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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 이덕일 "조선이나 지금이나 중산층 두터워야 부강한 국가"
백성호의 현문우답

이덕일 "조선이나 지금이나 중산층 두터워야 부강한 국가"

중앙일보 2020.07.24 00:50 종합 23면 지면보기
백성호 기자 사진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조선왕조실록 10권 시리즈 집필
태조, 과전법 공포해 토지개혁
태종, 종부법으로 양인 늘려
세종은 수령 고소한 백성 처벌

 “조선왕조실록은 과거학이지만, 한국 사회가 어디로 갈 지를 보여준다. 그 점에서 조선왕조실록은 미래학이다.”
 
20일 서울 마포구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에서 이덕일(59) 소장을 만났다. 그는 2년 전부터 『조선왕조실록』을 집필하고 있다. 지금껏 1ㆍ2ㆍ3권을 냈고, 2~3년 안에 시리즈 10권을 완간할 계획이다. 이 소장은 학맥과 인맥으로 강고하게 구축돼 있는 강단 사학과 국내 역사학계에 퍼져있는 식민사관에 맞서 ‘공개 토론’을 줄기차게 제안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역사관은 외면하고, 조선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가 만든 식민 사학을 대학 강단에서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역사학계의 카르텔을 깨려고 한다”고 비판하는 이 소장이 읽어낸 ‘조선왕조실록’은 어떤 걸까.
 
이덕일 소장은 "세종은 애민군주였다. 그런데 사대부의 이익과 백성의 이익이 충돌할 때 태종은 백성의 편, 세종은 사대부의 편에 섰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이덕일 소장은 "세종은 애민군주였다. 그런데 사대부의 이익과 백성의 이익이 충돌할 때 태종은 백성의 편, 세종은 사대부의 편에 섰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그는 먼저 태종과 세종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가 흔히 알던 태종ㆍ세종과 사뭇 달랐다. 이 소장은 “우리가 아는 태종에 대한 평가는 주로 양반 사대부의 평가였다. 당시 백성의 평가는 달랐다”고 지적했다.  
 
태종은 왕자의 난과 외척 척결 등으로 잔혹하다는 평가를 받지 않나.  
 
“태종과 세종의 결정적 차이는 ‘종부법(從父法)’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신분이 다를 경우 자식은 누구의 신분을 따를 건가의 문제다. 태종 이전까지는 종모법(從母法)이었다. 자유민인 양인(良人)과 노비 사이에 태어난 자식은 노비가 됐다. 노비는 양반의 재산이었다. 노비가 양인의 자식을 낳으면 재산이 그만큼 늘어나는 셈이었다. 태종은 종부법으로 개정했고, 양인과 노비 사이의 자식은 노비가 아니라 양인이 됐다.”
 
왜 신분제를 혁신했나.  
 
“건강한 사회, 튼튼한 사회가 어떤 건가. 마름모꼴 사회, 다이아몬드형 사회다. 어느 사회나 지배층과 하층민이 있지만, 둘 사이에 두텁고 탄탄한 중산층이 있어야 한다. 조선시대에는 그게 양인이었다. 양인은 세금도 내고, 부역도 하고, 국방의 의무도 있었다. 그들의 숫자가 많아야 한다.”
 
그건 요즘도 마찬가지 아닌가.  
 
 “물론이다. 하층민과 소외계층을 위한 복지정책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중산층이 많아져야 한다. 복지 혜택을 받아서 먹고 사는 것보다 자기가 직업을 가지고 부를 늘려나가는 중산층이 많아야 한다. 그래야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다. 현대 사회도 마찬가지다. 태종은 이걸 안 거다. 외척인 민무구ㆍ민무질 형제를 숙청할 때도 죄목이 수백 명의 양인을 자신의 노비로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이덕일 소장은 "태종 이방원이 있었기에 조선 왕조가 반석에 오를 수 있었다. 그 반석 위에서 세종이 꽃을 피웠다"고 설명했다. 장진영 기자

이덕일 소장은 "태종 이방원이 있었기에 조선 왕조가 반석에 오를 수 있었다. 그 반석 위에서 세종이 꽃을 피웠다"고 설명했다. 장진영 기자

 
이덕일 소장은 “인류사는 개인의 자유와 인간 사이의 평등을 끝없이 추구하는 역사였다. 계급이 처음 생겨나고, 국가가 처음 생겨난 이래 인류사는 줄곧 그래왔다. 조선 초기에는 이 두 부분에 있어서 굉장한 진전을 이루었다. 그 핵심이 태조 이성계의 토지 개혁과 태종 이방원의 신분제 개혁이었다”고 지적했다.  
 
토지 개혁은 어떻게 이루었나.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후에 고려의 모든 토지 문서와 개인의 토지 문서를 모아놓고 개경의 궁궐 앞에서 불을 질렀다. 그 불이 사나흘간 탔다고 한다. 그리고 1391년에 과전법을 공포했다. 소수의 권문세가에게 집중된 토지를 다수에게 나누어주는 토지개혁이었다. 그러자 백성들이 ‘왕씨가 임금이면 어떻고, 이씨가 임금이면 어떤가’라며 돌아섰다. 그런 태조도 신분제 개혁은 못했다. 이걸 태종이 했다.”
 
토지 개혁과 신분제 개혁, 이 둘로 나라의 기틀을 세운 건가.  
 
