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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길 사람의 길] 이용수 할머니의 진실, 한명숙 전 총리의 진실

중앙일보 2020.08.11 00:15 종합 28면 지면보기
문영호 변호사

문영호 변호사

가슴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이용수 할머니의 지난 5월7일 기자회견 장면을 보면서다. 할머니의 당당함에도 놀랐다. 90세 넘긴 연세가 믿어지지 않았다. 피해자 할머니들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시민단체의 위안부 운동이 언젠가부터 언론도 건드릴 수 없는 성역으로 변했지만, 거기서 벌어진 모금 횡령의혹 등을 폭로하는 이 할머니에겐 거칠 게 없어 보였다. 한 걸음 더 나가 청년 세대가 반일(反日) 일변도에서 벗어나 일본의 청년들과 교류하며 과거 역사를 기억하는 쪽으로 방향 전환하라는 주장까지 덧붙였다. 경직된 반일에서 벗어나라는 소신을 그렇게 당당하게 밝힌 사람이 그동안 있었던가.
 

이 할머니의 당당한 의혹 폭로
진실을 품은 사람이 뿜어내는 힘
한씨가 번복한 진술, 법원이 배척

이 할머니의 그런 당당함은 어디서 나올까. 그것은 진실을 품고 있는 사람만이 뿜어내는 힘, 바로 진실의 힘이다. 70여 년 전 일제강점기 시절 10대 소녀로서 겪은 피해 경험이 우여곡절 끝에 만천하에 드러났고, 반(反)인권의 극치라고 할 그 끔찍한 사실은 어느덧 덮을 수 없는 진실로 굳어졌다. 잔꾀를 부리는 일본 극우세력에 맞서 진실의 왜곡을 막기 위해 30년 동안 싸워온 것은 물론이고, 드러난 진실은 결코 왜곡될 수 없노라고 2007년 미국 의회에서 이 할머니가 당당하게 증언하게 만든 것도 진실의 힘이다. 왜곡하려 들수록 진실엔 힘이 붙는다는 사실을 할머니는 존재 자체로 보여주고 있다.
 
일관(一貫)된 만큼 힘이 붙는 진실, 그게 참된 진실이다. 하지만 수많은 진실이 뒤엉켜 돌아가는 사법절차에는 참된 진실만 등장하는 게 아니다. 허울뿐인 진실이 섞여 있기도 하거니와, 진실처럼 보이던 게 갑자기 밀려나고 새로운 게 진실이라고 고개를 불쑥 내밀 때도 있다. 그런 예상치 못한 진술 번복에 부닥치면, 그것과 맞물려있는 다른 증거의 진위 판단을 다시 해야 한다.
 
그런 만큼 진술 번복은 사법 낭비의 요인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이해득실을 저울질하거나, 뭔가를 두고 흥정하는 등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상황변화에 따라 유리한 쪽으로 번복하겠다는 걸 어쩌지 못하는 건,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받지 않는다는 대원칙 때문이다. 수사단계에서 영상녹화까지 하며 묶어 둔 진술도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걸 보면, 생각이나 입장을 자유롭게 밝히도록 보장하는 공개법정이 진술 번복을 부추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사단계의 진술에 강압이나 회유 등이 있었는지를 포함해 번복의 이유가 합당한지를 검증하지 않을 수 없는데, 변호인이나 검사가 번갈아 신문하는 교호신문(交互訊問)을 통해 허점을 파고드는 증거조사 절차가 그래서 중요하다.
 
“역사의 법정에선 무죄”라고 하던 한명숙 전 총리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가 새삼 부각되고 있다. 그 진실과 맞물려있는 건설업자 한 모 씨의 10년 전 진술이 따라서 주목받고 있다. 정치자금 9억원 수수로 기소되어 2015년 유죄 판결이 확정된 한 전 총리에게 돈 준 사실을 털어놓았던 그의 진술을 이제 다시 들춰내 신빙성을 따지려 하고 있다. 그 배경에는, 한 모 씨 법정 진술의 신빙성 판단 잘못이 한 전 총리에게 억울한 옥살이를 안겨줬다는 공감대가 깔려있다.
 
한 모 씨의 진술이 재판 당시 진실로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는 한 전 총리에 대한 대법원 판결문에 나와 있다. 수사과정에서 소상히 털어놓는 것처럼 진술했다가 1심 법정에서 번복했는데, 회유에 넘어가 검찰에서 허위 진술했다는 게 번복 이유다. 증인 선서까지 한 법정 진술이라는 이유로 1심이 믿어준 한 모 씨의 진술은, 번복과정이 석연치 않다는 이유로 2심에선 배척됐다. 오히려 검찰에서 했던 진술이 금융자료 등 몇 가지 객관적 증거와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그 후 대법원 전원합의체도 2심의 손을 들어줬다.
 
진술 번복 앞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부담은 재판부 몫이다. 공판중심주의와 직접심리주의를 고집한다면 법정에서 선서 후 증언한 진술 쪽으로 기울 것이다. 그런데 그걸 배척하고 검사 앞에서 한 진술을 믿어줬다면 고심 끝에 내린 용단임이 틀림없다. 한 모 씨의 진술을 배척할 때 2심과 대법원 역시 많이 고심했을 것이다.
 
그렇게 배척된 진술에 과연 진실의 힘이 살아날까. 한 전 총리에게 억울함이 있으면 풀어주는 게 당연하지만, 고인(故人)이 된 한 모 씨의 진술을 들춰내는 건 궁색해 보인다. 한 모 씨가 수감 중 감방 내 동료에게 돈 준 사실을 털어놓았다고 증언했던 최 모 씨가, 10년이 지나 그게 검찰의 회유 때문이었다고 최근 폭로한 걸 꼬투리 잡겠다고? 그것 역시 번복된 진술이다. 이처럼 흔들리는 진실을 끌어보아, 확정판결을 휴지로 만드는 새로운 진실을 한 전 총리에게 선물하겠다는 말인가.
 
문영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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