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진핑 ‘반부패 8년’도 어쩌지 못하는 중국의 ‘권력 부패’

중앙일보 2020.08.02 10:59
중국 사회가 유가 경전을 연상시키는 도서 『평안경(平安經)』이 촉발한 ‘권력 부패’ 문제로 시끌벅적하다. 24만 5000자 분량에 절대 싸지 않은 299위안(약 5만1000원)의 가격으로 이 책이 나온 건 지난해 3월의 일이다.
 

‘1세 평안’, ‘눈 평안’, ‘여성 평안’, 한국 평안’ 등
모든 것에 ‘평안’ 두 글자 붙인 『평안경(平安經)』
중국 사회에서 ‘기서(奇書)’로 극찬되는 코미디
지린성 공안청 고위 관리인 저자에 잘 보이려
아첨하는 낭송회 개최 등 권력형 부패의 전형

중국 지린성 공안청의 고위 관리인 허뎬은 지난해 3월 세상 모든 것의 평안을 기원하는 도서 『평안경(平安經)』을 냈으나 출판 경위와 도서 홍보 과정이 권력형 부패의 전형적인 예로 비난 받으며 지난달 31일 면직됐다. [중국 웨이보 캡처]

중국 지린성 공안청의 고위 관리인 허뎬은 지난해 3월 세상 모든 것의 평안을 기원하는 도서 『평안경(平安經)』을 냈으나 출판 경위와 도서 홍보 과정이 권력형 부패의 전형적인 예로 비난 받으며 지난달 31일 면직됐다. [중국 웨이보 캡처]

 
저자는 허뎬(賀電). 올해 57세로 지린(吉林)성 공안청(公安廳, 경찰청) 당위원회 부서기이자 상무 부청장으로 비교적 고위 관리에 속한다. 출판 초기엔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한데 지난 5월부터 중국 관방에 의해 ‘기서(奇書)’로 소개되면서 문제가 터졌다.
 
5월 9일 지린성 긴급관리대응청이 위챗 공식 계정에 ‘평안경 독후감’을 올리고선 “유림(儒林)의 대작” 운운하며 관방의 도장까지 적어 “필독서”라고 추켜세운 것이다. 일주일 뒤인 5월 16일 길림일보(吉林日報)에 실린 서평은 온갖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중국 지린성의 고위 공안인 허뎬이 낸 책 『평안경』. 24만 5000자 분량에 가격은 299위안. 약 6000권이 팔렸다고 한다. [중국 웨이보 캡처]

중국 지린성의 고위 공안인 허뎬이 낸 책 『평안경』. 24만 5000자 분량에 가격은 299위안. 약 6000권이 팔렸다고 한다. [중국 웨이보 캡처]

 
평론가 장융(張咏)은 “국가와 시대를 초월한 역작”으로 “역대 첫 번째 평안경서(平安經書)”라며 유가 경전의 반열에 올렸다. 또 그 내용이 “구절구절 주옥같아 마치 영혼을 세척하는 느낌으로 그 심오함이 깊이를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관리가 읽으면 초심(初心)을 잃지 않을 것이고, 학자가 읽으면 평안의 이치를 깨닫게 될 것이며, 기업인이 이 책을 보면 회사가 안녕하고, 백성이 읽을 경우엔 세상 태평을 누릴 수 있다”고 선전했다.
 
허뎬이 지은 『평안경』의 내용 일부. ‘눈 평안’, ‘코 평안’ 등 신체 기관의 평안을 빌고 있다. [중국 웨이보 캡처]

허뎬이 지은 『평안경』의 내용 일부. ‘눈 평안’, ‘코 평안’ 등 신체 기관의 평안을 빌고 있다. [중국 웨이보 캡처]

 
그뿐 아니다. 6월 7일엔 지린성 창춘(長春)에서 ‘평안경 낭송회’가 열렸다. 지린성의 학자와 전문가, 시인 등 약 10여 명이 패널로 참석해 독후감을 발표했다. 한 전문가는 이 책을 읽고 “자신의 필력이 새롭게 천장을 깨는 힘을 얻게 됐다”라고도 했다.
 
『평안경』은 도대체 어떤 책인가. 아주 간단하다. 삼라만상(森羅萬象) 온갖 것에 ‘평안’ 두 자를 붙인 것이다. 예를 들면 성별 평안을 기원한다면서 ‘남성 평안’, ‘여성 평안’을 적고, 국가별 평안에선 ‘중화인민공화국 평안’을 필두로 ‘한국 평안’도 나온다.
 
허뎬이 지은 『평안경』의 내용 중에는 남성과 여성의 평안, 연령마다 평안을 기원하는 것도 있다. [중국 웨이보 캡처]

허뎬이 지은 『평안경』의 내용 중에는 남성과 여성의 평안, 연령마다 평안을 기원하는 것도 있다. [중국 웨이보 캡처]

 
신체 각 부위를 열거해 ‘눈 평안’, ‘코 평안’, ‘입 평안’을 외치고 나이는 태어났을 때부터 시작해 ‘출생 평안’, ‘한 달 평안’, ‘백일 평안’, ‘1세 평안’, ‘2세 평안’ 식으로 쭉 나간다. 또 ‘베이징 서두우(首都) 공항 평안’, ‘상하이 푸둥(浦東) 공항 평안’ 등 공항 평안을 빌기도 한다.
 
