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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선 '성범죄 묵살' 배상 6000억…韓선 4000만원에도 놀랐다

중앙일보 2020.07.20 14:00
고한석 전 서울시장 비서실장이 15일 서울 성북경찰서에서 박원순 서울시장 사망 관련 참고인 조사를 마친 뒤 청사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고한석 전 서울시장 비서실장이 15일 서울 성북경찰서에서 박원순 서울시장 사망 관련 참고인 조사를 마친 뒤 청사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6000억원.'
 

서울시 성추행 묵살 의혹, 美선 징벌적 처벌받는 중대범죄

2018년 미국 미시간주립대가 미국 체조대표팀 전 주치의 래리 나사르에게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 332명에게 지급하기로 약속한 손해배상액이다. 나샤르는 징역 360년형을 받았지만, 그의 고용주였던 미시간주립대는 성범죄 피해자의 신고를 묵살한 혐의에 대한 별도의 책임을 졌다. 
 
파산보호 신청을 한 미국체조협회도 올해 초 피해자들에게 성범죄 신고 묵살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2500억원의 합의금을 제시했다. 하지만 피해자의 법률 대리인인 존 맨리 변호사는 "체조 선수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구조적 변화없는 합의금은 피해자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처사"라며 거절했다.
 
래리 나사르 전 올림픽 미국 체조대표팀 주치의(왼쪽)과 존 엥글러 미국 미시간주립대 총장대행 [연합뉴스]

래리 나사르 전 올림픽 미국 체조대표팀 주치의(왼쪽)과 존 엥글러 미국 미시간주립대 총장대행 [연합뉴스]

미국과 박원순의 사례  

갑자기 미국 사례를 꺼낸 건,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과 관련해 서울시도 '성추행 신고' 묵살 혐의로 고소를 당했기 때문이다. 서울시 관계자들은 직무유기 혐의로 고발도 당했다. 
 
미국에선 성범죄 신고가 실제 묵살됐다면 앞선 사례처럼 징벌적 손해배상을 한다. 범죄 자체를 매우 무겁게 본다는 뜻이다. 한국은 어떨까.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없어, 법원에서 혐의가 인정돼도 높은 배상액이 나오긴 어렵다. 성범죄 피해자들이 가해자를 넘어 자신이 속한 기관에 책임을 묻는 경우도 드물어 판례도 흔치 않다. 주영글 변호사(법무법인 숭인)는 "성범죄 피해자는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벅찬 것이 현실"이라 말한다. 
 
서울시 의혹과 관련해 연결될 수 있는 성범죄 관련 기관 배상과 책임자의 직무유기에 대한 두 건의 판례를 찾아봤다. 각 판례는 2017년과 2018년에 나왔다. 법조계에선 '흔치 않은 판결'이란 평가를 받았던 판결들이다. 
 
지난해 10월 정계선 부장판사는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징역 15년에 벌금 130억을 선고하던 모습. [연합뉴스]

지난해 10월 정계선 부장판사는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징역 15년에 벌금 130억을 선고하던 모습. [연합뉴스]

MB 1심 판사의 '성추행 손해배상' 판결 

정계선(연수원 27기) 부장판사는 2018년초 사내의 상습 성추행 사실을 보고 받고도 가해자에게 경고 조치만 내린 회사에 가해자와 공동으로 4000만원의 배상 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해당 판결은 원고가 항소했지만 기각됐고 상고심 없이 확정됐다. 그는 같은 해 이명박 전 대통령의 1심 재판장을 맡아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지방법원의 한 현직 판사는 "가해자를 넘어 가해자를 감독하지 않은 회사에 대한 책임을 물은 기억에 남는 판결"이라 말했다. 미국과 달리 배상액이 수천만원에 불과했지만 법조계에선 '이례적'이란 평가가 나왔다. 박 전 서울시장의 피해자가 서울시에 성범죄 대처 소홀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할 경우 정 부장판사의 판례가 적용될 가능성이 있다. 
 
13일 오후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 전화에서 열린 서울시장에 의한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에서 피해자 대리인 김재련 변호사(오른쪽 두 번째)가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13일 오후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 전화에서 열린 서울시장에 의한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에서 피해자 대리인 김재련 변호사(오른쪽 두 번째)가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교장의 성추행 직무유기 판결 

서울시 관계자들이 성추행 피해 사실을 묵살한 혐의로 고소된 직무유기 사건과 관련해 참고할 판례는 2017년에 나왔다. 서울의 한 고등학교 교장은 소속 학교의 교사가 여학생을 성추행했다는 사실과 그 증거로 동영상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책임자로서 신고를 하지 않아 1심(남현 재판장)에서 직무유기 혐의가 인정됐다. 
 
해당 교장은 성범죄 예방교육을 실시했다고 주장했지만 '충분한 대처'로 인정되지 않았다. '서초동의 김앤장'이라 불리는 LKB파트너스의 이광범·김종근 대표 변호사가 사건을 맡았지만 대법원의 판단도 원심과 똑같았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실종 당일인 지난 9일 오전 10시44분 서울 가회동 공관을 나서고 있다(오른쪽 사진). 왼쪽 사진은 고한석 전 비서실장이 박 전 시장과 면담 후 오전 10시10분 시장 공관을 나서는 모습. 두 사람은 이날 오후 1시39분 마지막 통화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CCTV 캡처]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실종 당일인 지난 9일 오전 10시44분 서울 가회동 공관을 나서고 있다(오른쪽 사진). 왼쪽 사진은 고한석 전 비서실장이 박 전 시장과 면담 후 오전 10시10분 시장 공관을 나서는 모습. 두 사람은 이날 오후 1시39분 마지막 통화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CCTV 캡처]

직무유기 적용의 높은 문턱 

전·현직 판검사들은 서울시 관계자들의 '직무 유기' 혐의의 경우 위 판례처럼 깔끔한 유죄가 인정되긴 쉽지 않은 사례라 보고있다. 수사 결과를 지켜봐야겠지만 주변 동료에게 성추행 피해를 전달하고 호소해 묵살당한 것만으로 범죄 성립은 어렵다는 주장이다. 
 
한 전직 검사는 "감사관실과 같이 성범죄 신고를 받으면 처리할 의무와 직무가 있는 책임자가 신고를 묵살하지 않는 이상 직무유기 적용은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수도권에 근무하는 한 현직 부장판사는 "피해자의 주장대로 4년간 지속적 성추행이 이뤄졌고, 이를 오랜기간 서울시가 묵살했다면 범죄 성립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이 사건이 기소돼 법원으로 온다면 성범죄 신고 묵살에 관한 새로운 판례가 나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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