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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박지원 국정원장 내정자에 내려진 ‘특명’은

중앙일보 2020.07.24 15:30
남북관계 복원 통해 정권 재창출 기여하란 메시지 담긴 듯
주요 이슈 관련 자기주장 내세우다간 여권과 충돌할 수도

[심층분석] 대북·대선 두 토끼 잡아라!

 
문재인 대통령이 ‘국정원장 박지원’ 카드를 뽑아 들었다. 집권 후반기 국정을 이끌어갈 중대한 하나의 축을 78세의 노회한 ‘정치 9단’에게 맡긴 것이다. 청와대 내에서도 아는 사람이 몇 없었을 정도로 깜짝 발탁이다. 문 대통령이 장관급 이상 인사에 야당 인사를 발탁한 게 처음이란 점에서도 그렇다. 이 포석에는 꼬인 남북관계를 푸는 문제뿐 아니라 드러나지 않는 모종의 임무가 주어졌을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린다. 국정원만이 할 수 있는, 박지원만이 해낼 수 있는 미션이다. 문 대통령은 왜 이런 뜻밖의 기용을 하게 된 것일까. 그리고 박지원 원장 내정의 함의는 뭘까. 메가톤급 변화를 불러올 새 원장을 맡는 국정원 내부 분위기와 함께 그 내막을 추적해봤다.


2018년 4월 청와대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원로자문단 오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당시 민주평화당 박지원 의원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2018년 4월 청와대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원로자문단 오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당시 민주평화당 박지원 의원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박지원 전 민생당 의원이 국정원장에 내정됐다는 소식은 누구보다 국정원 구성원들에 충격이었다. 대통령 직속 기관이라 할 수 있는 정보기관 수장으로 상상밖의 인물이 낙점됐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한때 정치적으로 대립각을 세우다시피 해온 박 전 의원은 원장 후보자로 하마평에조차 오르지도 않았다.
 
2017년 대선 때는 문재인 후보에 대해 연일 비난 공세를 펼쳐 ‘하루를 문재인 비판으로 시작한다’는 의미의 ‘문모닝’이란 별칭까지 얻었던 박 전 의원이다. 특유의 정치적 감각을 가질 수밖에 없는 국정원 간부와 요원들에게 ‘박지원 국정원장’은 말 그대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7월 3일 청와대의 내정 발표 이후 국정원 본부 청사가 있는 서울 내곡동 쪽은 비교적 차분한 편이다. 한번 결정된 건 따르는 상명하복의 규율이 엄격한 조직적 특성도 한몫하고 있지만, 박지원 원장 내정을 바라보는 미묘한 기류가 작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내부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바깥에서 보는 것과 달리 내곡동 담장 안쪽에선 박지원 원장을 환영하는 분위기가 적지 않다”고 귀띔했다. 고위 간부들의 경우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런저런 셈법이 작용하고 있겠지만, “어설픈 여권 실세가 오는 것보다 대통령의 반전 카드인 박지원 기용이 차라리 나을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조직논리가 작용하는 모양새다.
 
전직 고위 간부는 “정보기관의 경우 대통령의 신임이 확고하고 파워 있는 정치권 인사가 오는 걸 환영하는 게 대체적인 분위기”라고 귀띔했다. 온갖 풍파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국정원을 확실하게 커버해줄 수 있는 중량감 있는 정치인을 내심 원한다는 얘기다. 대통령과 독대 수준의 직접 소통이 가능해 이런저런 국정원 입장을 반영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원장 개인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조직을 지켜줄 든든한 울타리가 중요하다는 인식은 정권 교체 과정에서 국정원이 과도하게 외풍에 뒤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서 더욱 절실해졌다고 한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집권 시 국정원장들 대부분이 적폐수사의 칼날을 피해 가지 못하고 구속과 검찰 수사 등에 아직 시달리고 있는 상황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현 정부 들어 초대 국정원장을 맡았던 서훈 전 원장의 경우 내부 출신으로 3년 1개월간 수장 자리를 지켰다. 문 대통령의 신임이 두텁고 남북정상회담 개최 등 대북 문제와 관련해 국정원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데 기여했지만, 정무 감각이나 권력 내 파워는 미더운 수준이 되지 못했다는 평가다. 부족했던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박지원 신임 원장의 기용이 집권 후반기 국정원에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수용 가능 쪽으로 기울어진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박지원 국정원장 카드를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으로 보는 또 하나의 기류는 “디테일에 약한 인물이 더 낫다”는 반응이다. 국정원 내부 조직이나 활동을 잘 아는 사람보다 제대로 모르는 인사가 수장을 맡는 게 좋다는 얘기다.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이유

