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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주 논설위원이 간다] 피 부족시대, 전 세계서 각광받는 인공혈액…한국은 뒷짐

중앙일보 2020.07.30 00:37 종합 23면 지면보기

저출산의 또 다른 그림자

대한적십자사의 혈액 관리 직원이 보관 중인 혈액을 살펴보고 있다. 저출산·고령화로 헌혈 인구는 줄고 수혈 수요는 늘어 우리나라는 머지않아 심각한 혈액 부족을 겪을 운명이다. [사진 대한적십자사]

대한적십자사의 혈액 관리 직원이 보관 중인 혈액을 살펴보고 있다. 저출산·고령화로 헌혈 인구는 줄고 수혈 수요는 늘어 우리나라는 머지않아 심각한 혈액 부족을 겪을 운명이다. [사진 대한적십자사]

지난 21일 오후 3시 서울 대학로 대한적십자사 헌혈의 집. 전광판에 ‘12’라는 숫자가 떠 있다. 오전부터 이 시각까지 이곳을 방문한 헌혈자 수다. 오후 3시 10분에 여성 1명, 3시 45분에 남성 1명이 헌혈하러 왔다. 이날 저녁 8시 문을 닫을 때까지 대학로센터에서 헌혈한 시민은 모두 24명. 그나마 붐비는(?) 날이었다. 센터 김경남 과장은 “요즘 평일엔 10여 명이 보통”이라고 말했다.
 

헌혈할 젊은이 줄고 코로나19까지
5월15일엔 정부 첫 혈액 재난 문자
각국, 헌혈 대치할 인공혈액 연구
한국선 “아직 개발 검토 않는다”

3~4년 전만 해도 대학로센터에서는 한 해 약 1만6000건 헌혈이 이뤄졌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지난해 약 1만 건으로 줄었고, 최근엔 더 감소했다. 비단 이곳만이 아니다. 전국이 마찬가지다. 2015년 308만 건이었던 국내 헌혈은 지난해 279만 건으로 감소했다. 올해 실적은 전년 대비 -10%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저출산·고령화다. 헌혈을 많이 하는 고등학생과 대학생, 군인이 자꾸 줄어든다. 여기에 올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겹쳤다. 시민들은 헌혈의 집 방문조차 꺼렸다. 또한 온라인 수업으로 인해 학교에서 단체 헌혈을 받을 수 없었다.
  
가까스로 혈액 보유량 회복 … 불씨는 그대로
 
급기야 올 5월 중순에 비상사태가 벌어졌다. 코로나19가 서울 이태원 클럽을 기점으로 재확산하던 시기였다. 헌혈하려는 발길이 확 줄면서 대한적십자사 혈액원의 혈액 보유량이 3일 사용치 이하로 떨어졌다. 5월 12일부터 16일까지 5일 연속이었다. 15일엔 2.6일 치만 남았다. 적정 보유량(5일 치)의 절반 수준이었다. 헌혈 부족이 이어지면 응급 환자가 수혈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15일 오후 5시 34분, 사상 처음으로 정부가 혈액 부족과 관련해 재난 문자를 전 국민에게 보냈다. ‘코로나19로 헌혈자가 감소해 혈액 보유량이 주의 단계에 진입했습니다. 가까운 헌혈의 집이나 헌혈 카페를 방문해 헌혈에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20대 이하 헌혈 비중 높은 한국

20대 이하 헌혈 비중 높은 한국

미디어의 협조를 얻어 ‘긴급 헌혈 캠페인’까지 펼치면서 혈액 보유량은 4~5일 치를 유지하게 됐다. 그러나 불씨는 그대로다. 코로나19는 언제 재창궐할지 모른다. 더 심각한 건 기저 요인인 저출산·고령화다. 헌혈하는 젊은 인구는 줄고, 빈혈과 각종 질병·수술로 수혈을 받는 고령자는 늘어난다. 연세대 의대 김현옥 교수 등의 연구에 따르면, 2010~2016년 사이 70대 수혈은 122%, 80대 수혈은 174% 증가했다.
 
한국은 특히 20대 이하 젊은 층의 헌혈이 전체의 3분의 2(2019년 65.5%)를 차지할 정도로 절대적이어서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타격이 크다. ‘피가 마르는’ 상황이 올 수 있다. 한국과 반대로 일본과 프랑스는 40대 이상의 헌혈 비중이 60% 안팎이다.
 
혈액은 급하다고 수입할 수도 없다. 넉넉한 나라가 없고, 혈액을 통한 감염 우려도 있다. 현재 국경을 넘어다니는 건 희귀 혈액형 정도다. 정부는 대책 마련에 나섰다. 내년까지 혈액수급관리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중·장년층의 헌혈을 독려하고, 병원에서 혈액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도록 ‘환자 혈액관리’를 도입한다는 내용이다. 한국이 유독 심각하다고는 하지만, 저출산·고령화는 거의 모든 선진국의 공통 사안이다. 미래의 혈액 부족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는 어떻게 대비할까.
 
줄어드는 헌혈량

줄어드는 헌혈량

유력한 해결책 가운데 하나가 ‘인공혈액’이다. 보다 정확히 말해 ‘적혈구’ 또는 ‘인공 산소운반체’를 만드는 것이다. 핏속에는 산소를 나르는 적혈구 말고도 백혈구·혈소판 등 다양한 기능을 하는 다양한 성분이 있다. 하지만 응급 상황에서 제일 긴요한 건 뇌세포 등 세포가 생명을 유지하도록 산소를 전달하는 작용이다. 적혈구 속 헤모글로빈이 맡은 역할이다.
 