“그랬다. 세계사적으로도 봐도 그렇다. 당대에 조선만한 개혁을 이룬 나라가 없었다. 이 제도가 계속 갔으면 세계 어느 나라보다 법치가 실현되고, 불평등이 해소되는 앞선 나라가 됐을 것이다. 그런데 세종 때 다시 종모법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렇게 늘어난 노비들이 훗날 임진왜란 때 왜군편에 서서 조선군과 싸웠다. 노비의 삶에는 희망이 없었으니까.”
 
역사학자 이덕일 소장은 "태조의 토지개혁, 태종의 신분제 개혁이 계속 갔다면, 조선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법치가 실현되는 나라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역사학자 이덕일 소장은 "태조의 토지개혁, 태종의 신분제 개혁이 계속 갔다면, 조선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법치가 실현되는 나라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세종은 왜 다시 종모법으로 돌아갔나.
 
“태종이 세상을 떠나자 사대부들의 강한 로비가 있었다.  ‘아버지께서 만든 법이니 고칠 수 없다’고 거부하면 되는데, 세종은 그러지 않았다. 세종이 ‘나쁜 임금’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세종은 애민군주였다. 그런데 사대부의 이익과 백성의 이익이 충돌할 때는 사대부의 편에 섰다. 태종은 달랐다. 국가의 이익과 백성의 이익이 일치할 때 백성의 편에 섰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세종 2년에 만든 ‘수령고소금지법’이 대표적이다. 백성은 역모나 불법 살인이 아닌 한 수령을 고소할 수 없다는 법이었다. 만약 고소할 경우 해당 백성을 장 100대, 유배 3000리에 처했다. 그런데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부패하는 법이다. 요즘도 마찬가지다. 사방에서 비난이 들끓었지만, 세종의 해법은 악법 개정이 아니라 어사 파견이었다. 이 점에서 태종은 달랐다.”
 
태종은 어땠나.
 
“조선에서 등문고(신문고)는 태종이 처음 만들었다, 궁궐에서 소리가 들리는 위치에 등문고를 설치해 억울한 백성이 올라가 두드리게 했다. 이를 본 벼슬아치들은 법을 어겼다가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태종이 개국 공신들을 숙청한 것도 법 위에 존재하는 계층을 아예 없애기 위함이었다. 이를 통해 완전한 법치 국가를 이루고자 했다.”
 
이덕일 소장은 "조선 초기의 탄탄한 정치적 견제 시스템이 조선 후기에는 당쟁이 생기면서 퇴색했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이덕일 소장은 "조선 초기의 탄탄한 정치적 견제 시스템이 조선 후기에는 당쟁이 생기면서 퇴색했다"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이덕일 소장은 “조선은 정치적 권력의 견제 시스템이 매우 발달돼 있었다.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권력형 부정부패를 찾기 힘든 것도 이 때문이다”며 “심지어 청와대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에는 ‘복역(覆逆)’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임금의 명령이 부당하면 승정원에서 거부할 수 있었다. 이게 법적으로 보장된 권리였다”고 말했다.  
 
승정원에서 왕명을 거부할 수 있었다니 놀랍다.
 
“이뿐만 아니다. 조선에서 가장 센 기관이 사헌부와 사간원이다. 사헌부는 수사권이 있고, 사간원은 수사권이 없었다. 대신 양쪽 다 탄핵권이 있었다. 일단 탄핵을 하면 조정 대신은 무조건 사표를 내야 했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원인 대간의 역할은 쓴소리였다. 가령 시중에 소문이 파다한데 대간이 말 못하고 잠자코 있다. 그럼 ‘사론(士論ㆍ선비들의 여론)’에 저촉을 받았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가장 무서워한 건 사약을 받거나 유배를 가는 게 아니었다. 사론에 저촉되는 것이었다. 그럴 경우 사대부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비 정신’이라는 게 있었다. 요즘은 어떤가. 청와대 참모나 정부 부처의 장차관에게 그런 ‘선비 정신’이 있을까.”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역사학자 이덕일 소장이 말하는 시대정신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의 좌, 우 레지스탕스는 나치 독일에 맞서 싸웠다. 종전 후 좌파는 사회당을 만들고, 우파는 국민전선을 만들었다. 진보와 보수, 모두 나치와 싸웠던 이들이었다. 그래서 둘 사이에 톨레랑스(관용)가 작동한다. 종전 후에 나치 부역자들을 가장 강력하게 처벌한 건 좌파가 아니라 우파 국민전선이었다.  
 
 
한국도 좌ㆍ우파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백범 김구 등 우파 민족주의자와 박헌영 등 좌파 사회주의자, 그리고 아나키스트 등이 있었다. 그런데 이 세 세력은 해방 공간에서 모두 제거되었고, 현재 한국의 보수, 진보 중 이들을 계승한 세력은 없다. 미래통합당의 뿌리가 자유당이라면 민주당의 뿌리는 한민당 아닌가? 어느 쪽도 ‘친일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권이 바뀌어도 식민사학이 해체되기는커녕 더욱 강고해지는 현상은 이 구조 때문이다. 진보진영은 김영삼ㆍ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친일 문제를 일정 부분 희석시켰지만 아직 완전하지 않다. 노태우 정권은 토지공개념을 비롯한 경제민주화, 4대신도시, 북방정책,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등으로 한국 보수진영이 나갈 길을 제시했는데, 지금 보수 진영은 이 모든 것을 다 폐기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선거에서 참패한 거다.  
 
한국 사회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이루었다. 그 결과 훨씬 중층화된 사회가 되었다. 더 이상 민주 대 반민주의 이분법적 구도가 주도하는 사회가 아니다. 이제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가진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해야 할 때가 되었다. 우리 사회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새로운 어젠다를 던지고, 그걸로 국민의 지지를 얻고 새로운 정치를 펼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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