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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정치, 판사

중앙일보 2020.07.22 00:38 종합 29면 지면보기
박진석 사회에디터

박진석 사회에디터

“내가 정말 닉슨의 꼭두각시라고 생각하나.”
 
1969년 10월 29일 워런 버거 미국 연방대법원장이 호통을 쳤다. 흑백 분리교육을 고수하는 학교들에 대해 만장일치의 “분리교육 즉각 철폐” 판결을 끌어낸 직후였다. 보수 성향의 버거 대법원장은 대법원 색깔을 바꾸기 위해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선택한 회심의 카드였다. 하지만 취임 후 처음 내놓은 이 판결은 행정부와 임명권자를 당황하게 했다. “닉슨의 꼭두각시가 아니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입증했다”는 재판연구관의 ‘아부’에 호통으로 응수한 건 그런 평가의 부당함을 입증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실제 ‘버거 대법원’은 임신 중절을 합법화한 ‘로 앤 웨이드’ 판결 등 역사에 남을 만한 진보적 판결들을 속속 내놓아 보수 세력의 낯빛을 어둡게 했다. 특히 워터게이트 사건 때 특별검사가 내린 도청 테이프 제출 명령의 정당성을 인정해 닉슨 사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버거 대법원장이 권력에 대한 법관의 태도와 관련해 모범 사례로 자주 인용되는 이유다.
 
최근 한국 법원의 일부 결정들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대법원은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TV 토론회에서 허위 발언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도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중시해 무죄 취지로 파기 환송했다. 물론 그가 여당 소속이라는 이유만으로 권력 영합형 판결이라 단정하는 건 섣부르다.
 
그런데도 판결 순수성을 100% 옹호하기 힘든 건 누적된 판사들의 정치적 행보 탓이다. 판결 거래 의혹의 장본인인 양승태 대법원 구성원들, 그들을 공격해 얻은 명성을 무기 삼아 의원 배지를 단 판사들이 대표적이다. ‘보은 판결’ ‘공천 기대 판결’ 가능성에 대한 의심이 없다면 도리어 이상할 법한 상황이다.
 
전 채널A 기자에 대한 구속 결정도 목록에 새로 추가할 만하다. 구속 여부 판단은 고유 권한이라 해도 “검찰, 언론의 신뢰 회복을 위해 구속 수사가 불가피하다”고 강조하면서 특정 정당 대변인을 방불케 한 대목은 간과하기 어렵다.
 
법이 판사 개개인을 독립 헌법기관으로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만큼, 판사는 ‘정치적 중립’ 가치에 대해 가장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는 이가 돼야 한다. ‘최종 심판자’가 누군가의 꼭두각시 노릇을 한다고 비판받는 건 국가 차원에서도 불행한 일이겠기에 하는 말이다.
 
박진석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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