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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시민사회란 무엇인가

중앙일보 2020.07.23 00:15 종합 23면 지면보기

시민사회의 핵심인 자율성을 찾아서

그라픽=최종윤

그라픽=최종윤

독일의 문예비평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20세기 전반 파리의 쇼핑 아케이드를 거닐면서 유럽의 현대에 대해 생각했다. 소비자의 욕망을 한껏 자극하는 물건들로 가득한 아케이드에서 벤야민은 현대인이 갖는 집착적인 물욕과 그것이 갖는 몰정치성에 대해 생각했다. 21세기 전반 반바지를 입고 서울의 변두리를 거닐면서 한국의 현대에 대해 생각한다. 동네마다 하나둘씩 꼭 있는 건강원과 개소주 집을 보며, 한국인이 갖는 강박적인 건강욕과 그것이 갖는 정치성에 대해 생각한다.
 

비판과 견제의 기능을 하기 위한
시민사회의 핵심은 자율성에 있어
민주화 시대 시민사회의 과제는
정치적 소수자에게로 확장돼야

0723 생각의공화국

0723 생각의공화국

한국은 과로에 젖은 사회다. 지친 사람들은 휴양지 빌라 발코니에서 해안선을 바라보며 천천히 맥주를 마시고 튀김을 폭식하면서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고 그저 조물주를 원망하다가 저절로 잠드는 생활을 동경한다. 그러나 현실의 해가 뜨면 너도나도 앞다퉈 출근해야 한다. 정도 이상으로 과로하다 보니, 심신 양면으로 보양식을 찾게 된다. 마음의 보양식을 찾아, 어려운 인생에 쉬운 답을 주는 소위 사회적 멘토의 강연장에 간다. 육체의 보양식을 찾아, 고성능 영양제를 찾고 동네 건강원을 방문한다. 절제되고 균형 잡힌 섭생과 규칙적인 운동이 장기간 축적된 끝에 마침내 찾아오는 은은한 활력을 기다릴 여유는 대개의 한국 사람들에게 없다. 꾸준한 마음의 잔근육 단련을 통해 정교한 생각의 힘을 얻을 여유는 상당수의 한국 사람들에게 없다. 바쁘고 지친 사람들은 몇 번의 인문학 강연과 몇 번의 보약으로 심신의 건강을 쟁취해야만 한다. 스트레스로 정신의 방광이 터져나가는 상황에서 한 입 베어 물면, 좁아터진 방광을 떠나는 오줌처럼 스트레스가 배출되고, 또 한 주를 살아갈 정력이 샘솟게 되는 보양식을 먹어야만 한다. 한국에 성행하는 많은 자칭 멘토의 강연과 건강원과 개소주 집은 후다닥 진행된 한국의 ‘근대화’ 과정을 닮았다.
 
0723 생각의공화국

0723 생각의공화국

한국은 정치에 젖은 사회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거대 담론을 멀리하고 소소한 삶의 디테일에 집중하는 일본 드라마의 주인공들과는 거리가 멀다. 사람들은 편의점 앞 파라솔 아래서 양념치킨을 뜯으면서 최근에 자살한 정치인들과 헌법재판소의 정치적 판결과 차기 대선후보에 대해서 거품을 물고 의견을 교환한다. 다들 정치에 지극한 관심이 있지만, 밑바닥부터 차곡차곡 경험을 쌓아 정치권에 입성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다 선거철이 오면 갑작스레 새로운 피 수혈이 시작된다. 장기간에 걸쳐 양성되어 온 정치인 후보군이 없다 보니, 선거에 급성 효력을 발휘할 정치적 보양식을 찾게 된다. 가물치·흑염소·개소주를 파는 건강원을 찾아가는 것처럼 시민단체·대학·법조계의 유명인사를 찾아가 손을 내민다. 정치적 보약 하나 주세요. 절제되고 균형 잡힌 섭생과 규칙적인 운동이 장기간 쌓여 마침내 찾아오는 정치적 건강을 기다릴 여유는 한국 정치에 없다. 체계적인 의제의 발굴과 담론의 성숙을 통해 정치적 근력과 지구력을 얻고자 할 여유는 한국 정치에 없다. 이제 이슈 몰이와 대상의 악마화를 통해 정치의 모멘텀을 얻어야 한다. 악마가 없으면 악마를 만들어야 한다. 상대를 악마화한 뒤 악플과도 같은 비난을 퍼붓고 나면, 마치 정치적 위기가 극복되고 새로운 정치적 동력이 샘솟기나 할 것처럼. 한국의 정치 동학은 국가 주도로 후다닥 진행된 한국의 ‘근대화’ 과정을 닮았다.
 
