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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던지면 10승 어림없지만, 투수는 정면승부 펼쳐야

중앙선데이 2020.08.15 00:02 699호 25면 지면보기

[스포츠 오디세이] 프로야구 원년 24승 ‘불사조’ 박철순

박철순 감독이 서울 장안동 한 커피숍에서 인터뷰를 마친 뒤 지난 시절을 회상하며 생각에 잠겨 있다. 신인섭 기자

박철순 감독이 서울 장안동 한 커피숍에서 인터뷰를 마친 뒤 지난 시절을 회상하며 생각에 잠겨 있다. 신인섭 기자

‘불사조’ 박철순(66)은 프로야구 초창기를 빛낸 강속구 투수이자, 상상 못할 고통과 불운을 이겨낸 인간 승리의 표상이다.
 

82년 22연승 대기록 아직 안 깨져
다이내믹 투구 탓 만성 허리 부상
대장암 이긴 뒤 아내 암투병 수발

타자로 연세대 입학, 최동원 체벌도
삼진 잡았다고 ‘아싸’? 예의 아냐
선발은 완투, 150개 던질 수 있어야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뛰던 박철순은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에서 24승을 올리며 우승을 이끌었다. 시즌 중 기록한 22연승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다이내믹한 투구 폼으로 강속구를 뿌렸으나 몸에 무리가 가는 폼으로 인해 허리 부상을 안고 살았다. 타구에 맞아 앰뷸런스에 실려 가기도 했고, CF를 찍다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치명상을 당한 적도 있다. 그러나 박철순은 늘 마운드로 돌아왔고 에이스의 품격을 잃지 않았다. 95년 OB의 한국시리즈 우승에도 한몫했다. 13시즌 통산 76승 53패 20세이브, 평균자책점 2.95를 기록했다.
 
박철순은 2007년 발병한 대장암을 거뜬히 이겨냈다. 그러나 그를 헌신적으로 보살피며 일으켜세웠던 부인 김향순 씨는 대장암이 여러 곳으로 퍼져 23번이나 항암 치료를 받았다. 박철순 감독(스리랑카 대표팀을 잠깐 맡았던 그는 이 호칭을 가장 좋아했다)과의 인터뷰가 몇 번 연기된 것도 부인의 항암 치료 때문이었다. 긴 장마가 이어지던 날, 서울 장안동 커피숍에서 만난 그는 “아내 곁을 거의 24시간 지켜야 해서 점심도 같이 할 수 없네요”라며 미안해했다.
 
원 바운드볼 많으면 포수 무릎 다 나가
 
현역 시절 박철순은 다이내믹한 투구 폼을 구사했으나 이 때문에 허리 부상에 시달렸다. [중앙포토]

현역 시절 박철순은 다이내믹한 투구 폼을 구사했으나 이 때문에 허리 부상에 시달렸다. [중앙포토]

요즘 선수들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타격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했어요. 몸쪽 공을 팔꿈치나 손목을 꺾어서 홈런을 만들어냅니다. 박병호가 대표적이죠. 제가 24승을 한 82년 그 수준에서 지금 던지면 10승도 어림없어요. 그런데 투수들은 자꾸 도망가는 피칭을 하면서 풀카운트 가서 안타를 맞거나 볼넷을 내줍니다. 요즘은 손가락 장난이 많아요. (볼 속도에 변화를 주는) 체인지업도 필요하지만 직구가 시속 145km는 돼야 체인지업이 통하는 겁니다.”
 
투구 동작이 다이내믹했는데요.
“허리를 크게 젖히고 다리를 높이 올리는 피칭 폼은 누구한테 배운 게 아니에요.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 나간 거죠. 내 폼이 우완 정통파와는 정반대입니다. 해서는 안 되는 폼이고, 엄청난 연습량과 러닝, 웨이트 트레이닝이 뒷받침돼야 하는 폼입니다. 미국 가서 제대로 교정을 한 겁니다.”
 
국내에서 무회전공을 최초로 던졌죠.
“팜볼과 너클볼을 미국서 배웠지만 그냥 꽂는 스타일이라 많이 던지지 않았어요. 변화구로 헛스윙 삼진 잡는 게 별로 좋지는 않았고요. 몸쪽 공 많이 던졌고 맞기도 많이 맞았는데 투수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트라이크 존에 던져서 공을 치도록 해야지. 투수 뒤에 야수 일곱 명이 뭐 하러 있습니까. 타자 앞에서 뚝 떨어지는 원 바운드볼 자꾸 던지면 블로킹하느라 포수 무릎 다 나가요.”
 
박철순의 영구결번인 두산 베어스 21번.

박철순의 영구결번인 두산 베어스 21번.

박철순은 부산 동광국민학교(현 광일초등학교) 6학년 때 야구부에 지원했다. 롯데 자이언츠 초창기 3-4번을 치며 ‘Y-Y 타선’으로 인기를 모았던 김용희(전 삼성 감독)와 김용철(전 경찰청 감독)이 그의 동문이다. 박 감독은 “그때는 키도 작고 바싹 말랐어요. 볼 캐치도 제대로 못하는 수준이었는데 동기인 (김)용희는 키도 크고 운동도 잘했어요”라고 회상했다. 연세대에 진학해서도 투수로 주목 받지는 못했다. 오히려 후배 최동원에게 체벌을 한 사실이 알려져 욕을 많이 먹었다.
 
