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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 정자세운 '실세' 한명회···조선때도 한강은 부동산 핫플

중앙일보 2020.08.01 11:00

권세가 '강변 정자'…한강은 '핫플레이스'

조선 시대 서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당시에도 부자들은 '한강'이 바라다보이는 좋은 곳에 정자를 지어 세를 과시하고, 양반들은 '금연' 결심을 하고도 '작심삼일'로 그치곤 했다는 기록이 나왔다.
 
 서울역사편찬원은 31일 조선시대 숙종 시절 서울에서 주요 관직을 지낸 엄경수(1672~1718)의 한문 일기 8권을 한글로 풀어쓴 『국역 부재일기(孚齋日記)』를 발간했다.
 
 13년간 써내려간 일기 8권의 주인인 엄경수는 서울 사대부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34살에 문과에 급제했다. 예조판서를 지낸 아버지를 이어 13년간 문신 관료로 일했지만, 정쟁에 휘말리며 관직에서 쫓겨난다. 이후 그는 곤궁한 삶을 살다 숨을 거뒀다.
서울역사편찬원은 조선시대 서울사람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국역 부재일기'를 발간했다. 숙종 시절 서울에서 주요 관직을 지낸 엄경수의 일기 8권을 한글로 번역했다. [사진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역사편찬원은 조선시대 서울사람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국역 부재일기'를 발간했다. 숙종 시절 서울에서 주요 관직을 지낸 엄경수의 일기 8권을 한글로 번역했다. [사진 서울역사편찬원]

조선시대에도 '선배 갑질' 만연

 일기엔 한강을 내려다볼 수 있는 자리에 세도가들의 정자들이 들어선 상황이 담겨있다. 엄경수는 직접 한강변에 들어선 정자 수를 세고 일기에 기록했다. 현재의 광진구부터 강남구와 마포구에 이르는 강변길에 있는 정자는 총 29개였다.
 
 지금은 서울의 지역명이 된 '압구정(狎鷗亭)'도 기록돼 있다. 한명회의 정자로 "벼슬살이하면서도 갈매기와 노닐 수 있으리라(宦海前頭可狎鷗)'는 글귀가 있다며 사연을 적었다. 권세를 누렸던 한명회가 사망한 뒤 이후 '진평공자'에게 팔렸다는 것이다.
 
 그는 "진평공자가 3000금의 비용을 들여 크게 집을 지어 몇해가 지나 완공되었지만, 정작 진평공자가 나와 머무른 것은 겨우 십여일 밖에 되지 않는다. 얼마 전 진평공자의 부음이 전해졌다"고 죽음 앞에서 무상한 부와 권력을 소개했다.
잠실한강공원에서 바라본 한강 풍경. 연합뉴스

잠실한강공원에서 바라본 한강 풍경. 연합뉴스

금연 쉽지 않네…양반도 금연 고민

 엄경수는 많은 권력자가 한강이 보이는 명소에 정자를 지었지만 결국 자연을 누릴 수 있는 것은 가난한 선비라고 적기도 했다.
 
 "정자 지을 땅을 쉽게 얻을 수 있고, 재목을 쉽게 마련할 수 있어 사람들의 눈에 띄게 하고, 경치가 뛰어난 곳을 차지하여 재력을 자랑하지만, 그 마음은 반드시 진실로 즐기는 것은 아니다. (중략) 그들은 진실로 이곳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바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에 하루도 와서 살 수 없다. 그래서 결국 유람하는 이들과 한가한 선비들이 왕래하며 올라가 구경하는 곳이 되었을 뿐이다." 
 
 특이한 것은 지금도 더러 '신고식'이라는 이름 아래 치러지는 직장 내 갑질이 조선시대에도 있었다는 것이다. 엄경수는 과거 시험에 합격하고 첫 관직을 받아 나갔던 '신입' 공무원 시절의 경험을 적었다. 
 
 1706년 7월 11일은 그가 이른바 '공무원' 신분으로 첫 출근을 한 날이었다. 출근 직후 그가 당한 일은 전임자들의 호출이었다. 그는 일기에 '잡스러운 놀이'를 해야 했고, 출근 첫날부터 50일간 밤에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문안 인사를 했다고 적었다.
 
 한 달여 뒤인 8월 29일 일기엔 또 다른 선배들의 갑질을 서술했다. 새로 온 관원은 선배들에게 음식을 차려 대접해야 하는 '허참례'를 해야 했다. 이때 참석한 사람들은 서로 허리띠나 신발, 부채와 같은 소지품을 내어놓는데 신참의 좋은 물건을 선배들의 '낡은 물건'과 바꿔야만 했다는 것이다. 
18세기 농촌 풍속을 그린 단원 김홍도의 ‘타작도’. 벼를 타작하는 농민 혹은 노비와 이를 누워 담배를 피며 바라보는 양반이 보인다. [중앙포토]

18세기 농촌 풍속을 그린 단원 김홍도의 ‘타작도’. 벼를 타작하는 농민 혹은 노비와 이를 누워 담배를 피며 바라보는 양반이 보인다. [중앙포토]

서울역사편찬원, 『부재일기(孚齋日記)』 발간

 엄경수는 1712년 1월 24일 '금연결심'을 한다. 일기장엔 "남쪽에서부터 들어온 지 백 년에, 즐기지 않는 사람이 없어 거의 온 나라에 두루 퍼졌다"며 담배 얘기를 꺼냈다.
 