2003년 12월 당시 불법 대북송금에 연루된 혐의로 구속기소된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

2003년 12월 당시 불법 대북송금에 연루된 혐의로 구속기소된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

 
그런데 이 대목은 의문을 자아낸다. 박지원 내정자의 경우 정치권 내 대표적인 정보통으로 분류된다. 대북 문제뿐 아니라 검찰과 정부 주요 핵심 부처 내부의 상황이나 기류를 잘 꿰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겉으로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나름의 정보통이 곳곳에 포진해 있어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태 때도 딸의 표창장 사진 공개 같은 주목받는 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 국정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란 게 일반적인 인식이었고, 이런 배경이 가산점을 받아 국정원장 발탁으로 이어졌을 것이란 해석도 나왔다.
 
하지만 국정원 측 생각은 달랐다. 한 관계자는 “국정원이란 조직은 겉보기와 다른 매우 복잡다단하고 이해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군 고위 인사나 행정부에서 장악력이나 조직관리 등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온 인사가 원장을 맡는다 해도 업무 파악이나 제대로 된 권한 행사에 상당한 시일이 걸리거나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원장이나 정무직(차장이나 기조실장 등) 인사의 경우 대부분 어느 정도의 윤곽을 잡을 만한 시점에 자리를 내주고 떠나게 된다”고 지적했다. 박지원 카드도 이런 연장선에서 면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박지원 원장 내정자는 1992년 14대 국회에서 민주당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이후 주로 법제사법위원회와 정보위 위원을 맡았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2년 4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는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다. 특히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성사 과정에서는 밀사 역할을 맡아 대북 비밀접촉을 주도했다.
 
이 같은 경력은 국정원의 내부 문제를 의회 차원에서 감시·감독하고, 대북 접촉과 관련한 내밀한 부분을 직접 경험할 기회였을 수 있다. 하지만 국정원 전·현직 관계자들은 이런 대목을 근거로 박지원 내정자를 ‘국정원을 잘 아는 인사’로 부르거나 ‘원장 적임자’로 꼽는 건 무리라고 말한다. 공채를 거치거나 젊은 시절 입사해 국정원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도 조직의 폐쇄적 특성으로 인해 전반적인 구조나 작동 시스템을 잘 이해하기 힘든 상황에서 교포 기업가 출신의 정치인을 ‘국정원맨’으로까지 인식하는 건 난센스라는 것이다.
 
물론 박지원 국정원장 내정자에 대해 내곡동 구성원들이 환영 일색인 것만은 아니다. 그의 정치적 편향성이나 부적절했던 전력 등을 두고 이런저런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한 관계자는 “벌써 박지원이 인사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고 귀띔했다. 후임 차장이나 정무직 자리는 물론 국·실장과 지부장 등 핵심 고위직에 자기 사람을 앉히려 한다는 것이다.
 
국정원의 특성상 원장이 새로 부임하면 외부에서 자기 사람을 데려오거나, 동향·동문 등 편안한 인물을 측근으로 쓰거나 고위직에 발탁하려는 경향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정권 교체 때마다 영호남 갈등은 물론 살생부 소동까지 빚으며 내홍을 겪었던 트라우마가 있는 국정원에선 박 내정자의 행보에 걱정이 쏟아진다.
 
