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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댓] 사진 한 점 안 남긴 명성왕후, 살해 배후는 흥선대원군?

중앙일보 2020.07.26 16:00
창작가무극 '잃어버린 얼굴 1895' 2015년 공연 장면. [사진 서울예술단]

창작가무극 '잃어버린 얼굴 1895' 2015년 공연 장면. [사진 서울예술단]

조선의 발전을 가로막은 장본인인가, 일본의 침략에 희생된 '성녀'인가
명성왕후는 조선 역사에서 가장 논란이 뜨거운 인물 중 하나입니다. 18일 막을 연 뮤지컬 ‘잃어버린 얼굴 1895’는 명성왕후를 둘러싼 구한말 어지러운 정치 상황을 다룬 작품인데, 기존의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명성왕후의 부정적인 면도 다뤄 화제가 됐습니다. 

히스토리

그녀가 이토록 상반된 평가를 받게 된 것은 지금뿐만이 아닙니다. 명성왕후가 정치에 나섰던 시기는 물론 을미사변과 일제강점기까지 그녀를 둘러싼 평가는 계속해서 논쟁의 대상이었습니다. 
 
명성왕후는 악녀? 영웅?
1930년 1월 동아일보에는 흥미로운 두 편의 인터뷰가 게재됐습니다. ‘풍우입년(風雨卄年)’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연재된 구한말 정치인들의 회고담입니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지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진행된 회고담인 만큼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날 인터뷰의 주인공은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개화파의 중심인물 박영효였습니다. 이날 인터뷰 기사의 주제는 ‘금릉위라는 영화로운 지위도 뿌리치고 혁명의 길을 나가게 된 경로는 무엇인가’였습니다. 즉, 국왕의 사위로서 탄탄대로가 보장된 그가 왜 갑신정변이라는 위험천만한 정치적 도박에 나섰냐는 것이죠. 박영효는 갑신정변 실패 후 역적으로 몰려 해외를 떠돌아다니다가 조선이 망한 뒤에야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1930년 1월 4일자 동아일보

1930년 1월 4일자 동아일보

이에 대해 박영효는 “민비가 고종을 농락해 왕실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정사는 날로 해이해졌다. 그래서 민씨네를 치울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명성왕후와 민씨 일파를 제거해야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고 봤다는 것이죠.
 
그런데 보름이 지난 1월 19일 명성왕후의 집안 여흥 민씨 측에서 반박 인터뷰에 나섰습니다. 1905년 자결로써 순국한 민영환의 동생 민영찬입니다. 민영찬은 ”명성왕후가 누명을 썼다“면서 ”여러 민씨들이 잘못한 것을 그 어른이 대신 짊어졌다. 그리고 명성왕후는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에 반대할 뜻이 없었는데, 그들이 오해해서 제거하려고 하니 부득이하게 민씨들을 등용한 것“이라고 반박했지요.
 
명성왕후에 대한 평가는 구한말에도 극과 극을 오갔습니다. 
을미사변 직후인 1895년 10월 김홍집 내각은 ‘왕후 민씨를 서인으로 강등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고종도 “왕후 민씨가 자기의 가까운 무리들을 끌어들여 짐의 주위에 배치하고 짐의 총명을 가리며 백성을 착취했다”며 거들었지요. 여기엔 일본의 압력도 작용했습니다. 하지만 명성왕후가 시해되기 직전인 1894년 8월에도 종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은 상소를 통해 명성왕후의 민씨 세력이 정사를 전횡하고 백성을 수탈한다고 비판했습니다. 
 
1930년 1월 19일 동아일보

1930년 1월 19일 동아일보

그런데 1896년 고종이 일본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달아난 아관파천 이후 분위기는 달라집니다.  
단발령에 대한 여론 악화로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자 고종은 김홍집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뒤늦게 명성왕후의 국장을 엽니다. 또, 1900년에는 명성왕후를 지키다가 죽은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장충단 공원을 조성했는데요. 여기엔 홍계훈, 이경호 등 을미사변과 임오군란 때 명성왕후를 지키다 죽은 사람들이 배향됐습니다. 또 일본에 대한 증오심이 커지면서 명성왕후를 안타깝게 여기는 목소리들이 속속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렇듯 명성왕후에 대한 상반된 평가는 오늘날만큼이나 과거에도 치열했고, 세간의 관심이기도 했습니다.  
 
명성왕후는 보잘것 없는 집안의 고아 출신?  
명성왕후는 너무나도 유명한 인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잘못 알려진 상식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한미한 가문의 고아 소녀가 외척 세력을 없애려던 흥선대원군의 구상과 맞아떨어져 일약 중전으로 발탁됐다고도 하는데 사실과 다릅니다. 
명성왕후는 여흥 민씨 민치록의 외동딸로 1851년 태어났습니다. 여흥 민씨는 태종 이방원의 부인 원경왕후와 숙종의 부인 인현왕후 등 유명한 왕후를 배출한 노론 명문가입니다. 명성왕후의 증조부와 조부는 성균관 대사성과 이조참판을 지냈고 이런 집안 배경 덕분에 명성왕후의 부친 민치록은 음서로 벼슬을 얻어 종4품까지 올랐습니다. 
 