실제 수혈이 제일 많이 이뤄지는 것도 헌혈 혈액 중에 적혈구를 골라낸 ‘적혈구제제’다. 이를 대치할 인공혈액을 개발하면 혈액 부족 사태를 막을 수 있다. 주요국들이 인공혈액 개발에 힘을 쏟는 이유다. 반면 한국 정부는 뒷짐을 지고 있다. “인공혈액 개발과 관련해서는 검토하는 게 없다”고 보건복지부 측은 밝혔다.
 
인공혈액 개발 방법은 크게 두 종류다. 줄기세포에서 적혈구를 만드는 것과, 동물에서 헤모글로빈을 뽑아 산소운반체 화합물을 만드는 방식이다. 인간 장기 이식용 돼지를 활용해 혈액을 생산하려는 시도도 있다.
 
줄기세포에서 적혈구를 만드는 연구는 미국·영국·프랑스·일본 등이 진행하고 있다. 영국 브리스톨대 연구진은 임상시험에 돌입했다. 국내에서는 연세대 의대 김현옥 교수팀이 개발하다가, 연구팀의 일원이었던 한양대 의대 백은정 교수가 넘겨받아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다음은 백 교수와의 문답.
 
적혈구 생산 연구가 어느 수준까지 왔나.
“양산이 가능하다. 관련 논문을 쓰고 있다. 다만, 생산 비용이 문제다. 대량 생산하면 가격이 내려가겠지만, 지금은 400㎖(1회 헌혈량) 한 팩에 수백만 원~1000만원 정도다.”
 
영국이 우리보다 앞섰다. 우리가 따라갈 때 지식재산권 문제는 없을까.
“영국이 기술을 완전히 공개해야 알 수 있다. 그러나 적혈구 만드는 방법이 다양해 문제는 없을 것 같다.”
 
개발에 애로가 있나.
“연구비와 연구자가 모자란다. 인공혈액이 아니라 세포재생 관련 연구비를 따 와서 연구하고 있다. 줄기세포 기반 적혈구 연구를 하는 곳도 현재 국내에선 우리 팀밖에 없다.”
  
뇌졸중 응급 처치에도 인공혈액 활용 가능
 
또 다른 인공혈액인 ‘헤모글로빈 산소운반체’는 각국 기업이 임상시험을 하고 있다. 국내에선 ‘선바이오’가 기술을 갖고 있다. 회사 창업자인 노광 대표는 미국 바이오 업체 ‘엔존’에서 인공혈액을 연구했다. 한국에서는 바이오 의약품(바이오시밀러)을 생산하며 인공혈액 연구를 계속했다. 노 대표는 “헤모글로빈 산소운반체는 뇌졸중 응급 치료에도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헤모글로빈 산소운반체는 적혈구보다 훨씬 작기 때문에, 적혈구가 다니지 못할 정도로 좁아진 뇌졸중 환자의 혈관을 누비며 산소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선바이오는 동물을 대상으로 안전성 등을 검증하는 인공혈액 전임상 시험을 곧 시행할 계획이다.
 
미국선 동물에 인공혈액 수혈 허용
인공혈액은 1960년대 초 개발이 시작됐다. 주목받은 계기는 베트남전이다. 당시 미군 사망자는 5만8220명. 인공혈액이 있었으면 사망자가 절반으로 줄었을 것이란 보고서도 있다. 80년대 들어 수혈을 통해 에이즈(AIDS)에 걸린 사례가 나오면서 감염 걱정이 없는 인공혈액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졌다.
 
인공혈액은 다른 장점도 있다. 혈액형을 없앨 수 있어 수혈할 때 혈액형을 잘못 맞추는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 보관기관도 길다. 헌혈 혈액은 보관 기관이 35일이다. 혈액 속 적혈구 수명이 3개월 정도여서다. 헌혈 혈액 속에는 갓 태어난 적혈구와 수명이 거의 다 된 적혈구가 섞여 있다. 35일 정도 지나면 적혈구가 많이 줄어 수혈용으로는 부적합하다. 그러나 줄기세포로 만든 적혈구는 모두 신생아다. 당연히 헌혈 혈액보다 적혈구가 오래 간다. 적혈구가 아니라 헤모글로빈 산소운반체로 만든 인공혈액은 세포가 아니어서 1~2년 냉동보관도 가능하다.
 
초기 인공혈액 연구는 산소운반체 중심이었다. 줄기세포가 관심을 끌기 전이었다. 산소운반체로는 헤모글로빈만이 아니라 각종 화합물을 시험했다. 그러나 대부분 혈관 수축·고혈압 등 부작용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연구의 축이 헤모글로빈 기반으로 옮겨 왔다.  
 
헤모글로빈 산소운반체는 부작용은 적으나 워낙 크기가 작아 혈관에서 쉽사리 새어나가는 문제가 발견됐다. 대체로 수혈 이틀 뒤면 산소운반체량이 절반으로 줄어 재수혈을 거듭해야 한다. 풀어야 할 과제다.
 
현재 산소운반체를 인간에게 수혈하도록 허가한 나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뿐이다. 미국의 ‘헤모퓨어’란 인공혈액을 쓸 수 있도록 했다. 동물에 대해서는 인공혈액을 수혈할 수 있도록 미국도 승인했다.
 
산소운반체의 몇몇 결점을 해소하려는 노력이 바로 줄기세포에서 적혈구를 만드는 것이다. 자연과 같은 경로를 밟아 적혈구를 대량 생산하는 게 목표다. 일본은 적혈구뿐 아니라 상처가 났을 때 혈액을 굳히는 역할을 하는 혈소판도 줄기세포로부터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권혁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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