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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 황희의 반전 사생활, 그는 간통·뇌물수수 범죄자?

중앙일보 2020.07.19 16:00
한 인물에 대해 평가한다는 것은 간단치 않은 일입니다. 누구든지 일생의 족적에서 명과 암을 남기기 마련이니까요. 최근 박원순 서울시장과 백선엽 장군의 죽음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 기억에 따라 혹은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공과뿐 아니라 그가 연루된 범죄 혐의에 대한 판단 여부도 달라지기도 합니다.
과거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날 존경받는 역사적 인물이지만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면 이들에 대한 예상 밖 기록들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픽댓]히스토리

 

청백리? 매관매직의 달인? 황희를 둘러싼 논란

조선 건국 이래 최고의 재상이라고 평가받는 황희는 태종·세종·문종까지 3대 왕을 보좌했습니다. 이름 옆에는 정승이라는 직함이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그는 영의정만 18년을 맡았습니다. 
 
“경은 세상을 다스려 이끌 만한 재주와 실제 쓸 수 있는 학문을 지니고 있도다. 모책(謀策)은 일만 가지 사무를 종합하기에 넉넉하고, 덕망은 모든 관료의 사표가 되기에 족하도다.” (『세종실록』 10년 6월 25일)
 
황희 영정 [중앙포토]

황희 영정 [중앙포토]

황희는 청빈하고 인자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멍석만 깐 허름한 집에 된장·고추장밖에 없는 걸 본 세종은 “일국의 정승이 어찌 이런 누추한 곳에 사느냐”며 황희에게 새집을 줬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또 노비의 아이들이 뛰어놀며 수염을 잡아당겨도 귀여워했다는 등의 동화 같은 이야기도 잘 알려졌지요.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황희에 대한 ‘판타지’를 부술만한 내용이 적지 않습니다. 간통·뇌물수수·살인범은닉·친인척 비리 등 다양한 부정부패와 얽혀있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죠. 또, 대사헌 시절엔 승려로부터 뇌물로 금을 받아 ‘황금대사헌’이라고 불렸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세종 10년 그가 사직서를 냈을 때, 사관이 남긴 평입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도 많지 않았는데, 집안에서 부리는 자와 농막(農幕)에 흩어져 사는 자가 많았다. 정권을 잡은 여러 해 동안에 매관매직하고 형옥(刑獄)을 팔아 (뇌물을 받았으나)…그의 심술(心術)은 바르지 아니하니, 혹시 자기에게 거스르는 자가 있으면 몰래 중상하였다.” (『세종실록』 10년 6월 25일)
 
국가기록원, '세종실록 10책 31권' 공개   [연합뉴스]

국가기록원, '세종실록 10책 31권' 공개 [연합뉴스]

실록에 적힌 졸기에도 “관후(寬厚)하고 침중(沈重)하여 재상(宰相)의 식견과 도량이 있었으며, 풍후(豊厚)한 자질이 크고 훌륭하며 총명이 남보다 뛰어났다”는 평과 함께 “청렴결백한 지조가 모자라서 정권(政權)을 오랫동안 잡고 있었으므로, 자못 청렴하지 못하다(簠簋)는 비난이 있었다”는 평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간통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박포(朴苞)의 아내가 죽산현(竹山縣)에 살면서 자기의 종과 간통하는 것을 우두머리 종이 알게 되니, 박포의 아내가 그 우두머리 종을 죽여 연못 속에 집어넣었는데 여러 날 만에 시체가 나오니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현관(縣官)이 시체를 검안하고 이를 추문하니, 박포의 아내는 정상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여 도망하여 서울에 들어와 황희의 집 마당 북쪽 토굴 속에 숨어 여러 해 동안 살았는데, 황희가 이때 간통하였으며, 포의 아내가 일이 무사히 된 것을 알고 돌아갔다.”(『세종실록』 10년 6월 25일)
 
