 한 순간에 ‘laughing with’로 바꿔 버렸다. 야유 대잔치를 웃음 한마당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냉소적이고 차디찬 조롱을 던졌는데 유쾌하고 정겨운 유머로 받은 그의 힘! 이것이 진짜 ‘깡’이다.
 
‘하퍼스 바자’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한 말이다. “나를 갖고 놀아달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연예인은 광대이고 광대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놀이 수단이 되어서 돈을 버는 직업이니까.” 그러나 업의 본질에 대한 그의 대인배다운 태도와는 별개로, 집단 조롱이 ‘깡’ 현상으로 정당화될 순 없다. 해학으로 포장해도 연예인을 조롱하는 댓글 놀이는 그저 악플 놀이일 뿐이다.
 
조롱을 당한 사람이 상황에 반응하는 방식은 한 가지가 아니다. 타인의 적대적 행위에 집중하고 악의적 의도를 확대하며 절망감에 사로잡힐 수도 있고, ‘허허허’ 웃어넘기며 상대를 되레 머쓱하게 만들 수도 있다. 취리히 대학 연구팀의 보고에 따르면 놀림거리가 될 것을 크게 걱정하는 사람들은 긍정적 의도가 담긴 웃음소리조차 부정적으로 해석한다.
 
실없는 개그를 심각한 다큐로 받고 있는 건 아닌지, 그저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달려드는 습성이 있는 건 아닌지, 한 번쯤은 돌아볼만 하다. 살면서 가끔씩은 비 흉내를 내볼만하다. 공격적 다큐도 개그로 받아 보고, 죽자고 덤벼도 웃자고 응수하면 짜릿하지 않을까. 결국 행복해지는 건 나 자신이 아닌가. 그러다보면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깡의 역주행에 이어 ‘싹쓰리’ 대박까지 안게 된 비처럼 말이다.
 
 

 
※ 필자는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심리과학이노베이션연구소 전문연구원이다. 스탠퍼드대에서 통계학(석사)을, 연세대에서 심리학(박사·학사)을 전공했다. SK텔레콤 매니저, 삼성전자 책임연구원, 아메리카 온라인(AOL) 수석 QA 엔지니어, 넷스케이프(Netscape) QA엔지니어를 역임했다. 유튜브 ‘한입심리학’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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