 

“대북 비밀송금은 국정원 역사에 가장 치욕적인 일” 주장도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때 자리를 함께한 당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때 자리를 함께한 당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

 
대북송금 특검 등의 과정에서 문제가 불거져 구속되는 등 전력이 있는 사람을 국정원 최고책임자로 쓰는 게 과연 맞느냐는 비판도 거세다. 송두환 특검팀은 2003년 6월 25일 수사 발표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현대 측이 북한에 보낸 4억5000만 달러의 돈은 대북경협의 대가이자, 정상회담과도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
 
특히 이 가운데 1억 달러는 김대중 정부가 북한에 주기로 약속했지만, 정부 요청으로 현대가 대신 지급한 것으로 밝혔다. 송금 당시 문화부 장관이었던 박지원 내정자는 2000년 3~4월 베이징 등지에서 송호경 북한 아태평화위 부위원장과 만나 관련 논의를 주도한 인물로 지목됐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2004년 3월 대북 송금이 2000년 남북정상회담 개최의 조건 중 하나였다는 점을 인정했다.
 
문제는 당시 비밀송금에 국가정보원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임동원 당시 원장과 핵심 간부들이 국정원 조직을 동원해 환전 편의를 봐주는 등 불법행위를 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특히 국정원이 현대상선의 산업은행 대출금 2억 달러를 북한에 보낼 때 국정원의 개입 사실을 감추려 송금자를 직원 개인의 이름으로 하는 등 불법을 저질렀다.
 
이 때문에 대북 전선의 최일선에 있다는 자부심으로 일해온 국정원 직원들을 김정일 사금고로 천문학적인 돈을 송금하는 도구로 사용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당시 국정원이 사법부 판단이 나오기 전까지 “송금 의혹과 무관하다”며 국민을 기만하고 사태를 호도한 상황에 대해서는 지금도 낯 뜨겁다는 말이 내부에서 나올 정도다.
 
국정원 간부 출신 인사는 “박지원씨가 북한과의 비밀접촉을 통해 기획하고 추진한 대북 비밀송금은 국정원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일 가운데 하나”라며 “그런 사람이 원장을 맡는다는 건 정말 위험하고 의심스러운 행동”이라고 말했다.
 
대북 비밀송금 과정에서 박지원 당시 장관의 부적절한 금전적 문제가 있어 옥고까지 치렀던 점은 두고두고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다. 통일부 전직 간부는 “당시 박지원씨의 문제가 된 처신은 송금 관련 환전 등을 담당하면서도 한 푼도 손을 대지 않은 임동원 원장의 모습과 대조되면서 특검 관계자와 관가에서 두고두고 회자했다”고 전했다.
 
박지원 원장 내정자의 이런 전력 때문에 벌써 국정원 본연의 임무 수행에서 이탈하거나, 퇴임 후 혹은 정권 임기를 마친 뒤 뒷감당하기 힘든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시각도 있다. 돈 문제를 둘러싸고 탈이 날지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건 그중 하나다.
 
국정원에서 일했던 최고위급 인사의 회고다. “원장이 한 달에 쓸 수 있는 업무추진비 성격의 돈이 5억원 정도 되더라. 기관 성격상 꼬리표나 영수증이 붙는 돈이 아니란 점에서 어지간한 절제력과 도덕성이 아니면 무너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잘못하면 공직생활이 끝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원세훈 전 원장의 비리 가운데 상당 부분도 이 돈을 흥청망청 썼고, 재직 기간도 4년에 이르다 보니 그 누적 금액이 컸기 때문이란 얘기도 나온다. 기관이나 부처 수장에 대한 제도적 감시나 민주적 통제가 제대로 이뤄지기 힘든 거의 유일한 대상이 국정원과 국정원장이란 점에서 박지원 내정자가 얼마나 절제된 모습을 보일 수 있을지 주목받고 있다.
 