박포는 ‘제2차 왕자의 난’의 주역인데, 사실 여부를 떠나 이런 내용이 사관에 의해 실록에 기록된 것은 충격적인 일입니다. 다만 이에 대해선 논란이 있습니다. 단종 즉위년 7월, 김종서·황보인·정인지 등은 『세종실록』에 실린 이 내용에 대해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여부는 아직 확실히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감독 허진호)에서 세종대왕(한석규)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감독 허진호)에서 세종대왕(한석규)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이 외에도 황희는 사위의 살인을 무마시키고자 청탁도 하고 뇌물도 줬다는 내용이 실록에 나옵니다. 사위 서달이 “양반인 자신에게 예를 갖추지 않았다”며 인사를 안 하고 지나간 아전을 붙잡아 때려죽이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황희는 이를 무마하려고 맹사성을 찾아가 피해자 가족과의 중재를 부탁하고, 돈을 주며 합의를 시도했습니다. 결국 서달의 노비가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사위는 풀려났습니다. 세종은 이 사건을 알게 되자 영의정 황희와 우의정 맹사성을 파면시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복직시켰습니다. 
 
황희가 각종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명재상의 이미지로 각인된 것은 이렇게 성군으로 불리는 세종의 절대적 신임을 얻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즉, 황희를 비판하자니 그를 오랜 기간 중용한 세종까지 건드리게 되니 일종의 딜레마에 처하게 되는 것이죠. 물론 황희가 명재상으로 불린 데는 3명의 국왕에게 중용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점도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오성과 한음은 무능했다?  

정파적 해석에 따라 인물의 평가가 180도 뒤바뀌는 일도 있습니다.

오성과 한음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항복과 이덕형의 사례가 대표적인데요. 일단 '선조실록'에 기록된 이항복에 대한 평가를 보면 어떻게 이런 극악한 인물이 고위직에 오르냐며 분개하는데 우리가 알던 오성과 한음에 대한 이미지와 매우 다릅니다.
 
"기축 역옥(己丑逆獄) 때 독살스러운 정철(鄭澈)과 함께 악한 일을 자행하였다. 사류(士類)를 모두 살해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의 참독(慘毒)함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는데도 지위가 태정(台鼎)에까지 이르렀으니, 시사(時事)를 알 만하다." (『선조실록』 33년 1월 16일)
 
백사 이항복 [연합뉴스]

백사 이항복 [연합뉴스]

이덕형에 대한 기록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친상을 당했는데 봉급에 대한 욕심 때문에 나와서 일을 했다며 사람의 도리를 찾아볼 수 없다고 비난하고 훈련도감에 있을 때는 군수물자를 맘대로 가져다 써가며 자신의 집까지 지었다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덕형이 모상(母喪)을 당한 뒤에 이조판서에 기복(起復)되어 정청(政廳)에서 버젓이 행공(行公)하고 흑색 천익 차림으로 늘 정사에 참여하였다. 난리중에 군무로 말미암아 기복하였다면 그래도 댈 핑계가 있겠지만 덕형의 경우는 이록(利祿)을 탐내어 이렇게 나왔으므로 사람의 도리를 다시 찾아볼 수 없다. 훈련도감 제조로 있을 적에는 도감을 사고(私庫)로 삼아 날마다 쌀과 베를 가져다 썼고 또 남대문 밖에 사사로이 큰 집을 지었는데 병조의 군사로 공공연히 터를 닦게 하고 별영(別營)의 재목을 가져다 썼다.” (『선조실록』 39년 1월 22일 )  

 
당시 이항복은 서인, 이덕형은 남인에 속했습니다. 반면 『선조실록』은 이들과 적대적인 북인들이 광해군 집권한 뒤 썼습니다, 그러니까 북인들의 시각에서 이들에 대한 평가는 매우 부정적으로 그려진 것이죠.
 
그래서 인조반정 후 북인 정권이 무너지면서 『선조수정실록』이 쓰여집니다. 이 때 기존 선조실록의 내용이 많이 뒤집어졌습니다. 두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조실록』의 내용을) 살피건대 덕형과 항복은 모두 어진 재상으로서 세상에서 기대하는 것이 컸기 때문에 기자헌과 이이첨의 무리가 무척이나 시기하여 반드시 그들을 모함할 계략을 꾸미려 했으나 적당한 구실을 찾지 못하자, 마침내 근거도 없는 얼토당토않은 사실을 가지고 마음대로 비방하고 욕하면서 사책(史冊)에 기록한 것이다.…소인배들이 매우 심하게 미워하고 있지도 않은 일을 날조하여 마침내는 동악상제라고까지 하였으니 통탄하고도 남을 일이다. (『선조수정실록』39년 1월 1일)   
 
『선조실록』에서 두 사람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것을 놓고 북인인 기자헌과 이이첨의 무리가 시기하고 모함하려고 했으나 적당한 구실을 찾지 못하자 근거도 없는 얼토당토않은 사실을 지어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또, 『선조실록』의 특징 중 하나는 남인의 리더였던 유성룡에 대한 부정적 내용이 많은 점인데요. 그래서 유성룡이 천거한 이순신에 대해서도 평이 박하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중 하나로 이순신의 최후에 대한 내용을 꼽기도 합니다.
 