내용이 모두 이렇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해외판의 소셜미디어 계정인 샤커다오(俠客島)는 “이런 식이라면 반나절에 10만자를 쓸 수 있다”고 개탄했다. 이후 중국 언론의 문제 제기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허뎬이 지은 『평안경』에는 세계 각국의 평안도 나온다. 아시아 지역에선 '중화인민공화국 평안'을 필두로 ‘북한(朝鮮) 평안’과 ‘한국 평안’을 기원하고 있기도 하다. [중국 웨이보 캡처]

허뎬이 지은 『평안경』에는 세계 각국의 평안도 나온다. 아시아 지역에선 '중화인민공화국 평안'을 필두로 ‘북한(朝鮮) 평안’과 ‘한국 평안’을 기원하고 있기도 하다. [중국 웨이보 캡처]

 
우선 이런 책이 어떻게 ‘ISBN’ 도서 번호를 받아 중국에서 출판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출판사는 ‘군중출판사’와 ‘인민출판사’ 두 곳이 적시돼 있었는데 문제가 되자 인민출판사는 책을 출판한 적이 전혀 없다고 부인했다.
 
중국 신경보(新京報)에 따르면 책은 약 6000권이 팔렸다. 1만권 정도 팔리면 나름 베스트 셀러라고 할 수 있는데 『평안경』은 가격이 여느 책의 4배 정도 가격이라 책값까지 고려하면 출판사는 수지맞는 장사를 한 셈이라고 한다.
 
중국 지린성 공안의 고위 관리 허뎬은 지난해 3월 모든 것의 평안을 기원하는 『평안경』을 펴냈으나 지난달 31일 면직돼 결국 자신의 ‘평안’을 지키지는 못했다. [중국 웨이보 캡처]

중국 지린성 공안의 고위 관리 허뎬은 지난해 3월 모든 것의 평안을 기원하는 『평안경』을 펴냈으나 지난달 31일 면직돼 결국 자신의 ‘평안’을 지키지는 못했다. [중국 웨이보 캡처]

 
여기에 부패가 자리한다. 일반적으로 팔릴 책이 아니라 일부러 가격을 고가로 책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책은 누가 사나. 바로 지린성 공안의 고위 관리인 허뎬에게 눈도장을 찍어 잘 보이려는 사람들이다.
 
중국신문주간(中國新聞周刊)은 베이징대학 차오허핑(曹和平) 교수의 말을 빌려 “하급 기관이나 관련 기구에서 구매했다면 뇌물”이라고 주장했다. 남방일보(南方日報)는 “관리의 취미를 파고든 권력형 부패의 전형”이라고 꼬집었다.
 
허뎬이 지은 『평안경』의 내용 일부. 중국 공공장소 곳곳에 대한 평안을 빌고 있다. 중국의 각 공항과 기차역에 대한 평안을 기원했다. [중국 웨이보 캡처]

허뎬이 지은 『평안경』의 내용 일부. 중국 공공장소 곳곳에 대한 평안을 빌고 있다. 중국의 각 공항과 기차역에 대한 평안을 기원했다. [중국 웨이보 캡처]

 
허뎬이 ‘권력’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런 코미디가 벌어질 수 있었겠느냐는 지적이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2012년 11월 중국 공산당 총서기에 취임하며 ‘부패 척결’에 나섰지만 8년 가까운 지금도 부패는 여전하다는 이야기다.
 
허뎬이 『평안경』을 쓴 배경은 2019년부터 중국 공안이 추구하는 선전 용어가 ‘평안’ 두 글자였기 때문이다. ‘평안’을 위해 모든 걸 통제하는 게 중국 사회다. 지난 4월엔 중앙정법위 서기를 조장으로 하는 ‘평안중국건설협조소조’가 출범하기도 했다.
 
중국 사회에 커다란 물의를 일으킨 책 『평안경』의 저자인 허뎬은 2017년 중국 공안에선 유일하게 중국 서예가협회에 가입한 인물이다. [중국 웨이보 캡처]

중국 사회에 커다란 물의를 일으킨 책 『평안경』의 저자인 허뎬은 2017년 중국 공안에선 유일하게 중국 서예가협회에 가입한 인물이다. [중국 웨이보 캡처]

 
‘신시대(新時代)’를 건설하겠다는 시진핑의 새로운 사회관리 키워드가 ‘평안’이기도 하다. 중국 훙싱(紅星)신문에 따르면 서예가이기도 한 허뎬은 ‘평안’ 두 글자를 일만 가지 글자체로 쓴 ‘서예 전시회’를 열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허뎬은 결국 7월 31일 면직 처분을 받았다. 책은 서가에서 내려졌다. 홍콩 명보(明報)는 “평안을 기원하던 허뎬이 자신의 평안을 지키지 못했다”고 전했다. 중국 언론은 “중국에 어찌 하나의 허뎬만 있겠냐”며 끊이지 않는 권력형 부패를 개탄하고 있다.
 
베이징=유상철 특파원 you.sangchul@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