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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여론 때문인가...무리하게 '강간범' 신상공개한 경찰

중앙일보 2020.08.06 18:04
“강간이나 성폭행 등 혐의도 인정합니까?”
 
경찰이 강간‧유사강간‧음란물제작 등의 혐의로 신상공개를 결정한 A씨(38)에게 취재진이 던진 질문이다. 지난달 3일 A씨는 검찰로 송치되면서 ‘포토라인’에 섰다. 이틀 전 경찰이 신상정보 공개심의위원회(심의위)를 개최하고 이름‧나이 등의 신상을 모두 공개하기로 결정한 이후다. 그의 답변은 “그건 아니다. 혹시 제가 모르는 잘못이 있는지 돌아보고 반성하고 있다”였다. 
지난달 3일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약칭 청소년성보호법) 위반 등으로 구속된 A씨(38)가 강원지방경찰청에서 춘천지검으로 송치되기 위해 호송차량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3일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약칭 청소년성보호법) 위반 등으로 구속된 A씨(38)가 강원지방경찰청에서 춘천지검으로 송치되기 위해 호송차량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A씨 측은 경찰의 신상공개 결정에 반발해 춘천지법에 신상공개 집행정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하지만 경찰의 결정을 지켜본 사람들은 "A씨가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법원은 A씨의 손을 들어줬다. “신상이 한번 공개되면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춘천지검은 경찰이 1차 수사한 사건을 넘겨받아 추가 수사를 이어갔다. 그리고 A씨의 강간‧유사강간 혐의에 대해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성폭행이 있었다고 경찰이 지목한 날에 성관계 자체가 없었다고 봤다. 검찰이 작성한 불기소결정문에는 무혐의 처분 사유가 일반적인 사건보다 더 상세하게 적시돼 있다. 경찰의 수사 결과에 반하는 무혐의 처분 결정이 관련자를 꼼꼼하게 조사해서 내린 결과라는 사실을 명확히 기록한 것이다.  
 
성폭력처벌법에 따르면 죄를 범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때에만 신상정보를 공개할 수 있다. 법에서 증거에 관한 규정을 둔 건 신상이 한 번 공개되면 뒤늦게 불기소 또는 무죄 결론이 나더라도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통상 결정적인 물적 증거가 있거나 피의자가 혐의를 인정했을 때 신상공개가 이뤄져 왔다.  
 
경찰이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공론화한 이후 신상공개를 촉구하는 여론에 밀려 과도하게 밀어붙였다는 지적이 나온다. 강원경찰청은 지난해 ’갓갓‘ 문형욱으로부터 ’n번방‘을 물려받아 운영하고, 2590여개의 음란물을 판매하는 방식으로 유포한 ’켈리‘를 붙잡았지만, 당시엔 신상공개 논의 자체가 없었다. 당시는 사건이 공론화되기 전이다.
 
A씨가 미성년자 성매수‧카메라 이용 촬영‧음란물소지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만큼 그를 마냥 두둔할 수는 없다. 성착취물을 유포하거나 n번방에 가입한 적은 없다고 해도 그는 n번방 관계자로부터 영상을 구매하고 성관계 영상을 몰래 촬영했다. 다만, 저지르지 않은 범죄까지 뒤집쒸우진 말아야 한다.  
 
경찰은 “이미 강간‧유사강간 등의 혐의로 법원이 구속영장을 발부한 상태였다”는 점을 신상공개 결정 사유로 들었다. 또 A씨에 대한 피해자 진술이 검찰에서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구속이 곧 유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 법조계에서는 쉽게 바뀔 수 있는 진술이 신상공개까지 결정할 핵심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양홍석 변호사(법무법인 이공)는 “A씨의 얼굴과 이름보다 앞으로 유사 범죄를 어떻게 막을지를 수사기관이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A씨는 랜덤채팅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해 미성년자와 수차례 접촉했다. 앱을 통해 ‘그루밍’과 성매수가 쉽게 가능하다는 문제는 신상공개 논란 때문에 부각되지 못했다. 정작 중요한 게 뒷전이 된 건 아닌가. 
 
정진호 사회2팀 기자
정진호 사회팀 기자

정진호 사회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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