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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 코리아] 진정한 협치는 상대의 논리 존중하는 노력 뒷받침돼야

중앙일보 2020.07.27 00:37 종합 29면 지면보기
허우성 경희대 명예교수

허우성 경희대 명예교수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공적 가치를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이타주의적 약속이다.
 

문 대통령, 직관·감정 따르기보다
상대 존중하는 의식적 노력 필요

하지만 이 약속은 실현되지 못했고, 정부의 비효율적 정책으로 일자리와 주거에서 국민 고통은 커졌다. 문 대통령은 가치 주장에는 빠르지만, 이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증거·이성·결과는 존중하지 않는다.
 
이는 공리주의 철학자 피터 싱어가 주창한 ‘효율적 이타주의’와 대비된다. 싱어는 “효율적 이타주의는 세상을 개선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증거와 이성을 통해 모색하고 실천하는 철학이자 사회운동”이라며 “효율적 이타주의자들은 도덕적 가치보다는 결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고 말했다.
 
그는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에서 세 그룹의 모금액을 비교하는 심리학 실험을 소개했다. 그룹1에는 ‘아프리카 말라위에서 식량 부족 사태로 300만 명 이상의 아이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일반 정보만 준다. 그룹2에는 일반 정보 없이 일곱 살짜리 말라위 소녀 로키아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 소녀가 아주 불행한 처지에 있으며 “여러분의 기부금으로 이 소녀의 삶은 더 좋아질 것입니다”라는 설명이 붙는다. 그룹3에는 일반 정보와 함께 로키아의 사진과 개인 정보를 모두 줬다. 어느 그룹이 기부를 가장 많이 했을까? 로키아에 대한 내용만 접한 그룹2다. 일반 정보만을 들은 그룹1이 가장 적게 기부했다.
 
싱어에 따르면 인간이 현실을 파악하고 행동을 선택하는 데에는 두 가지 메커니즘이 개입한다. 감성체계와 숙의체계다. 우리의 감성체계는 감정적 반응을 일으키고 선악에 대한 직관적 느낌을 도출한다. 이 느낌은 즉각적 행동으로 이어진다.
 
숙의체계는 느낌보다는 사고력과 관계가 있으며 숫자와 추상적 개념을 다룬다. 이 과정은 의식적이고 논리와 증거를 요구한다. 그 결과 숙의체계는 감성체계보다 시간이 더 걸리고 즉각적 행동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 실험은 많은 모금을 위해서는 감성체계에 호소하는 것이 좋고, 많은 수의 생명을 구하려면 숙의체계가 작동해야 한다는 걸 시사한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대니얼 카너먼 프린스턴대 명예교수는 숙의체계가 작동되려면 감성체계의 직관과 충동을 뛰어넘는 노력과 자제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문 대통령의 직관적 느낌은 빠르고 강하나 숙의체계는 게으르다. 그는 통계를 증거로 제시하지만, 자기 진영의 감성체계를 통과한 통계만 좋아한다. 문 대통령의 숙의체계는 자신의 감성체계 충동에 져왔다고 할 수 있다. 문 대통령이 강조한 협치가 진정성이 있으려면 상대 진영의 논리와 증거를 존중하려는 인지적 수고와 노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부동산 투기 금지라는 가치 주장만으론 부동산을 안정시킬 수 없다. 1000조원이 넘게 풀린 돈은 주식시장 이외에도 갈 곳이 있어야 하고, 부동산 투자도 일부 허용돼야 한다. ‘우리민족끼리’를 내세운 한반도 평화 정책이나 반일 감정을 동반한 대일 외교 정책은 감성체계의 충동만 따르고 숙의체계는 경시했다. 한반도 평화 정책은 훨씬 냉정해야 하고, 대일 정책은 ‘일본과의 화평을 잃지 말라’는 류성룡의 당부를 기억해야 한다. 탈원전 정책이나 뉴딜 정책에도 숙의체계가 작동해야 한다.
 
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관은 정부 행사 때 빛과 소리·스토리로 국민 감성에 호소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도 모르게 문 대통령과 다수 국민의 숙의체계를 훼손시켰다. 문 대통령이 남은 임기 동안 협치의 대통령이 되려면 감성체계의 직관·감정에 따르기보다는 상대 진영의 숙의체계도 활용하는 효율적 이타주의자가 돼야 한다.
 
허우성 경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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