 그는 "담배를 오랫동안 피우면 신장이 상하고 다리가 물러지며, 눈이 어둡고 정신이 혼미하여진다"면서 "수명을 줄어들게 하는 물건으로 도움이 되는 점은 하나도 없다"고 썼다. 그러면서도 "끊으려 하나 끝내 끊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인가"라며 낙담하기도 했다. "멀리하려 하나 곧바로 가까이하게 되며, 끊으려 하나 곧바로 친히 하게 되니 끝내 목적 달성을 할 수 없다"고 한탄했다. 
 
 형제들과의 금연 약속도 번번이 깬 기록도 나온다. 그는 "지난번에 아재(아저씨)가 오셔서 '오늘부터 같은 날 함께 끊기로 약속하자'하여 막내아우와 함께 이 글을 써서 기록한다"고 금연 약속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얼마 되지 않아 금연에 실패한 이야기를 또다시 일기장에 써야 했다.
 
 그는 "며칠 뒤 내가 약속을 어겼고, 한 달 뒤 막내아우가 약속을 어겼다"며 "몇달 뒤엔 아재가 홀로 약속을 지켰지만, 또 점차 담배를 가까이하기를 면하지 못했다"고 적었다. 결국 세 명 모두 금연에 실패한 것이다.
 
김현예 기자 hykim@joongang.co.kr
양반의 모습을 잘 표현한 양반탈. [중앙포토]

양반의 모습을 잘 표현한 양반탈. [중앙포토]

아내 생일에 쓴 일기
 엄경수는 1710년 11월 26일 아내 영인 이씨를 잃는다. 부부의 연을 맺은지 24년만의 일이었다. 이씨는 오랜 시간 병을 앓아온 것으로 일기에 기록됐다. 엄경수는 아내를 위해 한밤 중에 인삼을 구해오기도 했지만 아내는 병마를 이겨내지 못했다. 
 
그는 궁핍한 살림살이 때문에 "아내의 초상을 당하고 명주를 쓰려 했지만 곱고, 물은 들인 것은 비단보다 귀한 데다 돈이 없어 사기가 어려웠다"고 애달픈 마음을 담아 기록했다.쓸만한 옷은 모두 팔아 살림에 보탰고, 전당잡힌 옷을 기억해 내 찾아왔지만 모두 헤지고 더려워져서 쓸 수가 없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아내 상을 치르고 일년 뒤, 그는 엄마를 잃은 딸 셋을 누이네에 보내야 하는 안타까운 심정도 기록했다. 그는 이씨와의 사이에서 딸 넷을 낳았다. 큰 딸은 갓 결혼해 걱정이 되지 않았지만 둘째는 11살, 셋째는 고작 8살이었다. 막내 딸은 4살로 한창 엄마 손길이 필요한 때였다. 엄경수는 "맏딸은 조만간 시댁에서 데려갈 예정이나, 어린 딸은 보호살 수가 없고 또 남자아이와 달라 아비가 밤낮으로 보살피기 곤란해 다른 곳에 맡겨 어미 도리를 해려 했다"고 적었다. 
 
아내를 잃고 일년 뒤쯤, 아내의 생일 날 그는 긴 일기로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을 담기도 했다. 
 
그는 "지금까지 후회하고 한스러워하는 것은 (아내의 병 치료를 위해) 보양하는 약재를 썼다면, 기사회생할 길이 필시 없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어리석게도 깨닫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하늘이 도와주기만을 기다렸다"며 자신을 자책했다. 그는 "예전에 입었던 옷으로 남의 창고에 들였던 것을 되찾아와 4일 만에야 그대를 무명으로 염했다"며 5일이 지나 빈소를 차리게 된 이야기를 한탄했다. 그는 "평소 온 식구의 근심을 그대에게 맡겨두고 알지 못하던 내가 하루 아침에 직접 그 일을 감당하려 하니 모든 일이 어긋나고 틀어져 제대로 한 것이 없었다"고도 했다. 
 
그는 "이 세상에 기쁨과 슬픔을 길이 함께 하기로 하였는데 누가 백년해로 하겠다는 계획이 중도에 잘못될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냐"며 "허물과 뉘우침이 날로 쌓인다"고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적었다. 총 3권으로 만들어진 '국역 부재일기'는 '서울책방'에서 구입가능하다. 이 책은 서울역사편찬원 홈페이지(history.seoul.go.kr)에서 전자책으로 열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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