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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대통령은 민심 이반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길

중앙일보 2020.08.03 00:07 종합 30면 지면보기
시위는 격정적일 때보다 부드러울 때가 더 무섭다. 광우병(2008년)이나 국정농단(2016년) 당시에도 일부의 분노로 시작한 집회가 국민적 축제로 변하면서 급격한 민심 이탈로 이어졌다.
 

대통령 지지율 4월 말 64%에서 7월 말 44%로
시위도 태극기부대→3040, 여성으로 다변화

지난 1일 저녁 서울 중구 예금보험공사 앞에서 열린 청년들의 시위도 마찬가지다. 인천국제공항공사(인국공) 직원과 대학생 등 2000여 명이 모였는데, 과격함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각자의 소망을 담은 노란색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한쪽에선 ‘불공정 OUT’이라 고 쓰인 두더지 잡기 게임을 즐겼다.
 
지난달 26일 외대앞역 광장에선 길바닥에 앉아 『김지은입니다』 책을 읽는 독서 시위가 열렸다. 안희정·오거돈·박원순으로 이어지는 여권의 권력형 성범죄를 규탄하고 피해자들과 연대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 흔한 피켓 하나 없었고, 작은 구호조차 외치지 않았다. 그저 책 읽고 의견을 나눈 게 전부였지만 파장은 더 컸다.
 
몇 주째 계속되는 부동산 시위는 어느새 3040의 놀이터가 됐다. 국회 개원식 때 대통령에게 구두를 던진 남성을 ‘신발 열사’로 부르며 신발 던지기 행사를 이어간다. 온라인에선 정부에 항의하는 내용의 실검 챌린지를 벌인다. 부동산 카페에 글을 올려 단번에 62만 조회수를 기록한 39세 주부 ‘삼호어묵’이 주목을 받았다.
 
이처럼 반정부 시위의 성격이 최근 한 달 사이 크게 변한 것은 현 정부 출범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집회 주체가 태극기부대에서 다양한 계층으로 확대되면서 시위 양상이 다채로워졌다. 이는 현 정부의 콘크리트 지지층으로 여겨졌던 30~40대(부동산)와 청년(일자리), 여성(미투)의 민심에 균열이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총선 직후인 4월 말 64%였던 대통령 지지율은 7월 말 44%로 급감했다(한국갤럽). 정당 지지도에선 4·15 총선 당시 여당에 49개 의석 중 41석을 안겨줬던 서울에서 민주당(31.4%)과 미래통합당(40.8%)의 지지율이 역전됐다(리얼미터). 지난주 부동산법 졸속 처리와 같은 여당의 폭주가 계속된다면 민심의 이탈은 더욱 빨라질 수 있다.
 
부동산 집회 참가자들은  “우리는 순수 시민들이다. 생존과 관계된 악법을 저지하기 위해 나왔다”고 했다. 이념적 성향이 달라 정부 정책을 반대하는 게 아니라 생존의 문제가 걸려 있어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인국공 사태에 분노한 청년들도, 미투 문제로 여권에 등 돌린 여성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지금이라도 대통령과 여당은 조용하지만 거대한 민심의 변화를 겸허히 받아들이길 바란다. 민심의 흐름을 돌려놓으려면 이념과 진영 논리보다 진짜 민생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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