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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현의 철학이 삶을 묻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넘어서

중앙일보 2020.08.09 00:02 종합 24면 지면보기

공포의 쌍둥이 토머스 홉스

1651년에 출판된 『리바이어던』의 표지다. 상단에 리바이어던을 묘사하는 욥기 41장 24절(’그것의 가슴은 돌처럼 튼튼하며 맷돌 아래짝같이 튼튼하구나“)이 쓰여 있다. 절대군주의 상체에는 수많은 자유로운 시민 군중이 그려져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1651년에 출판된 『리바이어던』의 표지다. 상단에 리바이어던을 묘사하는 욥기 41장 24절(’그것의 가슴은 돌처럼 튼튼하며 맷돌 아래짝같이 튼튼하구나“)이 쓰여 있다. 절대군주의 상체에는 수많은 자유로운 시민 군중이 그려져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17세기 유럽은 격랑에 휩싸인다. 무역업과 상공업을 통하여 힘을 얻은 중산층 사이에 왕이나 귀족에 비해 열등한 대우를 받을 이유가 없다는 의식은 꾸준히 높아간다. 제도가 새로운 의식을 따라가지 못할 때, 현실이 열망을 충족하지 못할 때 파열음은 들려오기 마련이다. 구원을 절대자와 개인 사이의 문제로 보는 개인주의적 종교관이 종교개혁의 불을 지피며 계급적 교회제도는 무너져 내렸다. 평등과 자유의 외침은 종교를 넘어 현실정치까지 이르러 왕권을 흔들기 시작한다.
  

절대 왕권에 도전한 시민혁명
정치 권력은 사회계약의 산물
‘완력으로 갈등해결’ 막는 장치
갈등을 억울함 없이 조정해야

공포의 쌍둥이
 
16세기말 영국은 미국 식민지 개척을 본격화하여 장차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만드는 기반을 다지기 시작한다. 토머스 홉스는 그 무렵 태어난다. 해양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어머니가 놀라 홉스를 조산하였다고 한다. 홉스는 이 일을 가리켜 “자신은 공포와 쌍둥이로 태어났다”고 말한다. 이후의 삶도 평온과 거리가 먼 시민혁명의 소용돌이로 향한다. 절대군주와 결탁하여 귀족계급을 몰락시킨 시민계급은 이제 왕권을 다음 타깃으로 삼는다. 막강한 권력을 구가하던 튜더 왕조는 결국 혁명에 굴복하고 권력을 시민에게 넘겨준다. 모든 개인은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자유주의적 사상이 이렇게 제도를 통하여 실현된다. 의회 중심의 민주주의라는 귀한 열매가 맺히는 과정에 20만명이 희생된다. 시민 혁명에 공감하지 않았던 홉스에게는 흥분보다 공포가 더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목적론적 세계관 벗어나기
 
정치만이 아니라, 과학에서도 혁명이 이루어진다. 영국에서는 경험적 탐구가 강조되며 왕립학회 설립으로 이어져 로버트 보일, 아이작 뉴턴과 같은 거장 과학자들이 배출된다. 과학혁명을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들은 ‘우주의 중심이 지구가 아니고 태양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어. 대단하지 않아?’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학혁명의 출발은 새로운 발견보다는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에 있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한 목적론적 세계관과 긴밀히 연동되어 있다. 모든 사물은 신이 부여한 고유한 기능과 위치를 갖고 있어서, 자연의 운동은 본래의 기능을 성취하고 본연의 위치로 가려 한다는 생각이다. 이제 과학자들은 목적론을 거부하고, 세계의 운행을 물질들의 인과적 관계를 통하여 기계적으로 설명한다. 갈릴레오·메르센느 등과 파리에서 교류한 후 홉스는 세계는 물질과 물질의 운동뿐이라는 유물론적 사상으로 더욱 기운다.
  
자연상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토머스 홉스

토머스 홉스

유물론자 홉스는 인간이란 물질적 욕망 덩어리로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욕망하고 해로운 것을 혐오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욕망은 그 자체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고 더 나아가 생명을 빼앗는 것도 자연상태의 섭리라고 할 수 있다. 본능적 욕망이 통제 없이 날뛰는 자연상태는 결국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 다시말해 인간은 인간에 대하여 늑대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홉스의 생각이다.
 
만인이 만인에게 투쟁하는 야만상태에서 생명은 백척간두에 선다. 무제한의 자유가 낳은 무제한적인 불확실성 속에서 순간을 살아가야 한다. 최소한의 안정된 삶과 문명은 꿈도 꿀 수 없고, 삶은 그저 끝없는 공포다.
  