이순신이 죽기 전 남긴 ‘내가 죽었다는 말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라는 말은 『선조수정실록』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또 명나라 장수 진린이 이순신의 죽음을 듣고 놀라 의자에서 떨어져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는 등 매우 구체적인 묘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영화 '명량'의 한 장면 [사진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명량'의 한 장면 [사진 CJ 엔터테인먼트]

“좌우(左右)가 부축하여 장막 속으로 들어가니, 순신이 말하기를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하고, 말을 마치자 절명하였다. 순신의 형의 아들인 이완(李莞)이 그의 죽음을 숨기고 순신의 명령으로 더욱 급하게 싸움을 독려하니, 군중에서는 알지 못하였다. 진인이 탄 배가 적에게 포위되자 완은 그의 군사를 지휘해 구원하니, 적이 흩어져 갔다. 진인이 순신에게 사람을 보내 자기를 구해 준 것을 사례(謝禮)하다 비로소 그의 죽음을 듣고는 놀라 의자에서 떨어져 가슴을 치며 크게 통곡하였고, 우리 군사와 중국 군사들이 순신의 죽음을 듣고는 병영(兵營)마다 통곡하였다. 그의 운구 행렬이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이 모두 제사를 지내고 수레를 붙잡고 울어 수레가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선조수정실록』 31년 11월 1일)
 
반면 『선조실록』에는 이순신의 최후에 대해 제대로 쓰여 있지 않고, 죽은 뒤로부터 20일 지난 때쯤 '이순신이 전사했으니 후임을 보내달라'는 명나라 측의 요청을 인용하면서 처음 기록합니다.  
 
"방금 군문 도감 낭청이 군문의 배첩(拜帖)을 가지고 문틈으로 와서 말하기를 ‘군문이 즉시 본부를 내려 유 제독(劉提督)과 동 제독(董提督)은 군사를 거느리고 함께 부산으로 모이게 하고 진 도독(陳都督)도 또한 부산으로 따라가게 하였다. 그리고 이순신(李舜臣)은 전사하였으니 그 대임을 즉시 차출하여야 한다. 명령을 듣고 가야 하니 어떤 사람으로 차출할 것인지에 대하여 내일 날이 밝기 전에 성명을 기록해 가지고와서 고하라.’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31년 11월 24일)
 
물론 『선조실록』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자료가 충분히 모이지 않은 상황에서 만들어지다 보니 누락된 기록이 있기도 했지만, 이순신 정도의 인물에 대한 최후를 스쳐 지나가듯 기록한 것은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점입니다.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의 영정과 유골함이 지난 1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을 마친 뒤 박 시장의 고향인 경남 창녕으로 이동하기 위해 운구차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의 영정과 유골함이 지난 1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을 마친 뒤 박 시장의 고향인 경남 창녕으로 이동하기 위해 운구차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15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故백선엽 장군 안장식. 프리랜서 김성태

15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故백선엽 장군 안장식. 프리랜서 김성태

최근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 백선엽 장군의 사망을 놓고 이에 대한 평가와 애도가 진영에 따라 혹은 정파에 따라 엇갈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입장에 따라 과보다는 공을, 혹은 공보다는 과를 더 부각하는 것이죠. 심지어는 이런 입장에 따라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까지 가해지면서 많은 우려가 나오기도 합니다. 
한편 장지 논란까지 벌어진 백선엽 장군의 경우엔 집권 세력이 바뀌면서 그에 대한 예우나 평가가 180도 바뀌는 모습도 나타났습니다.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엇갈릴 수 있겠지만 정치적 이해 관계에 맞춰 과도하게 이용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유성운·김태호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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