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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세조가 울며 고사하면서 단종의 옥새 받은 곳은?

중앙일보 2020.08.02 13:00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22) 

 
경복궁 강녕전과 교태전 동편에 국보 224호 경회루가 있다. 조선 시대의 누각 중 그 규모가 가장 큰 건축물인 경회루는 나라의 큰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원래 태조 연간에 지을 때는 이름 없는 작은 누각이었던 것을 태종 12년에 건물이 기울자 이를 수리하면서 위치를 서쪽으로 조금 옮기고 더 크게 지었다.
 
태종은 공조판서 박자청(朴子靑)에게 명해 서쪽으로 옮겨 큰 연못을 파고 4각형의 인공섬 위에 더 크게 세우고 땅이 습한 주변을 연못으로 만들어 경회루라 이름 지었다. 경회(慶會)란 ‘경사스러운 연회’라는 뜻으로, 임금과 신하가 덕으로 만난 것을 말한다. 하륜이 풀이하기를 “내가 일찍이 듣건대 애공(哀公)의 물음에 공자가 답하기를 ‘정사는 사람에 달렸다’고 하였다. 올바른 정사를 펴는 임금은 올바른 사람을 얻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으니 올바른 사람을 얻어야 경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경복궁 강녕전과 교태전 동편에 국보224호 경회루가 있다. 경회(慶會)란 ‘경사스러운 연회’라는 뜻으로, 임금과 신하가 덕으로써 만난 것을 말한다. [사진 pixabay]

경복궁 강녕전과 교태전 동편에 국보224호 경회루가 있다. 경회(慶會)란 ‘경사스러운 연회’라는 뜻으로, 임금과 신하가 덕으로써 만난 것을 말한다. [사진 pixabay]

 
태종은 이곳을 원래 외국 사신을 접대할 목적으로 지었고, 그 밖에 공신들에게 연회를 베풀거나 과거시험을 치르고 시문을 펼쳤으며 활쏘기를 즐겼다. 가뭄이 들면 연못에 도롱뇽을 풀어주며 기우제를 지내는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했다. 경회루 건립 당시의 현판 글씨는 태종의 세자였던 양녕대군이 썼으나, 지금의 현판은 1867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시와 서체가 뛰어났던 위당 신관호가 썼다. 
 
태종실록 23권, 태종 12년(1412) 4월 2일 2번째 기사

경복궁 서쪽 모퉁이에 새로 누각을 짓다
새로 큰 누각(大樓)을 경복궁 서쪽 모퉁이에 지었다. 공조 판서 박자청(朴子靑)에게 명하여 감독하게 하였는데, 제도가 굉장하고 창활(敞豁: 넓게 뚫려 있음) 하였다. 또 못을 파서 사방으로 둘렀다. 궁궐의 서북쪽에 본래 작은 누각이 있었는데, 태조가 창건한 것이었다. 임금이 협착하다고 하여 명하여 고쳐 지은 것이다.
 
태종실록 23권, 태종 12년(1412) 5월 16일 5번째 기사 

경복궁의 새 누각의 이름을 경회루라고 명하다
경복궁 새 누각(新樓)의 이름을 경회루(慶會樓)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경회(慶會)·납량(納涼)·승운(乘雲)·과학(跨鶴)·소선(召仙)·척진(滌塵)·기룡(騎龍) 등의 이름을 가지고 지신사 김여지에게 보이며 말하였다.

“내가 이 누각을 지은 것은 중국(中國) 사신에게 잔치하거나 위로하는 장소로 삼고자 한 것이요, 내가 놀거나 편안히 하자는 곳이 아니다. 실로 모화루(慕華樓)와 더불어 뜻이 같다. 네가 가서 하윤에게 일러 이름을 정하여 아뢰어라.”
김여지가 복명하는데, 경회루로 정하였다.

 

옥새 끌어안고 통곡하는 성삼문

경회루가 국가의 공식 연회를 위해 지은 건물이고 왕을 비롯한 왕실에서 성대한 잔치를 펼쳤던 공간이기는 하지만 이곳이 늘 왕실의 화려한 연회가 펼쳐졌던 즐거운 장소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가뭄이 들면 백성의 농사를 걱정하여 간곡한 마음으로 하늘에 기우제를 지냈으며, 임금은 만기를 다스리다가 잠시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측근 몇을 대동하고 달빛을 바라보며 사색을 하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을 것이다.

 
용상은 외로운 자리이다. 1455년 윤 6월 10일, 단종이 경회루에 올랐다. 단종은 숙부 이자 당시 영의정이었던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이고 실질적인 정권을 잡고 있는 상태에서 더는 왕위에 있기가 불안했다. 이때 수양대군은 경회루 아래 서 있었다. 단종은 예방승지 성삼문에게 옥새를 가져오라고 명했다. 왕명으로 옥새를 가져오던 성삼문이 경회루 연못가에서 옥새를 끌어안고 엎드려 대성통곡했다.
 
