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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의 시선] 박주신·조민, 그들만 잘 사는 나라

중앙일보 2020.08.14 00:49 종합 28면 지면보기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최근 지인의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외국에서 근무하던 한 가장의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죽음도 황망한데 코로나19는 남은 가족을 더욱 아프게 했다. 우여곡절 끝에 격리면제서를 받아들고 귀국한 가족은 격리 면제받은 사람들을 위한 임시시설에 일단 수용됐다가 음성 판정을 받고서야 시설을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장례식장에 발을 들여놓을 수는 없었다. 장례식장을 운영하는 대학병원 측이 ‘격리면제서와 무관하게 14일간의 의무 격리 기간이 지나지 않은 사람은 문상객을 맞을 수 없다’는 서울시 방침을 어길 수 없다고 알려왔기 때문이다. 

권력층의 공공연한 반칙과 특혜
내편 특권의식 드러낸 조국 백서
386 세습귀족 위해 촛불 들었나

 
코로나가 참 잔인하다 싶은 생각 한편으로 지난달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장례식장 모습이 겹쳐져 씁쓸했다. 박 전 시장의 아들 주신씨는 영국에서 귀국한 당일에 곧바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가서 상주 역할을 하며 문상객을 맞았다. 방호복 같은 보호장구는 착용하지 않았다. 특혜 시비가 불거지자 서울대병원은 대충 얼버무리고, 서울시는 “방침이 바뀌었다”고 하고,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인륜적 문제로 입국하는 경우 공항에서 검사받아 곧바로 귀가할 수 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박주신 이전, 그리고 이후조차 그와 똑같은 인륜적 문제로 입국한 다른 사람들에겐 왜 박주신이 누린 인도적 차원의 편의가 제공되지 않는지에 대해선 설명하지 않았다.

 
물론 그 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박주신이니까, 조민(조국 전 장관 딸)처럼 이 정부의 특권층이니까.

 
문재인 정부의 탄생을 불러온 촛불시위를 흔히 “관행화된 반칙과 특권에 대한 개혁을 요구하는 시대정신”이라고들 말한다. 부모 잘 둔 덕에 이화여대에 입학했던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의 고교 졸업장을 빼앗아 기어이 중졸로 만들고, 비선을 둔 대통령은 옥에 가두었으니 지금 우리는 반칙과 특권 없는 공정한 세상을 누리고 있어야 옳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다르다. “옛 관행도 지금 눈높이에선 죄”라며 지난 정권 사람들에게 ‘적폐’ 딱지를 마구 붙여 범죄자로 만들던 이 정권 사람들이 자기편의 명백한 반칙과 특권 앞에선 “관행이라 괜찮다”며 국민 염장을 지르니 하는 말이다. 정권 초엔 눈치 보는 시늉이라도 했는데 손혜원과 조국·윤미향 사태를 거치며 이젠 노골적으로 “우린 너희 같은 가재·붕어와는 태생이 다르니 현실을 인정하라”고 훈계까지 한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게 최근 발간한 조국 백서 『검찰개혁과 촛불시민』(2만5000원)이다.

 
이 정권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어용 방송인 김어준이 수억 원의 돈을 모금하고(통상 책 한 권 제작비는 수백만 원대다), 김어준 방송을 들락거리며 인지도를 쌓아 국회에 입성한 김남국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제공한 자료를 토대로 어용 사학자 전우용과 최민희 전 의원 등이 집필한 이 책은 비록 말뿐일지언정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할 것”이라던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마저 부정한다.

 
이런 식이다. ‘어느 사회에도 절대적 공정성은 없다. (부모의 연줄이 다른 탓에) 100시간 봉사활동을 하고도 자기소개서 한 줄 분량밖에 못 채우는 학생이 있고, 2주 인턴십만 하고 논문 제1저자가 되는 학생이 있다. 이런 연줄 맺기를 금지할 방도는 없다. 부모의 경제적 차이는 언제나 자녀들 사이에 불평등한 관계를 만든다. 최상급 스펙을 얻기 위한 경쟁이 불공평한 구조 위에서 진행되는 것은 문제가 있으나 불공평한 상황은 한국 사회의 계층구조와 입시제도가 만든 것이니 (조민의 의대 입시 관련한) 경쟁 과정 자체가 불공정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입시 비리를 감추려 늘어놓은 요설 대신 지난 정권 몰락의 단초를 제공한 최서원(최순실)의 딸 정유라 버전으로 풀자면 이런 말이다.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 총선 압승으로 무서울 게 없으니 이제 대놓고 속내를 까발리기로 한 모양이다.

 
문재인 정부는 “아무 잘못을 안 했음에도 자꾸 뒤로 미끄러진다(후쿠야마의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고 느끼던 사람들의 분노를 부추겨 정권을 바꿨다. 하지만 정유라가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정유라가 측은하게 느껴질 정도로 부모 잘 만나 반칙과 특권을 누리는 박주신·조민들이 넘쳐난다. 박주신은 누구처럼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는 돈으로 영국생활을 이어갈 것이고, 조민은 곧 의사가 될 것이다. 이렇게 386 운동권들을 대대손손 특권층으로 만들어주는 게 촛불정신이었나. 박주신·조민만 잘 사는 나라, 이게 나라인가 묻고 싶다.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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