 

“개혁 추진 적임자” vs “대북 편향 인사”

국가정보원 안팎에서는 박지원 원장 내정자에 대한 기대와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국가정보원 안팎에서는 박지원 원장 내정자에 대한 기대와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또 한 가지 우려가 제기되는 점은 정치 개입 논란 가능성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사태로 등장한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국정원은 댓글 사건 등 정치 개입 문제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문 대통령이 직접 나서 적폐청산의 대표적 대상으로 국정원을 꼽았고, 정권 출범 직후인 2017년 6월 ‘국정원 개혁발전위’가 출범했다.
 
개혁위는 같은 해 12월 활동을 마무리하면서 “다시는 정치 관여와 직권남용, 인권침해 소지가 발생하지 않도록 복무·조직 관리와 관련한 규정 및 지침 개정 같은 제도개선 방안을 자문했다”고 밝혔다. 국내 정보의 수집과 분석을 담당하던 2개 부서를 해체하면서 이 인력을 해외와 북한·방첩 등에 재배치하는 조치도 취했다.
 
문재인 정부 첫 국정원장인 서훈 원장 재직 3년 동안 정치 개입 등의 논란을 부른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이전 정권에서 벌어진 국정원 조직의 활동이나 원장의 지시가 ‘적폐’로 단죄되는 상황을 지켜봐야 했던 학습효과가 컸다. 여기에 내부 출신인 서 원장이 남북정상회담이나 북·미 회담 중재 역할 등에 치중하면서 국내 정치 개입 논란의 소지가 거의 없었다는 점도 한몫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 9단’으로 불린 박지원 원장을 맞는 국정원 내부에선 우려의 시각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자기 사람 챙기기 같은 인사 문제까지 불거질 경우 내부 불만이나 잡음이 내곡동 담장 밖을 넘을 공산도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물론 박 원장 내정자를 둘러싼 이런 우려 사항이나 관련 정보를 청와대 인사 관련 파트에서도 놓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정부와 호흡을 맞추기보다는 비판자 입장에 섰던 인물인 데다 정치·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자주 서왔던 만큼 국정원장으로서 적합하거나 혹은 부적절한 요소를 깐깐하게 따져봤을 것이란 측면에서다.
 
문재인 정부 들어 통과의례에 불과해졌다는 지적을 받고 있지만, 국정원장도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야 하는 자리다. 학력이나 재산·병역 같은 기본 사항뿐 아니라 술버릇이나 여자 문제까지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인사검증 과정에서 청와대 측이 별문제 없다고 판단했을 공산이 크다.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은 박지원 국정원장 내정자의 인사를 발표하면서 “국정원이 국가 안전 보장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도록 하는 한편, 국정원 개혁을 지속해서 추진해 국민에게 신뢰받는 정보기관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배경을 밝혔다.
 
하지만 야당의 시각은 이런 청와대 평가와는 확연히 다르다. 박지원 원장과 이인영 통일부 장관 내정, 서훈 국가안보실장 임명 등에 대해 주호영 원내대표는 “균형감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대북 편향 인사”라고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지금보다 더한 자세로 굴종적 대북 유화정책을 본격 추진하겠다는 폭탄선언”이란 말까지 나왔다. 무엇보다 대북비밀송금의 주역이란 점을 야당 측은 정조준하는 분위기다. “불법 대북송금에 관여했던 분이 대한민국 정보기관 수장이 됐다”(박진 미래통합당 외교·안보특위 위원장)며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다.
 
이 대목은 향후 부임 이후에도 박지원 원장의 발목을 잡고, 적잖은 비판과 시달림을 받게 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국정원 관계자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 성사 과정에서 김대중 정부에 의해 저질러진 비밀송금 사태에 국정원이 개입한 점은 아직도 큰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면서 “박지원 원장 체제에서 이 문제는 끊임없이 내곡동 구성원들을 괴롭히는 악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정은·여정 남매에 대한 靑 성의 표시?