성삼문이 바친 옥새를 받아든 단종은 경회루 아래에서 옥새를 수양대군에게 넘겼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박팽년은 경회루 연못에 몸을 던져 죽으려고 했으나 성삼문이 “임금께서 아직 상왕으로 계시고, 우리가 살아있으니 아직 일을 도모할 수 있다. 도모하다가 이루지 못하면 그때 죽어도 늦지 않다”며 극구 만류했다. ‘추강집’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후 성삼문과 박팽년은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죽고 단종은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갔다가 세조에 의해 죽었다. 세조는 울며 거듭 사양하다가 단종의 당부와 재촉으로 마지못해 왕위에 올랐다.
 

유득공, 꽃피는 봄날 경회루에 취하다

경회루는 늘 왕실의 화려한 연회가 펼쳐진 즐거운 장소만은 아니었다. 임금은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측근을 대동하고 달빛을 바라보며 사색을 하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을 것이다. [사진 pixabay]

경회루는 늘 왕실의 화려한 연회가 펼쳐진 즐거운 장소만은 아니었다. 임금은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측근을 대동하고 달빛을 바라보며 사색을 하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을 것이다. [사진 pixabay]

 
춘성유기(春城遊記)는 영·정조 때 사람 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이 꽃피는 봄날 자신이 사는 서울을 유람하며 느낀 감회를 적은 수필식 기행문이다. 유득공은 임진왜란으로 불타서 폐허가 된 경복궁을 둘러보고 경회루 터에 이르러서 “남아 있는 경회루의 돌기둥은 그 높이가 세 길이나 되고 모두 마흔여덟 개인데…”라고 쓰고 있다. 
 
유득공은 경인년(영조 46년, 1770) 삼월 삼 일, 연암 박지원, 청장관 이덕무와 더불어 삼청동으로 들어가 창문(倉門) 돌다리를 건너 삼청전(三淸殿) 옛터를 찾았다.
 
유득공 『춘성유기(春城遊記)』 중에서
 
“…옛터에는 묵정밭(오래 내 버려두어 거칠어진 밭)이 남아 있어 온갖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자리를 나누어 앉았더니 옷에 녹색 물이 들었다. 청장관(이덕무)은 풀이름을 많이 아는 분이라 내가 풀을 뜯어 물어보았더니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수십 종을 기록해 두었다. 청장관은 어찌 그리 해박할까?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술을 사와 마셨다.…이날 밤 나는 몹시 취해 서상수(徐常修)의 집 살구꽃 아래에서 잠을 잤다. 또 그다음 날(음 3월 6일), 폐허로 남아 있는 경복궁으로 들어갔다….
 
근정전을 돌아서 북쪽으로 가자 일영대(日影臺: 해시계를 설치했던 받침대)가 나타났다. 일영대를 돌아서 서쪽으로 가니 경회루 옛터가 바로 여기다. 이 옛터는 연못 가운데 있어 부서진 다리를 통해 갈 수 있다. 다리를 덜덜 떨며 지나가노라니 나도 모르는 새 땀이 난다. 누각의 주춧돌은 높이가 세 길쯤 된다. 무릇 48개의 기둥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 여덟 개가 부서졌다.
 
바깥 기둥은 네모난 기둥이고 안쪽 기둥은 둥근 기둥이다. 기둥에는 구름과 용의 형상을 새겼는데 이것이 바로 유구(琉球國: 일본 오키나와의 옛 나라 이름)의 사신이 말한 세 가지 장관 가운데 하나이다. 연못의 물은 푸르고 맑아서 살랑 바람에도 물결을 보내온다. 연방(蓮房, 연꽃의 열매가 들어 있는 송이)과 가시연 뿌리가 가라앉았다 떠오르고 흩어졌다 합해진다. 작은 붕어들이 얕은 물에 모여 거품을 뽀글뽀글 뿜으며 장난질을 치다가 사람 발소리를 듣더니 숨었다가 다시 나타난다. 연못에는 섬이 두 개 있는데 거기에 소나무를 심었다. 소나무는 잎이 무성한 채 삐죽 솟아 그 그림자가 물결을 가르고 있다. 연못 동쪽에는 낚시하는 사람이 있고, 연못 서쪽에는 궁궐을 지키는 내시가 손님과 함께 과녁을 겨누며 활을 쏘고 있다. 다시 궁궐도(宮闕圖)를 꺼내어 찾아보니, 경회루는 무릇 서른다섯 칸이었고….”
 
조각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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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우 이향우 조각가 필진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 교사로 명예퇴직 후 조각가로 작품을 제작하면서 우리 역사와 전통문화를 배우고 알리는 궁궐 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다. 궁궐에서의 오랜 활동을 바탕으로 조각가의 심미안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궁궐의 아름다움을 직접 그리고 글을 썼다. 우리 궁궐의 정다운 이야기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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