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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화의 한반도평화워치] 북핵 외면하는 ‘나쁜 평화’ 노선, 현실 직시하고 바꿔야

중앙일보 2020.08.04 00:19 종합 23면 지면보기

비핵화 동상이몽과 한국의 선택

2017년 11월 이동식 발사대에 실린 ICBM급 화성-15형을 살펴보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 아래). 북핵을 외면하면 한국 생존이 위태로워진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중앙포토]

2017년 11월 이동식 발사대에 실린 ICBM급 화성-15형을 살펴보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 아래). 북핵을 외면하면 한국 생존이 위태로워진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중앙포토]

2017년 5월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일제 강점기 친일과 해방 이후 독재에서 기인한 3불(불평등·불공정·부정부패)을 내치는 재조산하(再造山河·나라를 다시 만든다)를 표방했다. 검찰 개혁, 소득주도성장, 탈원전, 부동산 안정화 등이 그 주요 정책들이다.
 

을사늑약 때 이완용 “나쁜 평화가 전쟁보다 낫다” 강변
이후 36년간 일제 강점 이어지며 한국인 큰 고통 받아
문재인 정권 들어 평화 공존과 대화 몰입하다 현실 외면
북한 비핵화 없는 관계 개선 추진하다간 자승자박 우려

그 후 3년여가 흘렀다. 조국 사태, 울산시장 선거 의혹, 윤미향 사건, 금융 비리 의혹 등 권력층 수사는 적폐이고 이를 엄호하면 검찰 개혁세력이다. “부동산 정책은 자신 있다”라는 대통령의 결의는 규제 강화→세금 인상→집값 폭등의 악순환에 빠졌지만, 밀리면 끝이라는 거대 여당의 입법 폭주에 브레이크가 없다. 국내에선 탈원전, 해외로는 원전 수출이라는 역설 속에 세계 최고 기술력을 인정받은 원전 생태계는 파괴되고 있는데 국책 기관들을 앞세운 에너지 전환 정책이 한창이다. 정작 필요한 것은 탈(脫) 탈원전으로의 정책 전환인데 말이다.
 
“올바른 방향으로라면 바꾸는 것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영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 윈스턴 처칠 총리가 1924년 재무장관 재임 시 하원에서 했던 말이다. 그동안 강행한 정책들이 실패했다면 고쳐야 했다. 그러나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원칙주의자라고 평가한 문 대통령의 원칙은 반드시 지켜져야 해서일까. 잘못된 정책들이 궤도수정 없이 밀어붙이기식으로 추진되고 있다. “개혁에 맞서는 적폐 세력의 저항은 당랑거철(螳螂拒轍, 자기의 힘은 헤아리지 않고 강자에게 함부로 덤비는 행위)일 뿐, 반드시 국민 힘으로 제압될 것”이라는 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의 말은 이를 대표한다. 나도 국민인데, 민주화 세력이라는 집권층이 ‘다 국민을 위해서’라며 초래한 국민 편 가르기와 민주주의 위기상황이 절망스럽다.
  
슬그머니 뒷전으로 밀린 북한 비핵화
 
부동산 실정(失政)은 정책 전환이 답이다. 그러나 이를 무마하기 위해 백년대계여야 하는 천도(遷都) 카드를 또 빼 들었다. 이에 더해 내년 재·보궐 선거와 내후년 대선을 앞두고 북·미 대화나 남북 관계가 진전된다면 표심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선거 주판알을 튕기는 집권층에 굴욕적인 ‘북한 바라기’가 밑지는 장사가 아닌 이유다.
 
이런 가운데 국민 안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핵심 국정 과제인 북한 비핵화 이슈가 슬그머니 뒷전으로 밀려버렸다. 6·25 전쟁 70주년 대통령 기념사는 비핵화 거론 없이 남북 상생을 강조했다. 북한 김정은은 핵 억제력이 국가 안전을 담보한다고 말하는데, 이인영 신임 통일부 장관은 국민의 평화에 대한 열망이 핵보다 더 강력한 군사억제력이라고 주장하니 어이가 없다.
 
북한 비핵화의 교본이라 할 9·19 공동성명은 2005년 6자회담에서 합의됐다. 그 첫 조항에 북한은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계획을 포기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 조치에 복귀한다고 명시돼 있다. 이것이 비핵화의 최종 상태(end state)이다. 그런데도 주요 당사국들은 ‘동상사몽(同床四夢)’ 중이다.
 
북한의 목표는 핵을 포기하지 않은 채 미국과 관계 개선을 하는 파키스탄 모델이다. 이라크 후세인 정권과 리비아 카다피 정권은 핵 억제력이 없어 결국 전복했다는 것이 김정은에게는 피의 교훈이다. 실제 북·미 협상 과정에서 북한은 조선반도 비핵화라는 모호한 언급만 했지 9·19 공동성명에서 공약한 비핵화 합의를 언급한 적이 없다. 더욱이 핵 폐기는 1960년대 할아버지 김일성 때부터 지속한 핵·미사일 개발, 즉 백두혈통의 ‘가족 유산’을 버리는 것이다.
 