6월 16일 폭파된 개성 공단에 위치한 남북연락사무소 건물. / 사진:조선중앙통신

6월 16일 폭파된 개성 공단에 위치한 남북연락사무소 건물. / 사진:조선중앙통신

 
이런 부정적 요소가 적지 않은 상황임에도 문재인 대통령은 ‘국정원장 박지원’이란 승부수를 걸었다. 그 배경을 둘러싸고 이런저런 관측이 나오는 가운데, 발탁 시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국정원장과 통일부 장관, 청와대 안보실장을 교체하는 문재인 정부 집권 후반기 외교안보팀 인사는 북한의 대남 위협·도발이 막 수그러든 7월 초 발표됐다. 북한은 지난 6월 초부터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을 앞세워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를 극렬하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탈북단체의 김정은 비난 대북전단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문 대통령의 북·미 대화 중재 실패에 대한 불만과 대북 제재가 이유였다.
 
‘말 폭탄’을 쏟아내던 김여정은 6월 16일 개성공단 내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는 파괴적 행태를 보였다. 청와대가 당시 정의용 안보실장과 서훈 국정원장을 대북특사로 파견하겠다고 제안한 내밀한 내용까지 폭로하며 북한 당국은 대남 압박을 가했다.
 
전방 지역에 북한 대남 확성기가 다시 등장하고, 문 대통령을 조롱하는 대남 전단 살포가 초읽기에 들어간 상황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등장했다. 그는 동생인 김여정 제1부부장과 군부 측이 주도하는 모양새를 보인 대남 위협·도발 조치를 ‘보류하겠다’(6월 23일, 노동당 중앙군사위 7기 5차 예비회의)고 선언했다.
 
박지원 국정원장 내정자 발표를 비롯한 청와대의 인사는 그로부터 열흘 뒤 나왔다. 익명을 요구한 국책기관 박사는 “북한의 6월 도발 공세가 수그러들고, 김연철 통일부 장관을 대북 전단 방치 책임을 물어 경질(외형상으로는 자진 사퇴)하는 남북 간 교감 속에서 박지원 국정원장, 이인영 통일 장관 카드가 나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 대북특사 제안까지 거부하고, 그 사실을 일방적으로 폭로하는 상황까지 치달았지만 결국 남북 양측이 비공개 채널을 통해 수습방안을 소통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그 결과 대북 채널을 새로 맡을 인물로 박지원 원장 내정자가 낙점되는 등 조율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전격적으로 이뤄진 박지원 기용은 첫째, 북한 핵심 지도부의 격앙된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작용을 했을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해 2월 하노이 북·미 회담이 성과 없이 끝나자 북한 당국자들은 “문재인 정부의 잘못된 중재로 우리 원수님(김정은을 지칭)이 큰 망신을 당했다”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대응책을 내놓지 않은 정의용 안보실장과 서훈 국정원장에 대해 북한 대남 라인은 ‘문재인 때리기’로 답했다. 정의용 실장의 퇴진과 박지원 전면 등장은 연락사무소 폭파라는 초강수를 들고 나온 김정은·여정 남매에 대한 청와대 측의 다소 때늦은 성의 표시일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의 첫 남북정상회담 산파역을 한 데다, 4억5000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대북송금을 통해 집단 아사와 체제붕괴 위기에 처했던 북한을 구원해준 박지원 내정자에 대해 김정은과 김여정도 호의적 입장을 갖고 있을 것이란 점도 고려됐을 수 있다.
 
둘째는 헝클어진 남북관계의 복원을 위한 모종의 역할을 할 가능성이다. 박지원 원장 내정자는 자타공인 ‘꾀주머니’라 할 수 있다. 권력의 기류나 정치권의 동향 등을 면밀히 살펴 적절한 시점에 선공 방안이나 대응책을 제시하는 등 뛰어난 책사로서의 면모를 보여왔다. 특히 대북 밀사 역할 등 남북관계에 관여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 정부뿐 아니라 북측을 향해서도 이런저런 조언을 해왔다.
 
통일부 당국자는 박 내정자에 대해 “대체로 북한의 입장 쪽으로 기울어진 모습을 보이는 게 사실이지만, 북한이 지나치게 나간다는 느낌이 확연해지면 김정은을 향해 ‘그것만은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해왔고, 북한이 귀담아듣거나 수용한 사례도 몇 차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이런 대목은 ‘박지원 발탁을 통해 뭔가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문 대통령에게 심어줬을 가능성이 있다.
 