조선시대 가문별 문과 급제자 수

조선시대 가문별 문과 급제자 수

또, 여흥 민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수를 많이 배출한 가문 순위에서 10위에 오르는 등 인적 기반이 탄탄한 가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당시 안동 김씨 정도는 아니었지만 여흥 민씨 일족은 명문가였고, 권력 욕구가 약한 집안도 아니었습니다. 고종이 친정을 시작한 1873년 11월부터 김홍집 내각이 수립된 1894년 6월까지 고위직을 차지한 민씨 일족은 51명이나 됩니다. 다만 대원군 입장에선 자신의 어머니도, 부인도 민씨였던만큼 어느 정도 컨트롤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했을 수는 있었겠지요.
 
또, 명성왕후의 이름은 민자영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정비석 작가의 소설에 등장한 이름이고 역사적 근거는 없습니다. 죽을 때 ‘내가 조선의 국모다’라고 발언했다는 것도 1994년 이수광이라는 작가가 쓴 『나는 조선의 국모다』에서 비롯돼 드라마를 통해 유명해진 대사일 뿐입니다. 
 
"호리호리한 몸매의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   
명성황후를 접했던 서양인들의 평가는 대체로 우호적입니다. 두뇌가 명석하고 지적이라는 이미지라는데 평가가 일치합니다.
 
“중간키에 몸매는 호리호리하고 곧았다. 얼굴은 길고 이마는 높으며 코는 길고 가늘아 귀족적인데 입과 아래턱에는 결단력과 개성이 드러난다. 광대뼈는 두드러지고 귀는 작으며, 얼굴은 기름진 저지 크림색을 띄었고, 눈썹은 아치모양이며, 아몬드 형의 눈은 지적이고 예리해 보였다” (프랭크 카펜터)
 

『역사의 색』에 실린 명성황후 사진. 왼쪽 흑백사진에 컬러를 입혔다. 사진의 주인공이 실제 명성황후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사진 윌북]

『역사의 색』에 실린 명성황후 사진. 왼쪽 흑백사진에 컬러를 입혔다. 사진의 주인공이 실제 명성황후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사진 윌북]

“왕후는 40세가 넘는 여인으로서 몸이 가늘고 미인이었다. 검고 윤이 나는 머리카락에다 피부는 진주가루를 이용해서 창백했다. 눈은 차갑고 날카로웠는데, 그것은 그녀가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임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이사벨라 비숍)
 
특히 명성왕후와 네 차례 식사했던 영국 여행가 이사벨라 비숍은 명성왕후가 시베리아와 일본 철도의 건설비, 청일전쟁에 대한 일본의 시각 등 현안에 대해 매우 깊숙히 질문해 놀랐다는 인상도 남겼습니다.  
  
사라진 명성왕후의 얼굴  
명성왕후를 둘러싼 또 다른 논란은 바로 사진 진위 문제입니다.  
현재 명성왕후의 모습으로 알려진 사진은 20세기 초반부터 서양 잡지와 책에서 명성왕후라고 설명한 사진입니다. 하지만 일각에선 이것이 궁녀의 사진이라고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이승만의 책 ‘독립정신’에 실린 사진 등 다양한 사진이 나왔는데요. 아직 어느 것이 ‘진짜’라고 확실히 단정하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뮤지컬 ‘잃어버린 얼굴 1895’ 역시 이 문제를 다루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명성왕후 장례식을 보도한 1898년 1월 9일자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사진제공=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명성왕후 장례식을 보도한 1898년 1월 9일자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사진제공=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한편 일각에선 명성왕후가 정적에 노출되는 것을 피하려고 사진을 찍지 않았다고도 합니다. 사실 임오군란 때 군인들에 의해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가 있었고, 실제로 을미사변으로 비극적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을 참작하면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로 들리진 않습니다. 사실여부를 떠나 이런 해석이 나온다는 것 자체는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반영한다고 할 수는 있겠죠.  
 
을미사변의 주역들
명성왕후는 1895년 10월 8일 일본 낭인들에 의해 살해됐습니다. 조선의 친러 노선이 명확해지고, 일본 교관들이 양성한 훈련대가 해산이 결정되면서 전격적으로 벌어진 사건입니다. 당시 이 사건엔 일본 군대와 경찰뿐 아니라 조선군 훈련대도 개입했고, 명성왕후의 시아버지이자 정적이었던 대원군도 일본인들과 함께 입궐했습니다. 그래서 명성왕후의 살해 배후 중 하나가 대원군이라는 설도 파다했는데, 대원군이 주도하지는 않았더라도 최소한 이를 방조한 것만큼은 사실로 여겨집니다. 
 