오랜 기간 잘 다져진 정치 인력의 토대가 없는 한국 정치의 가건물 속으로 많은 시민단체와 비정치권 인사들이 꾸준히 이동해갔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정의기억연대의 대표로부터 갑작스럽게 세상을 등진 서울시장에 이르기까지, 그 리스트는 길고 길다. 이러한 패턴이 지속되고 강화되면서 정부와 시민단체의 성격 구분이 모호해지고, 그에 따라 시민단체와 시민사회의 존재의의에 대해 새삼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한때 시민사회는 인간이 자연 상태(state of nature)를 떠나 건설해낸 사회 질서 그 자체를 의미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강력한 권력을 가진 정부가 등장하자, 그 정부와 일정한 긴장을 이루며, 견제와 감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비정부 시민단체의 역할에 점차 주목하게 되었다. 시민단체가 그러한 공적 역할을 제대로 해내려면, 세속의 정치 질서에 첨예한 관심을 기울이되 정부의 권력과 영향에 포섭되지 않는 자율성이 중요하다. 정부의 재원에 의존하지 않아도 될 경제적 자원과 시민들의 에너지를 끌어낼 수 있는 조직적 역량과 자신의 정체성을 뒷받침할 공적 가치의 수호가 필수적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과거 한국의 군사정권은 비판적 시민사회를 억압하기는 했지만, 역설적으로 현대 한국 시민사회의 산파에 가깝다. 군사정권 하에서 이루어진 경제성장은 정부의 통제 밖에서 유통될 수 있는 경제적 재원을 만들어냈다. 그 재원을 토대로 형성되고 성장한 한국의 부르주아와 농민들이 자식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었고,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새로운 세대 안에서 국가폭력을 자행하는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의식이 자라났다. 도저히 저 부도덕한 군사정권의 일부는 될 수 없다! 군사정권이라는 정치적 ‘절대악’이 존재했기에, 시민사회는 그처럼 분명하게 비판적 대오를 정비할 수 있었다.
 
군사정권이 종식되고 이른바 민주화의 시대가 왔다는 것은 과연 한국 시민사회에 축복이었을까. 그것은 축복보다는 저주, 아니 새로운 도전이 아니었을까. 지금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해주던 ‘절대악’으로서의 타자가 사라지자, 시민사회는 군사정권이 사라진 텅 빈 벌판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숙고해야만 했다. 그 숙고가 무르익기도 전에, 그 텅 빈 벌판 속으로 시민단체의 활동가들이 정치권으로 진입하였다. 민주화 이후 정치 세력의 이러한 수혈과정을 통해, 시민단체는 역설적으로 비판과 견제의 기존 목표를 잃어버리고 새삼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군사정권이 사라진 지금, 우리는 무엇을 비판하고 견제해야 하는가.
 
비판의 목표가 희미해진 한편, 시민단체의 일원이었던 이들이 정부로 유입되면서, 시민단체는 보다 쉽게 정부의 재정 보조를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꼭 공무원 수가 증대해야 정부의 힘이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비정부 단체에 대한 정부의 보조금이 늘어날수록, 그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은 강화된다. 예컨대, 정부 보조금이라는 지렛대가 있기에 한국의 교육부 장관은 대학 총장들을 일제히 모아 놓고 새로운 대학 정책과 교육의 ‘뉴노멀’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할 수 있다. 재정을 충분히 확보한 미국의 사립대학들이 트럼프 정부의 명령에 집단 저항을 감행하여 정부 명령을 철회시킨 것과 같은 모습은 한국 사회에서 상상하기 어렵다.
 
마음의 습관 또한 쉽게 바뀌지 않는 법. 정부의 일원이 됨에 따라 그 자신 시민사회의 견제와 감시의 대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구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도덕적 지렛대를 쥐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외부에 존재하는 명징한 ‘절대악’을 과거에 타도했다는 자신감만으로는 도덕의 지렛대가 유지되지 않는다. 이제 정부 권력의 일부가 되어버린 자신의 비판과 성찰을 위해서는 정부의 의지와 독립해서 존재하는 보편가치에 호소해야만 한다. 역사적으로 권력자에게 보편가치에 근거한 자기성찰의 덕목이 요구되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완벽한 자기성찰은 성인(聖人)의 일이다. 정치가가 성인이 아니라면, 견제와 균형의 제도적 틀 속에 자신을 위치시켜야 한다. 국가가 표방하는 정상성(正常性)의 외부에 존재한 이들과의 긴장 속에서 자신의 도덕성을 실험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민사회의 변경(邊境)은 정부를 향해 확장되기보다는 정치적 소수자에게로 확장되어야 한다.
 
반바지를 입고 서울의 변두리 건강원을 어슬렁거리던 중년은 건강원 광고판을 소리 내 읽어본다. 흑염소·가물치·장어·붕어·잉어·미꾸라지·달팽이·닭발…. 아니 언제부터 닭발이 가물치와 흑염소의 반열에 든 것인가. 배즙·양파·호박·포도·양배추·사과즙·야채즙·선인장. 아니 언제부터 선인장이 야채의 반열에 든 것인가. 이제 곧 무말랭이, 만두피, 빛이 좋지 않은 개살구, 탄 고기, 형장의 이슬, 용두사미도 보약의 반열에 들겠지.
 
21세기 초 한국, 사회단체 활동가들이 정치가가 되기를 꿈꾸듯이, 모든 식재료는 보약이 되기를 꿈꾸는가. 모든 것이 보약이 된 나머지, 마침내 보약이 사라지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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