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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50세도 안 된 가장에게 찾아온 절망

중앙일보 2020.08.08 09:00

[더,오래] 현예슬의 만만한 리뷰(89) 영화 '내일의 기억'

50세를 눈앞에 둔 사에키(와타나베 켄 분)는 슬하에 아내와 외동딸을 둔 가장입니다. 동시에 광고회사 영업팀 부장으로 잘 나가고 있죠. 팀원들과 노력 끝에 대형 광고 캠페인을 따냈고 곧 있으면 할아버지가 됩니다.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이 남자의 삶에 어두운 그림자가 서서히 찾아옵니다.
 
사에키(와타나베 켄 분)는 광고회사 영업팀 부장으로 잘 나가는 가장이다.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이 남자의 삶에 어두운 그림자가 서서히 찾아온다. [사진 UPI]

사에키(와타나베 켄 분)는 광고회사 영업팀 부장으로 잘 나가는 가장이다.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이 남자의 삶에 어두운 그림자가 서서히 찾아온다. [사진 UPI]

 
그 시작은 일상생활부터였습니다. 매일 쓰는 차 키를 어디에다 뒀는지 찾거나 길을 잘못 들기도 하고 같은 물건을 계속 사와 집에 쌓여있기도 하고요. 심지어는 26년 회사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잊지 않던 광고주와의 미팅을 잊어버리는데요. 이에 걱정이 된 아내 에미코(히구치 카나코 분)는 병원에 함께 가보자고 하죠.
 
병원을 찾은 그들은 기초 검사를 시작합니다. 이어 의사는 단순한 테스트라며 몇 가지 질문을 하는데요. 나이부터 시작해 날짜, 요일, 여기가 어디인지 묻습니다. 진료카드를 보면 될 텐데 이런 걸 왜 묻는지 조금 불쾌하기도 했지만 하나하나씩 대답해 나갑니다. 이어지는 질문과 대답은 이랬습니다.
 
제가 말한 단어를 외우세요. 벚꽃, 기차, 고양이. 나중에 다시 물을 테니 잘 외워 두세요. 
벚꽃, 기차, 고양이
100에서 7을 빼면 
93
거기에서 다시 7을 빼면
86
다음 숫자들을 거꾸로 말해보세요. 2·7·4
4·7·2.  
8·3·5·9
9·5·3· 8
아까 말한 세 단어를 알려주세요
.... 
 
마지막 질문에 당황한 그는 좀처럼 대답하지 못합니다. 힌트를 통해 가까스로 답을 맞히지만 의사는 그에게 MRI 검사를 권유하죠. 결과는 알츠하이머였습니다.
 
사에키네 가족 사진. 왼쪽부터 가족이 된 사위와 외동딸 에리, 그들의 딸인 손녀와 아내 에미코, 마지막으로 사에키 본인.

사에키네 가족 사진. 왼쪽부터 가족이 된 사위와 외동딸 에리, 그들의 딸인 손녀와 아내 에미코, 마지막으로 사에키 본인.

 
50세도 안 된 그가 알츠하이머라니. 본인은 물론 아내도 믿을 수 없어 합니다. 잘못 진단한 거라며 의사를 탓하던 그는 병원 옥상으로 올라가 난간 앞에 섭니다. 절망하며 삶을 포기하려 할 때 의사는 ‘할 수 있는 것을 하라’며 그를 다독이죠.
 
와타나베 켄은 사에키가 처음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병을 부정하는 단계에서 시작해 서서히 받아들이고 나중에는 병에 대한 자각조차 없어질 때까지 단계별로 보여주는데요. 그의 연기를 따라가다 보면 점점 생기를 잃어가는 눈빛과 동시에 체중도 점점 줄어가는 변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역할에 완전히 몰입한 와타나베 켄이 실제로 8㎏을 감량하는 노력을 보이기도 했죠.
 
연기력이 돋보였던 장면은 이 장면이었습니다. 자신 대신 생계를 책임지게 된 아내가 일 때문에 집에 늦게 들어오자 다른 사람 만나는 거 아니냐며 다그치는데요. 어떤 행동에도 참아왔던 아내는 이때 감정이 폭발하게 되면서 두 사람이 맞붙습니다.
 
사에키는 이때 자기도 모르게 손에 쥐고 있던 그릇으로 아내의 머리를 내려치는데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사에키도 에미코도 놀라죠. 그리고 이내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깨닫고 절규합니다. 이 장면에서 두 사람 연기의 절정을 볼 수 있죠.
 
남편 사에키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절망에 빠지자 이를 다독이는 아내 에미코. 이 장면은 리허설 없이 그들이 즉흥적으로 연기했다고 한다.

남편 사에키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절망에 빠지자 이를 다독이는 아내 에미코. 이 장면은 리허설 없이 그들이 즉흥적으로 연기했다고 한다.

 
병의 당사자 사에키를 비롯해 그를 직접 보살피는 아내 에미코를 영화 스토리에서 빼지 않은 것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알츠하이머를 진단받고 좌절하는 남편을 일으켜 세운 것도 그였고, 치매 환자에 좋다는 음식이나 취미생활에 도움을 준 것도 그였습니다. 하루에도 몇번씩 감정 기복의 변화를 보이는 치매 환자의 손발이 되어주는 에미코를 보면 실제 우리 옆에 있는 치매 환자의 보호자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영화의 제목은 ‘내일의 기억’인데요. 가장 최근 기억부터 사라지는 치매 환자에게 내일의 기억이란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죠. 그런데도 내일을 살아야 하는 치매 환자와 보호자를 응원합니다.

 
내일의 기억
영화 '내일의 기억' 포스터.

영화 '내일의 기억' 포스터.

감독: 츠츠미 유키히코
원작자: 오기와라 히로시
각본: 수나모토 하카루
출연: 와타나베 켄, 히구치 카나코
음악: 오시마 미치루
장르: 멜로, 로맨스, 드라마
상영시간: 121분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개봉일: 2007년 5월 10일
 
 
 
중앙일보 뉴스제작1팀 hyeon.yese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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