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86세대 젠더 감수성에 화났다, 2030 ‘나도 김지은’ 시위

중앙일보 2020.08.03 00:03 종합 16면 지면보기
“박원순 전 시장 사건 피해자 기자회견 때 ‘저는 살아있는 사람입니다’라는 말에 울컥했어요.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키려는 피해자의 투쟁에 용기와 지지를 보내고 싶습니다.”
 

『김지은입니다』 거리서 독서회
권력형 성범죄 피해자와 연대 표출
여권 인사의 2차 가해엔 “입 닫아라”

지난달 26일 서울 동대문구 외대앞역 광장에서 열린 『김지은입니다』 독서회에서 한 참석자가 한 말이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전 수행 비서이자 성폭력 피해자인 김지은씨가 쓴 이 책을 읽고 감상을 나누는 자리지만, 본질적으로는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전 비서 성추행 사건에 맞서 20·30대가 벌인 일종의 ‘독서 시위’ 현장이다. 서울 동대문구의 지역시민단체 ‘도꼬마리’가 주관한 이번 행사엔 대학생과 지역 단체 활동가 10여 명이 참가했다. 아스팔트 위 돗자리에서 30분간 책을 읽은 이들은 모두 “박원순·오거돈·안희정 등 권력형 성범죄 사건에 답답하고 화가 나서 왔다” “성인지 감수성이 낮은 기성세대를 비판하고 권력형 성범죄 피해자와 연대를 표출하기 위해서 왔다”고 했다.
 
지난달 26일 서울 동대문구 외대앞역 광장에서 『김지은입니다』 독서회 참가자들이 책을 읽고 있다. 백경민 인턴기자

지난달 26일 서울 동대문구 외대앞역 광장에서 『김지은입니다』 독서회 참가자들이 책을 읽고 있다. 백경민 인턴기자

이선화(32)씨는 ‘아무리 힘센 사람이라도 잘못을 하면 있는 그대로 처벌받아야 한다는 진리를 명확히 하고 싶었다’는 책 구절을 소리 내 읽었다. 대학생 송모(21)씨는 “가해자 대다수가 남성인 권력형 성범죄를 (남성인) 제가 이야기해도 될까 고민도 많이 했지만, 박원순 사건과 안희정 사건이 겹쳐 보이면서 피해자들에게 지지를 꼭 표시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난달 25일 서울 은평구 응암역 4번 출구 앞에선 ‘은평 여성주의 책 모임’이 주관한 행사가 열렸다. 9명의 참가자는 ‘#피해자와_연대합니다’라고 적힌 스티커를 마스크에 붙이고, 벤치에서 책을 읽는 ‘침묵시위’를 벌였다.
 
박 전 시장 사건의 경우, 피해자에 대한 여권 지도층 인사들의 2차 가해가 특히 논란이 됐다. 독서회 참가자들은 이들을 향해 ‘입을 닫아라’고 했다. “박 전 시장을 감싸는 자들도 사회 권력층이기 때문에 자신의 발언이 피해자를 안 좋은 상황으로 몰고 간다는 점을 알아야 해요. 진상이 밝혀지기 전까진 SNS 계정을 닫고 가만히 있으면 좋겠어요.” 20대 B씨의 말이다. 대학생 송씨는 “피해자의 증언을 믿기 힘들다는 세력을 보면 위안부 피해자를 의심하는 일본 정부가 떠오른다”고 했다.
 
지난달 26일 서울 동대문구 외대앞역 광장에서 『김지은입니다』 독서회 참가자들이 책을 읽고 있다. 백경민 인턴기자

지난달 26일 서울 동대문구 외대앞역 광장에서 『김지은입니다』 독서회 참가자들이 책을 읽고 있다. 백경민 인턴기자

“내가 김지은이다”라고 주장하는 20·30대가 많아진 건 정·관계·법조계에 포진한 ‘86세대’의 낮은 성인지 감수성이 여러차례 드러난 게 계기가 됐다. 서울고등법원이 아동 성 착취물 사이트 ‘웰컴투비디오’ 운영자인 손정우(24)의 미국 송환을 불허한 일도 그 사례 중 하나다.
 
취업을 준비 중인 여성 구모(26)씨는 “대통령이 안희정 전 지사 모친상에 조화를 보내고, 성폭행 가해자 장례식에 공인들이 단체로 추모하는 모습에 분통이 터졌다”고 했다.
 
피해자 측 기자회견을 주최한 한국여성의전화·한국성폭력상담소에 대한 후원 인증을 본인 인스타그램에 올린 남성 직장인 정모(29)씨는 “사회에서 성폭력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소극적으로 반응한 것에 죄책감이 들었다”며 “‘나도 피해자들과 함께 싸우겠다’는 마음을 주변에 퍼뜨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박 전 시장 사건을 진보·보수 진영 싸움으로 보면 안 되고, 권력형 성범죄 사건이자 우리 사회의 약자가 처한 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낸 계기로 이해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박원순·안희정 등 권력자에 의한 성폭력이 이제 막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생각해요. 소위 86세대가 뒷전으로 제쳐놓은 소수자의 인권 문제는 앞으로 계속 터져 나올 겁니다.”  
 
박건·윤상언·최연수 기자 park.kun@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