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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로컬택트’ 시대의 숙의민주주의

중앙일보 2020.08.07 00:43 종합 31면 지면보기
김의영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의영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숙의민주주의란 숙의(熟議) 혹 심의(deliberation)가 의사 결정의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다. 단순 여론조사와 다수결 투표가 아니라 일반 시민의 열린 토론과 사려 깊은 숙의를 통해 공공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민주주의 모델이다. 아마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사례는 2017년에 실시되었던 신고리 원전 5·6호기의 건설 중단·재개 여부에 관한 공론 조사일 것이다. 그러나 숙의민주주의는 원전 건설과 같은 전국 수준의 국가적 사안뿐 아니라 지자체 수준의 각종 지역·민생 이슈에 적용할 수 있다. 로컬 수준에서 비교적 적은 수의 시민들이 소위 ‘미니공중’(mini-public)을 이뤄 숙의에 참여하는 방식이다. 이하에서는 필자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로컬 숙의민주주의 사례를 공유하고자 한다. 하나는 2017년 말 개최되었던 ‘성북구 아파트 경비원 고용안정 시민회의’ 사례고, 나머지 둘은 현재 진행 중인 ‘관악구 협치 의제 생방송 공론장’ 사례와 서울시의 ‘시민의 집단지성으로 만드는 코로나 이후의 서울’ 시민회의 사례다.
 

‘위드(with) 코로나’ 시대는
‘언택트’를 넘어 ‘로컬택트’로
시민의 토론과 숙의에 기초한
로컬 숙의민주주의에 주목해야

우선 성북구 시민회의 사례부터 보자. 필자는 성북구민으로서 시민회의 의장으로 직접 참여한 바 있다. 당시 최저임금제 도입으로 서울 압구정 현대아파트 경비원들이 전원 해고되는 등 사회적 논란이 일 때, 성북구 주민 80명은 숙의 방식으로 문제를 풀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입주자 대표, 관리소장, 경비원이 나와 입장을 설명하고 이어서 고용노동부, 민주노총, 시민단체 인사가 나와 전문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사이사이에 질의응답과 모둠 토론의 숙의 과정을 3차례 거치는 형식이었다. 꼬박 하루 만에 나온 최종권고안은 ‘해고는 없고, 대신 근로시간을 단축한다’였다. 근무 형태와 시간을 조정해 경비원 고용안정을 보장하는 한편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주민 부담을 줄인다는 아이디어로, 돈을 많이 받기보다 계속 일하고 싶은 경비원의 입장과 생활상의 다소간 불편은 감수하겠다는 주민 입장 사이 양보와 조정을 거쳐 나름의 합의를 끌어낸 결과다. 이러한 합의 정신은 성북구의 동행(同幸)-갑과 을이 함께 행복한-아파트 캠페인으로 이어지면서 성공적인 로컬 사회적 협의 모델로 관심을 모았다.
 
얼굴을 마주 보며 토론하기 힘든 ‘위드(with) 코로나’ 시대에도 숙의민주주의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관악구와 서울시 사례는 기초 및 광역 지자체 수준의 흥미로운 모델을 보여준다. 먼저 관악구 사례는 일련의 온라인 숙의 프로세스를 통하여 민관이 함께 추진할 협치 의제를 발굴해내는 프로젝트다. 각종 온라인 채널로 지역사회 문제에 대한 주민 의견을 수렴하고 다양한 공론화 과정을 거쳐 협치 의제를 선정한 후, 선정된 협치 의제를 구체화하고 실행·평가해 나갈 확대분과를 구성하여 실천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관악구 민간 협치회의의 역할이 두드러졌으며, 10회에 걸친 ‘관악 FM’의 유튜브 연동 ‘보이는 라디오’ 생방송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필자가 생방송 공론장에 참여하여 관찰한 결과, 관악구 사례는 새로운 온라인 숙의 모델을 발견한 경우로 보인다.
 
서울시 시민회의는 지역·성별·연령을 고려한 무작위 추첨으로 선정된 3000여 명의 시민위원이 8월 30일 예정인 최종 시민총회까지 100일간, 10회의 온·오프라인 회의에 참여해 정책을 토론·제안·결정하는 숙의민주주의 사례다. 숙의 운영은 현장 원탁토론, 줌(zoom) 온라인토론, 유튜브 생중계를 병용한다. ‘코로나 이후 새로운 서울’이라는 대주제 아래 시민참여형 방역체제, 재난긴급생활비 지급대상과 방법, 코로나 사각지대 돌봄 공백 해소방안, 비대면·디지털 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준비, 코로나 이후 지속 가능한 사회, 코로나 시대의 민주주의와 인권 등 6개 주제별 숙의 결과를 토대로 30개 내외의 총회 상정 안건을 결정하고, 그중 10개 내외의 시민 선호가 높은 정책 제안을 선별하여 적극적으로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필자는 서울 민주주의 위원회 위원 자격으로 관여하였다. ‘시민 역학조사 보조원 양성’과 같은 흥미로운 제안들도 눈에 띄지만, 무엇보다 시민들의 뜨거운 참여 열기를 확인할 수 있다. 시민들은 화상회의로 퇴근길 지하철에서, 집에서, 회사에서 접속해 의견을 낸다. 처음에는 화상회의 접속조차 서툴렀던 시민들이 회가 지날수록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방법과 상호 토론하는 방법을 배워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매회 온라인 시민회의 유튜브 조회 수도 1만여 건에 달한다.
 
어쩌면 숙의민주주의는 로컬 이슈에 더 걸맞은 민주적 혁신 모델인지 모른다. 위에 예시한 사례 외에도 전국적으로 여러 기초 및 광역 지자체 수준에서 다양한 실험이 꿈틀거린다. 더구나, ‘위드(with) 코로나’ 시대에는 ‘언택트(Untact)’를 넘어 로컬을 중심으로 일상을 재편하고 관계를 재형성하는 ‘로컬택트(Localtact)’가 더욱 중요해진다고 한다. 근거리 이동과 적절한 거리 두기로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신뢰 기반의 지역사회를 중시한다는 얘기다. 로컬에 뿌리를 두면서도 온·오프라인으로 연결된 새로운 로컬 민주주의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이유다.
 
김의영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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