셋째는 차기 대선까지 내다본 기용일 수 있다는 점이다. 박지원 내정자를 대북 문제에 한정해 쓸 요량이라면 굳이 논란을 무릅쓰고 국정원 수장에 앉히지 않아도 된다. 특보나 다른 역할을 맡겨 대북 밀사나 막힌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해결사로 쓸 수 있다. 임종석 전 비서실장을 특보로 기용한 것만으로 충분할 수도 있다.
 
 

신의 한 수일까, 최대 패착일까

그런데 박지원 국정원장 내정을 이 시점에 강행했다. 이를 두고 “대북 문제와 대선을 한꺼번에 잡아보라는 문 대통령의 특명이 내려진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남북관계 복원을 통해 ‘어게인 2018’을 실현함으로써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을 탄탄하게 끌어올리는 건 물론이고, 이를 정권 재창출로 연결할 능력을 보여 달라는 주문이다. 호남 맹주로서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박지원 내정자의 위상도 원장 내정에 가산점이 됐을 수 있다.
 
문 대통령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고, 비판적 입장에 선 인사를 발탁한 데 대해 논란이 이어지자 청와대는 “대통령은 지난 일은 개의치 않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선거 때 있었던 과거사보다는 국정원 미래를 생각한 것”(7월 5일 청와대 핵심 관계자)이란 설명이 나왔다. 대통령과 국정원장 내정자 사이에 과거지사를 놓고 틈이 있는 건 없고, 미래지향적 차원에서 인사가 이뤄졌다는 취지다.
 
사실 문 대통령과 박 원장 내정자는 오래전부터 껄끄러운 모습을 보여왔다. 박 내정자가 대북송금 특검법에 의해 수사를 받고 옥고를 치를 때 문 대통령은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다. 많은 이의 예상을 깨고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의 대북 비밀송금을 단죄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에 대해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핵심 참모들은 불만을 드러냈다.
 
2015년 민주당 당권 경쟁 과정에서 박 내정자가 문 대통령을 향해 ‘부산 친노’라며 몰아세운 것도 이런 쌓인 감정이 작용한 것이란 해석이다. 노무현 정부의 결정 때문에 김대중 정부의 대북 햇볕정책의 성과가 빛이 바랬고, 밀사 역할을 한 자신이 영어의 몸이 될 수밖에 없던 상황을 박지원 원장 내정자가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는 알기 어렵다.
 
문 대통령의 발탁에 박지원 내정자는 즉각 “역사와 대한민국,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님을 위해 애국심을 가지고 충성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대통령의 직속 기관이라 해도 무방할 국가 정보기관의 수장으로서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 수 있다. 그동안 각을 세워왔던 문 대통령이 자신을 신임해준데 대한 박지원식의 메시지일 공산도 크다.
 
하지만 4선 의원 출신에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권력 핵심과 주변부에서 내공을 키워온 박지원의 향후 행보에 대한 전망은 엇갈린다. 마지막 기회가 될지 모르는 공직을 국정원장이란 화려한 자리로 마무리하는 걸 일생일대의 축복이라 생각할 수 있다. 총선에서 낙선하고 방송을 전전하던 ‘논객 박지원’을 알아봐 준 문 대통령에 대한 감읍의 마음이 “충성을 다하겠다”는 말로 터져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영원한 책사’ 박지원이 또 다른 꿈을 꿀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북 문제나 차기 대선 이슈와 관련해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거나 나름의 방식으로 뭔가 일을 도모할 것이란 얘기다. 이럴 경우 문 대통령이나 현 여권과의 충돌·갈등 양상을 표출할 공산도 있다.
 
‘국정원장 박지원’ 카드가 문재인 정부에 신의 한 수가 될지, 아니면 정권 후반부 최대의 인사 패착 중 하나로 돌출할지 지켜볼 일이다.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북한전문기자 lee.youngj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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