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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시시각각] 페미니스트 대통령의 배신

중앙일보 2020.07.22 00:56 종합 30면 지면보기
양성희 논설위원

양성희 논설위원

한때는 명망 있는 인권변호사, 시민운동가였다. 대선후보로 거론되는 3선 서울시장이었다. 그런 그가 4년간 비서를 성추행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음란 문자와 사진을 보내고, 집무실 안 침실에서 신체 접촉을 했다. 운동 후 땀에 젖은 속옷 심부름도 시켰다. 서울시 성인지 감수성의 상징으로 내세워 온 ‘젠더특보’를 자신의 성 비리를 수습하는 자리로 끌어내렸다. 성추행 피소로 극단적 선택을 하기 한 달 전 박원순 시장은 시 간부들과 직장 내 성폭력 예방 교육을 받았다. 자기 분열에 가까운 이중적 행보다.
 

박원순의 죽음, 여권 대응 더 문제
여가부 침묵, 여가위 통폐합 추진
여성 시민 대표 정치적 자격 있나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오거돈 전 부산시장 등 여권 지자체장들이 성폭력으로 줄줄이 낙마하는 것을 보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워낙 일상처럼 중독돼 멈추지 못했든지, 아니면 자신은 들키지 않으리라 자신했든지, 아니면 자신의 행위는 추행이 아니라고 믿었든지 셋 중 하나거나 셋 모두일 것이다. 특히 스스로 정의의 화신이라 도덕성을 과신하며 모든 행동을 정당화했을 가능성(나는 성추행 같은 나쁜 짓을 할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권력과 지위에 대한 하급자의 순응을 자신의 성적 매력에 대한 호감으로 왜곡했을 가능성이 있다(피해자도 좋아하는 줄 알았다). 이미 기득권임에도 자신을 ‘권력에 대한 안티 테제’로 여기는 진보 여권의 특성도 있다. 권력의 병폐는 늘 상대방의 것이지 내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가 세상에 없기에 진실은 알 길 없지만, 그의 지지자들은 일제히 피해자를 공격한다. 피해자가 억하심정으로 박원순을 곤경에 빠뜨렸다고 2차 가해를 한다. “혹 시장님은 사랑을 한 게 아니었을까요”란 레퍼토리도 있다. 만약 그랬다면, 혹은 억울한 사정이 있다면 그는 마땅히 살아서 증명했어야 한다. 그의 선택이 사건의 본질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누군가의 말처럼 “박원순을 죽게 한 것은 박원순 자신”이고 “성폭력을 저지르는 건, 들키고 나면 죽고 싶을 만큼 X 팔리는 일”일 뿐이다.
 
사건도 사건이지만 여권과 ‘페미니즘 정부’의 대응은 더 실망스럽다. “성추행 의혹에 대한 당의 대응”을 묻는 기자에게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예의가 아니라며 버럭하고, ‘XX자식’이라 폭언했다. 김두관 의원은 지자체장 성폭력 방지책으로 단체장 집무실 침대 없애기, 유리 벽 설치를 제안했다. 가해자(단체장)의 왜곡된 성인식, 억압적 위계 구조가 본질인데 엉뚱한 집무실 타령이다. 여비서를 남비서로 바꾸자는 ‘펜스룰’도 고개를 든다. 여비서를 조선시대 몸종 다루듯 한 게 문제지 여비서는 잘못이 없다. 사건 초기 민주당 여성 의원들이 보여준, 진영을 위한 정치연대는 놀라울 정도다.
 
주무부처인 여성가족부엔 차라리 폐지하란 국민 청원이 쏟아진다. 마지못해 입장을 내놓기까지 묵묵부답으로 일관해 여성가족부 아닌 ‘여당가족부’라는 힐난이 나왔다. 안희정 미투 1심 판결 때 피해자 지지 성명을 냈다가 대변인이 경위서를 썼고, 이후 몸을 사린다는 얘기가 많다. 앞서 오거돈은 물론이고 손정우 미국 송환 불허, n번방 사태 등 현안에 대해 일절 침묵 중이다.
 
이 와중에 민주당은 ‘일하는 국회법’(국회법 개정안)의 일환으로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여가위)의 통폐합을 추진하고 있다. 겸임위인 여가위 대신 문화체육관광여성가족위원회를 구성해 젠더 현안을 상시 논의한다는 건데, 여가위를 상임위로 격상해도 모자랄 판에 폐지·편입이라 반대 여론이 들끓는다. 효율과 내실을 기한다지만 여성 이슈의 실종, 전문성·상징성 훼손이 불 보듯 뻔하다.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은 “(박원순 이후) 민주당의 행태는 과거 미래통합당보다 더 퇴행적”이라며 “여가위 폐지를 추진하는 민주당은 여성 시민을 대표할 자격도, 정치할 자격도 없다”고 비판했다. 한편 자칭 ‘페미니스트 대통령’은 고위 공직자의 잇따른 성폭력에 단 한 번 유감 표명 없이 가해자들의 빈소에 조화를 보내 깊이 애도했다. 배신도 이런 배신이 없다.
 
양성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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