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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내가 프라이팬보다 못해?” 묻는 남편에게 한 말

중앙일보 2020.08.14 13:00

[더,오래] 박혜은의 님과 남 (81)

 
요즘은 살림에 도움이 되는 잇 아이템이 많이 있죠. 저 역시 여러 살림템 가운데 하나로 올 초 열심히 포인트를 모아 집에 들인 로봇청소기 덕분에 예전보다 청소가 아주 편해졌습니다. 그렇게 로봇 청소기가 청소를 맡아주어 편하게 텔레비전으로 영화를 보고 있던 지난 주말 오후였습니다. 열심히 청소를 하고 있던 청소기가 슬리퍼 한 짝을 여기저기 끌고 다니기에 남편을 보고 한마디 했죠. “여보, 저기 슬리퍼~!!”
 
남편은 소파에 앉을 때면 슬리퍼를 바닥에 놓고 앉는 경우가 많기에, 이번에도 역시 그러겠거니 짐작하고 으레 나온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말과 동시에 슬리퍼를 신고 있는 남편의 발이 눈에 보입니다. 제 눈에 보인 그 슬리퍼는 제 것이었던 겁니다. 순간 머쓱해졌죠.
 
평소 싫은 소리는 잘 안 하는 남편이 한 마디 꺼냅니다. 부부 사이에서의 내 행동을 보면 뭔가 잘못된 상황이 눈에 띄었을 때 스스로를 돌아보는 경우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를 생각하는 시간은 생략된 채 먼저 남편에게 잔소리를 시작한다는 것이죠.
 
아무렇게 놓인 슬리퍼가 남편 것일거라 짐작하고 으레 한마디 했습니다. 그런데 말과 동시에 슬리퍼를 신고 있는 남편의 발이 눈에 보입니다. 그 슬리퍼는 제 것이었던 겁니다. 순간 머쓱해졌죠. [사진 pexels]

아무렇게 놓인 슬리퍼가 남편 것일거라 짐작하고 으레 한마디 했습니다. 그런데 말과 동시에 슬리퍼를 신고 있는 남편의 발이 눈에 보입니다. 그 슬리퍼는 제 것이었던 겁니다. 순간 머쓱해졌죠. [사진 pexels]

 
얼마 전 일이 자연스레 떠올랐습니다. 무쇠 프라이팬을 하나 구입했습니다. 유해물질이 문제가 되면서 무쇠 제품을 쓰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장점이 있는 반면 코팅되어 나오는 제품에 비하면 길들이기 과정이 필수라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는 주방용품이죠. 길들이기가 조금 불편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한번 써보고 싶은 마음에 먼저 달걀 프라이 하나를 해 먹을만한 작은 무쇠 프라이팬을 구입했습니다. 그리고는 한 번 길을 들여야 하는데 짬이 나지 않아 보관해 둔다는 것이 시간이 길어졌죠. 
 
모처럼 늦잠을 자고 있던 주말 아침, 솔솔 고소한 냄새에 눈을 떴습니다. 주방에서 남편이 아침거리로 달걀 프라이를 부치는 중이었습니다. 깨우지 않고 알아서 잘 챙겨 먹어주니 고마운 맘에 혼자 먹게 해 살짝 미안한 맘도 드는 순간, 가스레인지 위 까맣게 그을린 무쇠 프라이팬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고마운 맘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격해진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습니다. 왜 평소 쓰지도 않던 프라이팬을 갑자기 꺼내 써서는 상태를 이렇게 만들어 놨느냐며 볼멘소리가 튀어나왔죠.
 
새로 꺼낸 프라이팬이 까맣게 그을리니 남편도 당황했을 터인데 일어나자마자 듣기 싫은 소리를 늘어 놓으니 미안했던 마음이 싹 사라졌을 겁니다. 그렇게 불편한 아침을 시작한 후 그을린 프라이팬을 살려낸답시고 냅다 물에 담가 버렸죠. 그릇의 탄 흔적을 사라지게 해준다는 세제도 뿌려가며 말입니다. 무쇠의 성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마음만 급했던 행동에 무쇠 프라이팬은 금세 녹이 생겨버렸습니다. 멀쩡했던 새 물건이 순식간에 버려질 위기에 처하니 이 모든 게 물어보지도 않고 꺼내 쓴 남편 탓인 것만 같아 더 화가 났습니다. 실상은 대처를 제대로 못 한 내 탓도 있었을 텐데 말이죠. 물론 뒤늦게야 드는 생각이긴 합니다.
 
그을린 프라이팬을 보고 남편에게 볼멘소리가 튀어나왔습니다. 정말 필요하다면 다시 살 수도 있을 일인데, 온종일 마음이 상해 있던 제게 남편은 자신이 프라이팬보다 못한 존재냐 되물었습니다. [사진 pxhere]

그을린 프라이팬을 보고 남편에게 볼멘소리가 튀어나왔습니다. 정말 필요하다면 다시 살 수도 있을 일인데, 온종일 마음이 상해 있던 제게 남편은 자신이 프라이팬보다 못한 존재냐 되물었습니다. [사진 pxhere]

 
그날 저녁 한참을 쓰지 않고 방치해 둔 것이면 없었다고도 할 수 있고, 정말 필요하다면 다시 살 수도 있을 일인데 프라이팬 하나로 온종일 마음이 상해 있는 제게 남편은 자신이 프라이팬보다 못한 존재냐고 되묻습니다.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만 진짜 마음과는 다르게 튀어나오는 말이 많습니다. 편한 사이에선 더욱이 그렇죠. 그 말들이 이해되면서도 때때로 상대가 나를 너무 가볍게 생각해서 나오는 행동은 아닐까 하는 서운함이 들곤 합니다. 서운하면 구체적인 상대의 행동에 대한 나의 감정을 말하면 될 것을 냅다 화를 내버립니다. 넌 항상 그런 식이라는 생각이 굳건해지면서 말이죠.
 
마음을 상하게 한 행동이 있다면 그 행동에 대해 먼저 말하고 그 행동으로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를 설명해 주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관찰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금의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에 대한 관찰, 그리고 왜 내가 화가 났는지에 대해 나를 관찰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대개 관찰의 시간은 생략되고 바로 판단을 해버립니다. 그리고는 그 판단을 말로 뱉어버리죠. 집안일에선 남편의 실수가 더 잦았으니 이번 일도 당연히 남편의 잘못일 거라는 생각은 관찰을 가로막습니다. 하지만 늘 그런 일은 없습니다.
 
탓하기 전에 이해하기를 다짐하면서도 종종 잊는 저를 보며 생각합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소통 연습이 필요합니다.
 
굿커뮤니케이션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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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은 박혜은 굿 커뮤니케이션 대표 필진

[박혜은의 님과 남] 은퇴 후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낼 집에서 자주 함께할 상대는 누구인가요? 그 상대와의 관계는 지금 안녕하신가요? 가장 가까운 듯하지만, 어느 순간 가장 멀어졌을지 모를 나의 남편, 나의 아내와 관계 향상을 위해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강의와 코칭 현장에서 만난 수많은 고민을 바탕으로, 닿을 듯 닿지 않는 서로의 심리적 거리의 간격을 좁혀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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