또 당시 을미사변에 협조한 조선인 중에는 우범선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건 후 일본으로 가 일본 여성과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아들도 태어났습니다. 그 아들은 부친의 범죄를 알게 된 뒤 평생 마음의 빚을 안고 살았다고 하는데, 바로 ‘씨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입니다. 우장춘 박사가 훗날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을 받고 한국으로 와서 농업 발전을 위해 헌신한 데도 이러한 배경이 작용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우장춘 박사의 묘 [중앙포토]

우장춘 박사의 묘 [중앙포토]

갈팡질팡 외교 전략, 친중과 친러 그리고 친일

일본이 을미사변이라는 극단적인 범죄를 저지른 것은 고종과 명성왕후가 친러 노선으로 방향을 튼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이미 18세기부터 러시아의 남하에 대해 공포심을 갖고 있던 일본은 조선이 러시아 영향권에 들어간다는 시나리오를 가장 두려워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쩌면 고종과 명성왕후도 이를 역이용해 러시아에 접근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명성왕후가 을미사변이라는 비극을 맞이했을 때 러시아는 아무런 힘이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19세기말은 제국주의가 세계를 지배하던 시기였습니다. 고종과 명성왕후는 외세의 상호 견제를 통해 조선의 독립과 왕실의 보존을 유지하려고 했지요. 그래서 친일-친청-친러로 수차례 노선을 바꾸며 외교 정책을 폈습니다. 다만 이러한 변화무쌍한 외교 정책은 실제로 큰 효과가 없었다는 것이 훗날 드러났지요.
특히 동학농민운동을 막기 위해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한 것은 최악의 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갑신정변 후 청나라와 일본이 맺은 ‘톈진조약(天津條約)’에 따르면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면 일본도 한반도에 군대를 파견할 수 있었습니다. 섣부르게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인 결정은 결국 일본군의 주둔과 청일 전쟁으로 이어졌고, 조선은 열강의 전쟁터가 됐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을 소재로 한 SBS 드라마 '녹두꽃'의 한 장면. 녹두장군 전봉준(최무성)을 비롯한 구한말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욕망과 심리가 잘 그려진 작품이다. [SBS]

동학농민혁명을 소재로 한 SBS 드라마 '녹두꽃'의 한 장면. 녹두장군 전봉준(최무성)을 비롯한 구한말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욕망과 심리가 잘 그려진 작품이다. [SBS]

이렇게 조선이 망하는 과정 속에는 외교적 패착이 여러 차례 되풀이됐습니다. 이후 고종이 단행했던 아관파천 역시 별다른 소득 없이 해프닝처럼 마무리됐습니다. 또 고종이 동아시아 열강의 견제세력이 되어줄 것이라 기대했던 미국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적 영향력을 인정하고 물러났습니다. 당시 미국이나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 데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서 청나라, 일본, 러시아, 미국 사이를 떠돌며 외교적 노력으로 자주독립국을 유지하고자 했던 고종과 명성왕후의 구상은 이렇듯 헛된 꿈에 불과했습니다.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우리의 위치는 어디인지, 또 상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간과한 채 외교정책을 펼치면 기대한 지점과는 전혀 다른 곳에 도착한다는 것이 구한말의 역사와 명성왕후의 비극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아닐까요.  
명성황후의 초상. [권오창 그림]

명성황후의 초상. [권오창 그림]

명성왕후인가 명성황후인가
명성왕후 민씨의 호칭 문제는 간혹 논쟁이 되곤 합니다. 학계에서도 이 호칭이 통일되지 않은채 명성황후와 명성왕후 모두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각에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했으니, 황제국에 맞게 명성황후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 실제로 명성황후로 많이 표기되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조성된 데는 1990년대 중반 나와 크게 성공한 뮤지컬 '명성황후'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가 그리 간단치는 않습니다.
명성왕후가 사망한 것은 1895년 10월, 대한제국이 선포된 것은 1897년 10월입니다. 그녀에게 '명성(明成)'이라는 시호가 내려진 것은 대한제국이 선포되기 전인 1897년 3월입니다. 그러니까 그녀가 사망한 뒤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명성황후로 추존된 것이죠.
 
그런데 이때 추존된 것은 명성황후 뿐이 아닙니다.
황제국에서 황제의 부인은 황후가 되듯이, 황제의 부친은 군(君)이 아니라 왕(王)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종의 부친 이하응도 흥선대원군에서 흥선대원왕으로 추존됐습니다. 즉, 명성왕후를 명성황후로 불러야 한다면 대원군 역시 대원왕이라고 불러야 맞습니다. 
고종도 이전 조선 국왕과 달리 '광무제' 혹은 '고종 황제'라고 표기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정조(선황제), 순조(숙황제), 헌종(성황제), 철종(장황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적 인물을 사후 추존된 명칭으로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은 국왕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도조(度祖)라고 추존됐지만 우리가 이자춘을 도조라고 표기하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기준에 따라 명성황후가 아닌 명성왕후로 표기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유성운·김태호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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