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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영혼 분리인 죽음…사이버서 이미 경험 중

중앙선데이 2020.08.01 00:20 697호 26면 지면보기

[미래 Big Questions] 내부와 외부

오토 딕스, ‘저널리스트 실비아 폰 하르덴의 초상화(1926)’. [파리, 퐁피두 센터]

오토 딕스, ‘저널리스트 실비아 폰 하르덴의 초상화(1926)’. [파리, 퐁피두 센터]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20세기에 태어났다면 그와 비슷한 그림을 그렸을까?
 

고등 생명체가 가진 대부분 기능은
이기적 유전자의 ‘확장된 표현형’

내면 메시지를 외면 세상에 전달
외부 제어하고 통제하기 위해 진화

인터넷선 몸 참석 없이 경험 가능
기술이 내부·외부 경계 파괴 역할

평범한 독일 가정에서 태어난 화가 지망생 오토 딕스 (Otto Dix)는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군대에 지원한다. 당연한 일이었다. 조국 독일이 프랑스와 전쟁을 하게 됐으니 애국심으로 가득한 젊은이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다들 말하지 않았던가? 어차피 전쟁은 몇 주 후면 끝날 거라고. 겁쟁이 프랑스군은 항복할 테니 전쟁터에서의 영광을 조금이라도 누리려면 서둘러 지원해야 한다고.
 
하지만 현실에서의 전쟁은 그들의 기대와는 달랐다. 참호에 숨어 기관총을 갈겨 대던 딕스의 눈과 귀가 보고 듣고, 그의 피부가 느꼈던 전쟁은 히에로니무스 보스 그림에서의 지옥과 같았다. 어제 도착한 수천 명의 젊은이가 오늘 하루를 살아남지 못한다. 안전한 먼 사령부에 숨어 무조건 돌격하라는 지휘관들의 명령은 방금까지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으로 가득하던 누군가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것도 아무 의미 없는, 길거리 개만도 못한 죽음 말이다. 의미 있는 죽음이란 과연 존재할까? 하지만 적어도 1차 세계대전에서의 대부분의 죽음은 의미 있지도, 영광스럽지도 않았다. 피와 오줌과 내장으로 범벅이 된 진흙탕 위에 엄마를 찾으며 쓰러져가는 젊은이들, 그들은 무엇을 위해 살았고 누구를 위해 죽어간 걸까?
  
35억년 전 ‘나만의 세상’ 탄생
 
히에로니무스 보스,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 오른쪽 패널’.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히에로니무스 보스,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 오른쪽 패널’.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온 오토 딕스는 꿈꾸던 화가가 됐지만, 그의 붓은 여전히 1차 세계대전을 떠나지 못한다. 팔다리 잘리고 장님이 된 젊은이들, 거리에서 구걸해야 하는 퇴역 군인의 가족들, 그들을 지옥으로 몰았던 왕과 귀족과 장군들. 마치 기억에 남은 전쟁의 망상들을 칼로 도려내듯 오토 딕스의 그림은 불편할 정도로 잔인하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한 유명 여기자의 초상화를 그리겠다고 나섰다. 여기자는 주춤한다. 본인은 아름답지도, 예쁘지도 않다고. 코는 길고 입술은 얇다고. 거기에다 긴 손에 어울리지 않게 다리는 짧다고. 사람을 두렵게 하고, 아무도 유쾌하게 하지 못하는 자신의 외모를 왜 그리고 싶으냐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 가장 매력적인 코와 입술, 가장 늘씬한 다리. 오토 딕스는 알고 있었다. 살과 뼈를 관통하는 총알 하나, 인간을 마치 종잇조각같이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대포 한 방이면 모든 것들이 무의미해진다는 사실을. 단지 한 줌 살덩어리에 불과한 외면적 아름다움보다 여기자의 생각과 내면의 세상이 얼마나 더 아름다운지 말이다. 모든 인간은 동시에 본질에서 다른 두 가지 삶을 살아야 한다. 타인이 보고 평가할 수 있는 외향적 모습과 오로지 ‘나’라는 존재만 느낄 수 있는 내면적 세상 말이다.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왜 인간은 내면과 외면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걸까? 수십억 년 전 지구는 오로지 외향적 물질 만의 세상이었다. 하지만 ‘생명’의 등장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생명이란 무엇일까?”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 (Schrödinger)는 정보저장과 다음 세대로 정보전달 능력을 생명의 핵심으로 정했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생명은 또 다른 조건을 전제로 한다. 바로 외부와 내부의 구분이다. 외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할 수 있어야 세상과 독립된 새로운 존재가 탄생할 수 있다. 라틴어 “cella”, 그러니까 “작은방”이란 의미를 가진 cell (세포). 약 35억년 전 세포의 등장과 함께 세상은 모두가 함께 공존하는 “큰방”과, 나만의 세상, 나만의 “작은방”으로 구별되기 시작한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호모 사피엔스 같은 고등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대부분 기능은 이기적 유전자들의 “확장된 표현형” (extended phenotype)이라고 가설한 바 있다. 그게 무슨 말일까? 진화 과정을 통해 생명체 내부 구조를 최적화한 이기적 유전자들. 하지만 모세포 생명체가 다세포 생물로 진화하며 딜레마에 빠진다. 세상을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선 자신과 세상의 경계를 허물어야 하지만 동시에 세상에 다시 흡수되는 걸 막아야 한다. 더구나 단백질 합성, 호르몬, 전기신호 같은 내부 신호전달 방법들과는 달리 생명체 외부 세상과 이기적 유전자는 직접 소통할 수 없다. 확장된 표현형이 등장한 이유다. 동물과 식물 같은 초다세포 생명체들은 외부 세상을 제어하기 위해 내면적 메시지를 외향적 표현으로 확장하기 시작한다.
 