대선을 앞두고 고전 중인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깜짝 대북 이벤트로 국면 전환을 노릴 수도 있겠지만,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나 추가 핵 실험 같은 사고만 안 치기를 바랄 것이다. 그런데도 지난주 “북한 핵에 대한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 목표는 여전하냐”는 상원 외교위원의 질문에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예스”라고 했다. 바이든이 차기 대통령이 된다면 CIVD 원칙에 더욱 충실할 것이다. 중국 시진핑 정권의 경우 미·중 관계 프레임에서 북핵의 전략적 득실을 저울질 중이고, 한반도에서 북핵 폐기만이 아니라 미국이 한국에 제공하는 핵우산도 걷어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국의 원칙도 CVID와 한반도의 실질적 평화였다. 그러나 “정의로운 전쟁보다 비겁한 평화가 낫다”는 문 대통령의 원칙 때문일까. 이번 정권 들어 평화 공존과 대화에 몰입하다 보니 비핵화 실체를 직시해야 하는 궤도에서 벗어나 버렸다. 2018년 이래 문 대통령은 외교무대에서 수차례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가 확고하다고 했고, 국제적 왕따를 감수하면서까지 대북 제재 완화를 부탁해왔다. 배은망덕한 북한 정권의 온갖 막말과 합의 위반 도발 행위에도 문 대통령은 김정은과 했던 평화의 약속을 되돌릴 수 없다고 한다. 통일부 장관과 국가정보원장 청문회에서도 말로는 비핵화라 했지만, 어떻게든 국제 제재를 우회해 대북 지원을 통한 대화 재개와 관계 개선을 도모하는 것을 최우선시하고 있다. 비핵화가 물 건너가고 있다.
  
정책 전환해 핵 없는 진정한 평화 이뤄야
 
1905년 을사늑약 당시 이완용은 고종에게 “아무리 나쁜 평화라도 전쟁보다 낫습니다. 이게 다 조선 백성을 위한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나쁜 평화’의 결과는 일제 강점 36년이었다. 종전선언과 평화체제 보장이 북한의 핵 포기로 이어질 것으로 보는 것은 핵 무력이 완성되기 전에나 할 수 있었던 희망적 사고다. 이제 북한 핵을 머리에 이고 살게 된 상황은 그 이전과 그 이후가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긴장 고조 상황이 생길 때마다 북한은 핵 위협으로 대응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일은 북한이 함부로 핵 카드를 휘두르지 못하도록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를 잘 유지하고 북핵이 우리에게 위협이 되지 않도록 철통 같은 한·미 연합 방위 태세를 갖춘 채 대북 협상에 임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 정부의 대북 정책은 비핵화를 견인해내지도 못하면서 제재 약화와 한·미 동맹 약화라는 자충수를 두고 있다. 신속한 정책 전환만이 핵 없는 진정한 평화를 위한 길이다.
 
핵보유국 인정 ‘파키스탄 모델’ 노리는 북한
1974년 인도가 핵 실험에 성공하자 파키스탄의 알리 부토 총리는 “풀만 뜯어 먹더라도 핵무기를 개발할 것”이라고 말했다. 65년 카슈미르 영유권 분쟁과 71년 방글라데시 독립을 둘러싼 인도와의 갈등에서 밀린 파키스탄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73년 대통령이 된 부토의 요청으로 압둘 카디르 칸 박사는 네덜란드 다국적기업의 원자력 기술을 훔쳐 귀국했고, 미국의 강력한 반대에도 핵 개발에 몰두했다.
 
77년 쿠데타가 발생해 부토가 교수형에 처해지고 모하메드 지아 울 하크 장군이 권좌에 오르며 미국에 협력하는 듯했지만, 핵 개발은 비밀리에 계속됐다. 그러다 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미국은 군사적 요충지 파키스탄에 아프간 반군을 지원할 기지를 세웠고 그 대가로 핵 개발을 묵인해주었다. 98년 파키스탄이 핵 실험에 성공했으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비난 결의안만 채택하고 상임이사국인 러시아·중국의 반대로 제재 결의안은 도출하지 못했다.
 
강력한 경제 제재를 시행한 미국의 압박에서 벗어나려고 파키스탄은 핵 실험을 동결하고 ICBM 개발도 하지 않았다. 또 자국의 핵무기 보유는 인도 때문이지 미국을 위협할 의도가 전혀 없음을 수시로 표명하며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탈레반과 알카에다가 파키스탄 국경의 사각지대로 도피했고,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위해 파키스탄의 협조가 필요했다. 결국 미국은 파키스탄에 대한 제재를 풀었고 핵 보유를 사실상 인정했다. 파키스탄 사례는 초강대국 승인 없이 핵보유국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트럼프 대통령은 틈만 나면 북·미 정상회동 후 북한이 ICBM 발사와 핵 실험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며 북핵 문제의 완전한 해결보다는 미국의 안전과 한반도 평화 정착을 업적으로 재선 성공의 발판을 다지려 한다. 김정은으로서는 트럼프가 동결의 덫(freeze trap)에 걸려 파키스탄처럼 핵보유국으로 인정받는 시나리오가 최상일 것이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북한도 “풀을 뜯어 먹어도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신화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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