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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 사다리’ 공공임대, 중산층도 끌리는 인프라 확충이 답

중앙선데이 2020.08.15 00:30 699호 4면 지면보기

‘소셜믹스’의 명암

공공임대주택(공공임대) 기피 현상은 어제 오늘 일만은 아니다. 1990년 11월 서울 도봉구 창동(현 강북구 번동)에 국내 첫 영구임대(주공2·3·5단지)가 들어선 직후부터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번동 주공2·3·5단지 입주자는 대부분 철거촌 비닐하우스에 살거나 어두컴컴한 지하방에 살던 기초생활수급자 등 사회 취약계층이었다. 번동 주공을 시작으로 공공임대 정책 자체가 사회 취약계층만을 위한 단지를 건설하는 쪽으로 흘러가면서 자연스레 ‘공공임대=빈민주택’이라는 인식이 확산한 것이다.
  

어쩌다 찬밥, 공공임대
같은 단지에 분양·임대 함께 조성
소셜믹스 도입했지만 칸막이 여전
임대 비중 OECD 8%, 한국은 6.7%

전문가 “무작위로 섞어 스며들게”
여당 “같은 동, 같은 층으로 확대”

휴먼시아+거지 ‘휴거’라는 말 돌아
 
그런데 공공임대라고 꼭 사회 취약계층만 사는 건 아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공공임대도 바뀌어왔다. 사회 취약계층을 위한 ‘영구·국민임대주택’은 물론 사회초년생·신혼부부 등을 위한 ‘행복주택’, 서울시가 시프트(Shift)라는 이름으로 공급한 ‘장기전세주택’ 등이 모두 공공임대다. 5·10년 임대한 후 분양으로 전환하는 주택도 공공임대 범주에 들어 있지만, 분양한다는 측면에선 일반적인 공공임대와는 거리가 좀 있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공공임대는 기초생활수급자부터 소득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무주택자가 내 집 마련이라는 꼭대기에 오를 수 있게 도와주는 주거 사다리”라고 말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서 정부는 매년 적지 않은 세금을 들여 공공임대를 공급하고 있다. 하지만 공공임대 재고율(전체 주택 중 공공임대 비중)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8% 선)을 밑도는 6.7%(2017년 기준) 그친다. 공급이 더딘 건 세금이 적잖이 들어가는 데다, 공공임대를 지을 땅도 마땅치 않아서다. 공공임대를 혐오시설 취급하며 ‘무조건 반대’하는 사회적 풍토도 한몫하고 있다. 그래서 정부는 2003년 ‘소셜믹스(Social Mix)’ 개념을 도입해 부자와 빈자가 어울리도록 했다. 도심 재개발 사업지는 가구 수의 10~30%를 반드시 공공임대로 지어야 하고, 신도시에선 초·중학교를 기준으로 분양주택 2~3개 단지에 공공임대 1~2개 단지를 배치했다.
 
소셜믹스는 겉으로 보기엔 성공한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공공임대를 한 동(棟)에 모아 분양주택과 공공임대를 확연히 분리한 재개발 아파트가 적지 않다. 지난 6월 세종시 한 아파트에선 일부 주민이 ‘공공임대가 포함된 학군으로 분류돼 아파트 이미지 저하가 우려된다’는 유인물을 붙여 비난을 샀다. 학부모의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선 ‘휴거(옛 대한주택공사의 공공임대 브랜드 휴먼시아에 거지를 합성한 말)’나 ‘엘거(한국토지주택공사(LH) 공공임대에 사는 거지)’라는 말이 공공연히 쓰인다. 물리적으로는 섞였을지 몰라도 화학적으로는 여전히 칸막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정부가 8·4 주택 공급 대책에서 서울 마포구, 경기도 과천시 등지에 대규모 공공임대를 건설하겠다고 하자 이 지역 자치단체장·국회의원·주민할 것 없이 반발하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그 이면에는 공공임대 기피 풍토가 자리하고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셜믹스를 더 강화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김영욱 세종대 건축공학부 교수는 “동과 동 구분으로 무늬만 섞는 방식 말고, 무작위로 섞어 어느 집이 공공임대인지 모르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원욱·김진애 의원도 최근 “같은 동, 같은 층으로 소셜믹스를 확대하자”고 제안했다.
  
위례신도시, 의왕 고천에 소셜믹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여기에 더불어 공공임대를 분양주택과 같은 크기·품질로 지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김진유 경기대 도시·교통공학과 교수는 “공공임대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 갔는데 집이 분양주택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다면 소셜믹스 효과가 떨어진다”며 “무작위로 섞되 주택도 똑같은 품질로 공급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공임대 주 공급처인 LH도 올해부터 이 같은 형태의 소셜믹스를 공모형 민간 참여 공공주택사업에 적용한다. 올 상반기 공모를 진행한 서울 위례신도시 A2-6블록은 분양주택 652가구, 공공임대 148가구가 무작위로 섞인다. 의왕시 고천지구 A2블록도 이렇게 짓는다.
 
공공임대 범위를 더 넓히자는 제안도 나온다. 그동안의 공공임대가 ‘주거복지’ 차원이었다면, 앞으론 오른 집값을 감당하기 어려운 중산층의 ‘주거안전망’ 역할까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권대중 명지대 부동산대학원 교수는 “중산층으로까지 공공임대 입주자를 확대해 나간다면 자연스럽게 일반 주거지에 녹아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공급 방식도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 부동산개발회사 대표는 “분양주택이든 공공임대든 일정 수준의 주택이 들어서면 도로 등 기반시설도 확충해야 하는데, 정부는 기반시설 확충 없이 무조건 공공임대를 짓겠다고 한다”며 “그러니 교통난 등을 우려한 지역 주민들이 공공임대를 반대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황정일 기자 obidiu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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