만약 목이 마른 내가 물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없다면? 필요한 물이 저절로 나에게 올 수는 없지만, 근처에 있는 누군가 마음 속에 나에게 물을 가져다주고 싶다는 생각을 심어볼 수는 있겠다. 불쌍한 표정을 질 수도 있고, “같은 공동체 구성원들은 서로 당연히 도와주어야 한다”라는 도덕성을 만들 수도 있겠고, 직접 “물 좀 가져다주세요”라는 부탁을 할 수도 있겠다. 인간의 외모, 표현, 윤리, 언어 모두 내면의 의도를 외면의 세상에 전달하는 확장된 표현형들이라는 것이다.  
  
개인과 몸은 집과 공동체로 확장
 
리처드 도킨스

리처드 도킨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현상이 하나 벌어진다. 확장된 표현형을 통해 이 전까지 외부에 있던 현상과 존재들이 앞으로 나의 통제가 가능한, 확장된 새로운 ‘내면’의 한 부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포의 내면은 몸 전체로 확장되었고, 개인의 몸은 집과 공동체로 확장된다. 원시인들에게 동굴이란 마치 엄마의 자궁같이 따듯하고 안전한 내면적 공간이었고, 21세기 우리에게는 험악한 세상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든든한 ‘내 집’이 있다. “내 집 마련”이 모두의 꿈이며, “집도 부모도 없는 이들”을 가장 불쌍히 여기는 이유다.
 
내부와 외부, 나와 세상, 집과 밖은 서로 모순적인 니즈를 만족하게 한다. 집 안은 안전하고 익숙하지만, 새로운 것이 없다. 새로운 사람과 체험은 더 큰 바깥세상에서만 경험할 수 있지만, 세상은 언제나 위험하고 예측 불가능하다. 밖에서는 집이 그립지만, 집에 갇히는 순간 언제나 답답함과 무기력에 빠지는 이유다.
 
그렇다면 내부와 외부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이제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허물기 시작한다. 집에서만 할 수 있었던 전화통화와 음악감상을 걸어 다니며 하고, 반대로 더는 극장과 학교가 아닌 집에서 영화를 보고 공부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인류 역사상 외부에서의 경험은 언제나 몸의 육체적 이동을 해야 했다. 지금까지 경험은 몸이라는 존재의 참석을 필수적으로 요구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이버 세상에서의 인류는 이제 몸과 분리된 경험을 하기 시작했다. 몸은 편한 집 침대에 누워 이 세상 어디든 경험하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이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인터넷 세상에서는 몸과 경험,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기에, 독일 감독 에드가르 라이츠는 인터넷 세상에서의 미래 인류를 이미 죽은 자와 비교하기도 한다. 대부분 문명에서 죽음이란 육체와 영혼의 분리를 의미하기에, 사이버 세상에서의 인간은 이미 죽음의 세상을 경험한다는 말이다.
 
최대한 오래, 최대한 자신의 생존만을 보장하기 위해 점차 더 확장된 표현형으로 진화된 이기적 유전자들. 그들을 몸에 품고 있는 우리 인류는 고도로 발전된 기술 덕분에 역설적으로 다시 외부와 내부의 경계가 허물어진 죽음의 세상으로 되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김대식 KAIST 교수·뇌과학자 daeshik@ka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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