연세대에는 투수가 아니라 타자로 스카우트됐다면서요?
“우리 땐 투수가 거의 4번타자를 했잖아요. 난 투수로선 볼만 빠른 선수였지만 타자로서는 3∼4할을 쳤어요. 청룡기 고교야구 서울시 예선에서 내가 홈런 두 개를 쳤고 배명고가 우승했어요. 그때 연세대에서 눈여겨봤나 봐요. 법학과로 입학했는데 깐깐한 법대 노교수님들한테 구박을 많이 받았죠.”
 
최동원은 어떤 선수였나요?
“한국 야구 역사에서 그런 투수는 다시는 나오지 않을 겁니다. 나보다 먼저 메이저리그 갈 수 있었고 일본에 갔어도 크게 성공할 수 있었지만 당시 정권에서 놔 주질 않았어요. 나하고 동원이를 ‘전설’이라고 동급에 놓는 분들이 계신데 그건 아닙니다. 나는 한 시즌 반짝했고, 그 후 부상 딛고 재기했다며 ‘불사조’ 별명이 붙었는데, 이 친구는 차원이 다른 선수예요.”
 
두산이 꾸준히 강한 이유가 뭐죠?
“초석이 강하지 않았겠어요? 원년에. 크하하하하. 당대 최강 코칭스태프가 선수들을 잘 다듬어놨죠. 초대 박용민 단장이 일본 프로야구 많이 보고 그걸 도입하려고 노력했어요. 그 덕분에 프런트(구단 직원)가 굉장히 강하고 전문성이 뛰어납니다. 전문가를 믿고 맡기는 게 중요한데, 한국문화에선 그게 참 힘들어요.”
  
최동원은 동급 아닌 차원이 다른 선수
 
니퍼트가 두산에서 뛸 때 ‘21번(영구결번)을 양보할 수 있다’고 하셨죠?
“더그아웃에서도 항상 노력하고 경기에 집중하는 게 보기 좋아요. 또 마운드에서 까불지 않아요. 소위 대투수가 삼진 하나 잡았다고 ‘아싸’ 하는 건 타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김광현이 그런 모습이 좀 보여서 ‘미국 가서 저러면 방망이 날아와’라고 걱정한 적이 있어요. 각자 스타일은 존중하지만 좀 자제했으면 합니다.”
 
투수 역할이 분화되고 투구수를 관리해 주는 게 부럽진 않나요?
“난 반댑니다. 9회 완투하면서 150개 던질 능력이 안 되면 선발감이 아니죠. 투구수를 80∼90개로 조절해준다? 그럼 중간으로 가야죠. 투수들한테 해 주고 싶은 말도 ‘강한 연습만이 살 길이다’ 입니다. 초구부터 120% 힘으로 전력투구하고, 도망가지 말아야죠. 내가 이런 말 하니까 지도자가 못 되는 겁니다. 현대야구에 안 맞는 옛날 얘기한다고요. 사람들은 옛날 것은 다 틀린 거라고 생각들 해요.”
 
그는 “야구인으로서 마지막 소망이 있다면 나만의 팀을 만들어보고 싶은 것”이라고 했다.
 
사나이 박철순 울린 ‘집단 항명→윤동균 감독 사퇴’ 사건
윤동균 감독

윤동균 감독

박철순 감독은 인터뷰 도중 딱 한 번 눈물을 보였다. 1994년 OB 윤동균 감독(사진) 사퇴를 불러온 ‘선수단 항명 사건’을 이야기할 때다.
 
시즌 말 쌍방울과의 군산 경기가 끝난 뒤 윤 감독이 졸전을 이유로 선수들을 체벌하려 하자 박철순·장호연 등 고참들이 반발했고, 주전 17명이 윤 감독의 퇴진을 요구하며 서울로 올라와 버린다. 구단은 주축 선수 5명을 트레이드하고 윤 감독의 연임을 시도했으나 여론은 선수들 편이었다. 박철순이 “나도 은퇴할 테니 윤 감독도 같이 물러나게 해 달라”고 했고, ‘윤 감독 사임-김인식 감독 부임’ 결정이 났다. 결국 주축 선수들은 살아남았고 윤 감독만 퇴진한 셈이 됐다.
 
박 감독은 그 사건의 주동자로 몰린 게 억울하지는 않다고 했다. “그건 내가 책임진다고 한 겁니다. 내가 최고참인데 주장한테 뒤집어씌울 수는 없잖아요. 나도 그때 옷 벗었어야 해요. 지금도 윤 감독님과 소주를 마시면 ‘너 그때 유니폼 안 벗은 거 정말 잘했다’고 하시는데 당시엔 얼마나 섭섭하셨겠어요. 감독님이 선수들에 대해 잘못 아신 것도 있고, 선수들이 감독님에 대해 오해한 것도 있었어요. 결국 소통이 안 된 거죠.”
 
윤 감독이 퇴진한 다음해 OB는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다. 야구 인생에서 최고 감격의 순간이었다고 꼽으면서도 박 감독은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고 했다. “서러웠죠. 윤 감독님이 제일 많이 생각나고, 감독님 그렇게 만들어 놓고 우승했다고 좋아만 할 수 있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터져나왔어요.”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jerry@joongang.co.kr
 
※인터뷰 전문은 월간중앙 9월호 ‘정영재 전문기자의 레전드를 찾아서’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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