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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플] “대박날 때까지 못참는다” 노조 속출하는 IT·게임업계

중앙일보 2020.07.22 06:00
카카오게임즈가 지난 2월 인수한 엑스엘게임즈에 노동조합이 생겼다. 민주노총 전국화학섬유식품노조(화섬노조) 산하 5번째 IT 노조다. 

 

무슨 일이야?

· 엑스엘 리부트, 판교에 새로 생긴 노조. 지난 14일 민주노총 화섬노조카카오지회 엑스엘게임즈분회가 설립됐다고 밝혔다. 

· 노조 위원장인 진창현(42) 분회장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게임업계 고질적 문제인 고용불안과 부당한 근로조건을 해결하겠다”고 말했다.  
 
지난 14일 경기 성남시 판교 테크노밸리 엑스엘게임즈 본사 앞에서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수도권지부 IT위원회가 선전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 화섬노조 홈페이지]

지난 14일 경기 성남시 판교 테크노밸리 엑스엘게임즈 본사 앞에서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수도권지부 IT위원회가 선전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 화섬노조 홈페이지]

이게 왜 중요해?

IT·게임 업계가 노동조합 확장기에 들어섰다는 신호일 수 있다. 
· 국내 대형 게임사 한 관계자는 “네이버나 넥슨처럼 이미 성공할만큼 성공한 회사에 노조가 생긴 것과는 결이 좀 다르다”고 말했다. 이어서 “엑스엘게임즈는 벤처로 시작해 아직 충분히 꽃을 피웠다고 보긴 어려운데 여기에도 노조가 생길 정도로 판교 분위기가 달라진 걸 느낀다"고 말했다.
· 엑스엘게임즈는 ‘달빛조각사’,‘아키에이지’ 등을 개발한 중견 게임사다. 리니지를 만든 스타 개발자 송재경 대표가 2003년 세웠다.
· 이 회사의 지난해 매출은 356억원, 직원 수는 430여 명. 개발력을 인정받고 있지만 앞서 노조가 생긴 네이버 (매출 6조 5934억원, 직원 수 3434명), 카카오 (3조898억원, 2534명), 넥슨(2조 6840억, 5210명), 스마일게이트(8873억원, 2000여명)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작다.
· 조혁진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한 산업군 내 성공한 대기업에서 처음 노조가 생기고 이를 통해 근로조건 개선의 성과를 본 동종업계 직원들이 줄줄이 노조를 세우다 중소기업까지 확장되는 게 일반적인 노조 확산 과정”이라며 “노동조합 불모지였던 IT·게임업계도 이제 노조 확장기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전엔 무슨 일이… 

IT업계 첫 노조는 1976년 생긴 한국후지쯔노동조합. 2018년 네이버가 노조를 만들기까지 한국마이크로스프트, 한국오라클 등 외국계 IT기업을 제외하고는 노조가 없었다. 
잦은 이직, 짧은 근속연수: IT업계는 프로젝트 단위로 일하다 보니 이직이 잦다. 지난해 9월 분기보고서 기준 주요 IT·게임 기업 20곳의 평균 근속연수는 4.16년. 지금 다니는 곳에서 투쟁해 뭔가를 얻어내기보다 이직을 통해 더 많은 연봉을 받고 근로조건을 개선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짧게 일하다보니 직원들끼리 연대하는 노조활동이 활성화되기 어려웠다.
약한 ‘파업’의 힘: 노조가 활성화되려면 가장 강력한 수단인 ‘파업’에 힘이 실려야한다. 하지만 생산라인을 멈추면 큰 차질이 생기는 제조업체와 달리 IT분야는 서비스가 굴러가고 있다면 파업을 해도 회사에 치명적 피해는 없다.
 
2017년 이후 결성된 IT산업노동조합.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2017년 이후 결성된 IT산업노동조합.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그런데 요샌 노조를 왜 만들어?

① 2030 직원 “야근이 당연한 시대는 지났다"
·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아 ‘오징어잡이 배’,‘등대’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IT업계는 강도 높은 근로조건으로 유명했다. 몇 달간 집에 가지 않고 개발했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떠돈다. 하지만 세상이 달라졌다.  
· 대형 게임사 개발자인 엄모(39) 씨는 “예전엔 다 같이 고생해 대박 한번 내보자는 인식이 강해 야근을 당연시했다”며 “하지만 워라벨 욕구가 강한 젊은 개발자가 많아지면서 야근을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는 쪽으로 기류가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② 수직적 조직문화
· 20여 년 전 지금의 IT업계를 일군 주요 IT·게임사 대표들은 50대 중년이 됐다. "형·동생"하며 함께 고생하고 성공을 꿈꾸던 문화도 옛말. 기업이 커지면서 경영 효율성이 중요해지고, 고용주와 근로자 간 관계도 수직적으로 바뀌었다. 경영진과 직원 사이의 소통도 이전보다 단절됐다.  
· 엑스엘게임즈 진창현 분회장은 “지난달 경영진이 프로젝트가 중단됐다며 내가 속해있는 팀 80여명에게 희망퇴직을 받는다는 통지를 보냈다”며 “희망퇴직을 원치 않는 직원은 어떻게 하냐고 물었지만, 답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매번 비슷한 일들이 반복돼 부당하다고 생각해도 개인이 대응하기가 너무 어려웠다”며 “그래서 노동조합을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③ '노조 생긴 옆 회사' 학습효과
· IT업계에 노조가 설립된 지 2~3년이 지나자, '변화가 일어났다'는 공감대가 확산됐다. 근로시간이 줄고 포괄임금제가 폐지되는 곳들이 생겼다. 
· 조혁진 부연구위원은 “노동조건의 향상을 직접 지켜본 이들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작은 회사에도 노조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며 “게임회사 직원 출신 국회의원이 등장하는 등 노조 편에서 연대해 줄 ‘기댈 언덕’이 늘어난 것도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엑스엘게임즈 노조가 원하는 것

지난 6월 성남시청에서 열린 IT노동자간담회. 네이버, 카카오, 넥슨, 스마일게이트 노조 지회장이 참석했다. [사진 성남시청]

지난 6월 성남시청에서 열린 IT노동자간담회. 네이버, 카카오, 넥슨, 스마일게이트 노조 지회장이 참석했다. [사진 성남시청]

고용안정과 근로조건 개선이다.  
· 진창현 분회장은 “회사가 사정이 어려워 정리해고를 해야 한다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줘야 한다”며 “10년 넘게 일한 사람에게 한 달치 월급을 위로금으로 주고 나가라 하는 건 너무 하지 않냐”고 말했다. 이어 “네이버나 카카오 같은 큰 회사처럼 많은 걸 요구할 생각은 없다”며 “그래도 야근수당을 주지 못하면 보상휴가라도 제대로 쓸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 엑스엘게임즈는 “노조설립을 존중하고 성실히 교섭에 임하겠다”고 밝혔다.  

 

앞으로는

청년층 직원이 많은 업계 특성상 노조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 국내 중견 게임사 한 관계자는 “노조 설립은 시대적 흐름”이라며 “극심한 노사갈등 등 기존 노조의 부정적 영향을 줄이고 근로조건을 개선해 나가는 균형점을 맞추는 게 중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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