계약을 통한 탈출
 
생명을 보존하고자 하는 본능은 아마도 인간이 가진 가장 강력한 본능일 것이다. 자연상태의 야만적 결과는 이 본능과 충돌한다. 똑똑하고 소통능력을 가진 인간은 이 충돌을 비껴가는 방법을 안다. 서로간에 해를 가하지 않고, 생명을 존중해주기로 약속하는 것이 방법이다. 그러나 힘의 균형이 깨지면 개인간의 사적인 약속은 언제든 깨질 수 있다. 공동체 전체를 아우르는 정치적 계약이 해결책이다. 공적인 권력기관을 설립하여 약속을 위반하는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다. 각 개인이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일정 부분 자율적으로 포기하여 국가에 양도함으로써 무제한적인 자유가 만들어내는 무제한적인 공포를 벗어나 평화가 비로소 가능해진다.
 
시민들의 생명의 안전을 지켜주고 평화를 유지하는 정치체제는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할까? 홉스는 절대군주제가 평화를 가장 잘 지켜줄 것이라 생각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비관적인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절대적 권력에 의해 통제되지 않으면, 인간은 욕망에 휘둘려 언제든 계약을 파기하고 다시 야만상태로 돌아갈 것이라는 불신 말이다. 의회파와 왕당파가 대립하는 시민혁명의 과정에서 왕당파와 가까웠던 그의 사회적 배경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아니면 절대군주제에 대한 공감 때문에 왕당파를 지지했던 것일까?
 
현대에는 누구도 야만상태를 벗어나는 최선의 선택지가 절대군주제라는 홉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치체제의 정당성의 근거를 평등하고, 자유롭고, 합리적인 개인들의 계약에서 찾는 접근법의 창시자로서의 홉스의 공은 역사에 남는다. 사회계약론이라고 불리는 이 통찰은 로크와 루소의 정치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적 논의에서도 중요한 화두다.
  
사회계약의 의미
 
“다른 이들이 당신을 대하기를 원하는 방식으로 당신도 그렇게 다른 이들을 대하라.” 도덕적 규범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원칙으로 황금률이라고 불린다. 성경에도 나오고, 이후의 계몽사상가들은 이성의 준엄한 명령으로 제시한다. 야만상태에서 생존을 도모하는 합리적 개인들이 살아남기 위하여 타산적 계산을 한 계약의 결과로도 나올 수 있음을 홉스가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다.
 
정치권력은 자기보존을 원하는 개인들 사이에서 서로의 생명을 위협하는 야만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계약의 산물이다. 홉스가 생각한 야만상태는 개인들 서로가 서로의 생명을 위협하는 그런 상태다. 문명화된 우리는 더 이상 홉스가 그린 야만상태에 살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직관은 여전히 유효하다. 생명을 위협하는 것만이 야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재산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물리적 완력에 의해 점유되어 억울한 일이 발생하는 것도 야만이다. 국가는 야만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구성원들의 자유로운 약속을 통하여 만들어진 제도다. 국가의 뼈와 혈관을 구성하는 제도·법·규칙은 황금률에 기반한 합의를 생명으로 하고, 힘 있는 세력이 멋대로 힘없는 세력을 휘두르지 못하게 기능하여야 한다. 당사자가 개인이 아니라 집단일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수의 권력에 의지하여 특정한 편에 유리하도록 법과 제도를 운용한다면, 그것은 야만을 부추기는 것으로 야만을 막아야 한다는 정치권력의 기본 취지를 파괴하는 것이다. 
 
『리바이어던(Leviathan)』
왕당파에 호의적이던 홉스는 시민혁명 때 처벌을 피해 파리로 망명한다. 『리바이어던』은 그때(1651년) 쓴 책으로, 부제는 “교회와 세속적 공동체의 질료·형상 및 권력”이라고 되어 있다. 그의 핵심 사상을 담고 있는 대표작이며 역사적 대작이다.
 
구약의 욥기 41장에 나타나는 리바이어던은 바다의 뱀 또는 용 모양의 신화적 존재로 여호와와 대립하는 악한 존재다. 그러나 홉스는 나쁜 의미로 사용한 것은 아니며, 지상에서 신의 지시 아래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는 절대권력을 상징적으로 의미한다. 상당한 수정을 거친 라틴어판은 1668년에 출판되었다.
 
4부에 걸친 대작으로 1부는 인간의 본성을 다루고, 2부는 국가 정치체제를 논한다. 3부와 4부는 기독교에 관한 홉스의 신학·성서학·기독교 정치학을 담고 있다. 국가가 교회로부터 독립되어야 하며 신앙은 개인의 양심의 문제로 국가가 관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김기현 서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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