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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현장에 묻다] 회장님은 오늘도 직원들 세뇌하느라 정신이 없다

중앙일보 2020.07.17 00:35 종합 26면 지면보기

40대에 창업해 글로벌 1위 화장품 ODM 기업으로 키운 코스맥스 이경수 회장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월급쟁이 생활 20년, 그리고 회사 경영 28년.
 

AI, 선택 아닌 생존 문제 불구
반발 연구원 설득에 1년여 노력
직원·회사 방향 같아야 성과 나
“같이 가는 길이 가장 빠른 길”

매출 2조원이 넘는 세계 1위 화장품 ODM(제조업자개발생산) 기업으로 성장한 코스맥스 창업주 이경수 회장(74)의 지난 인생을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이 회장은 아무 산업기반도 없는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 그야말로 무(無)에서 유(有)를 일궈낸 고(故) 이병철(삼성)·정주영(현대) 같은 창업 1세대나, 혹은 세상에 막 태동하기 시작한 IT기술을 먼저 받아들여 단숨에 이전 세대가 일군 부를 뛰어넘은 이해진(네이버)·김범수(카카오) 같은 인터넷벤처 1세대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한국에 또 하나의 창업 신화를 써내려가고 있는 인물이다.
 
창업 시기도, 배경도, 업종도 모두 다르지만 다른 창업가들과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오랜 직장생활 덕분에 임직원들 마음을 제대로 헤아릴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약대(서울대 약학과) 졸업 후 제약회사(동아제약) 세일즈맨과 광고대행사(오리콤) AE를 거쳐 다시 전공을 살려 제약회사(대웅제약)로 돌아가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던 마흔여섯의 나이에 창업한 그는 월급쟁이 출신 경영자답게 남다른 경영 스타일로 직원과 소통하며 회사를 급성장시켜왔다.
 
이 회장이 요즘 꽂혀있다는 AI(인공지능)를 회사에 도입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AI 도입은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라면서도 이 회장은 직원들을 다그치며 밀어붙이지 않았다. 내 마음이 절박하다고 성급하게 강행하는 대신 모두의 이해를 구하는 지난한 과정을 밟고 있다. 연구실과 붙어있는 판교이노밸리 집무실에서 이 회장을 만나 이런 선택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다음은 일문일답.
 
경기도 판교 코스맥스 본사 7층 벽면에 있는 ‘코스맥스 컬러 맵’ 앞에 선 이경수 회장. 로레알처럼 코스맥스 역시 연구소 이름을 R&D(연구개발)가 아니라 R&I(연구혁신) 센터로 지었다. 이 건물 4, 6, 7, 8, 9 등 5개 층을 연구실로 쓰고 있다. 최정동 기자

경기도 판교 코스맥스 본사 7층 벽면에 있는 ‘코스맥스 컬러 맵’ 앞에 선 이경수 회장. 로레알처럼 코스맥스 역시 연구소 이름을 R&D(연구개발)가 아니라 R&I(연구혁신) 센터로 지었다. 이 건물 4, 6, 7, 8, 9 등 5개 층을 연구실로 쓰고 있다. 최정동 기자

AI에 관심이 많다던데.
“우선 내가 생각하는 화장품업계의 세 가지 핵심 키워드, 그러니까 소비자·스피드·글로벌 얘기부터 해야겠다. 앞으로 화장품 업계는 수없이 많은 브랜드가 쏟아지면서 소량, 더 나아가 소비자별 개인 맞춤 시대로 갈 수밖에 없다. 지금은 대량생산 제품을 사지만 앞으로는 단가는 좀 올라가더라도 내 피부에 딱 맞는 제품을 주문 제작하는 방향으로 트렌드가 바뀔 것이다. 그런 니즈를 맞추기 위해선 스피드가 관건이다. 화장품 처방(원료 배합 등)에 걸리는 시간이 지금은 빨라야 3~6개월, 완전히 신제품인 경우 1년 넘게 걸리기도 한다. 피부 진단 후 당장 제품을 받기를 원하는 소비자들한테 그렇게 오래 기다리라고 할 수는 없다. 만약 지금처럼 한정된 수의 연구원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일이 처방을 짜는 게 아니라 AI가 대신 하도록 처방 시스템을 바꿀 수 있다면, 그리고 이를 전 세계적인 공급망에 적용하면 어떨까. AI에 대한 관심은 이렇게 시작했다.”
 
직원들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나.
“전혀. 오히려 처음엔 다들 자기 밥그릇 떨어져 나가는 줄 알고 펄쩍 뛰더라. 우리 회사 연구원들은 처방이 연구실 밖으로만 나가도 큰일 나는 줄 아는데 아예 처방을 AI에게 시킨다고 하니 당연히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다.”
 
반발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였나.
“아니다. 전통적 생산방식에서 AI 기반 제조로 방향을 틀려면 핵심 인력인 연구원들을 반드시 설득해야 한다. 나 혼자 아무리 중요성을 강조해봐야 그게 먹히나. 그래서 1년 전부터 한양대 김창경 교수(과학기술정책학과)를 회사로 초빙해서 한 달에 두 번씩 강의를 듣고 있다. 당초 1년 계획이었는데 최근에 1년 더 연장했다. 한마디로 세뇌하는 거다. 기초부터 같이 공부했다. 이제 임원 레벨은 얼추 AI 도입의 필요성에 대해 동의를 한다. 연구원 설득은 더 어렵지만 처음보다는 상당히 진척이 됐다고 본다.”
 
AI가 사람을 대체할 수 있다고 보나.
“사람과 AI가 다른 지점이 창의성이라고들 하는데, 사실 창의적 영역으로 여겨지던 소설·그림·작곡도 이미 AI가 하는 세상이다. 심지어 냄새도 맡는다. 와인의 떫은맛도 소믈리에보다 더 정확히 구별해낸다고 한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사람이 했던 건 전부 다 AI가 더 잘할 수 있다는 얘기다. AI보다 앞서려면 이제껏 안 한 걸 해야 한다. 연구원의 역할도 그렇게 달라져야 한다. 이런 정도 인식수준까지는 왔다. 바둑 AI가 프로 기사들 실력을 키워주듯이 AI를 조수로 쓰고 플러스알파의 다른 일을 하라고 얘기한다. 대체는커녕 더 필요하다. 앞으로 웬만한 처방은 AI가 하는 세상이 올 텐데, 우리가 손 놓고 있으면 다른 회사에 선점당한다. 우리가 경쟁사보다 먼저 빨리 가야 하지 않나.”
 
본사 회장 집무실에 있는 창업 초창기 이경수 회장의 흑백 사진.

본사 회장 집무실에 있는 창업 초창기 이경수 회장의 흑백 사진.

경쟁은 치열하고 갈 길은 먼데 내부 직원 설득에 1년을 허비했다.
“결코 허비가 아니다.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최종 목적지까지 가는 길은 이게 더 수월하다. 가장 효율적이고 빠른 길이다. 내가 진심으로 동의해서 일할 때와 위에서 시켜서 억지로 할 때 내는 결과는 천양지차다. 직원과 회사의 나가는 방향이 일치할 때 비로소 큰 힘을 발휘한다. 큰 결정이라면 합심해서 해 나가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준비 기간을 두면 결과에 도달하는 과정이 짧아진다. 거꾸로 준비 기간이 없으면 과정이 오래 걸린다. 어떤 방식을 취해도 결국 시간은 필요하다. 먼저 쓰느냐 나중에 쓰느냐의 선택인데, 먼저 쓰는 게 비효율적으로 비치지만 그게 맞다.”
 
웬만한 오너라면 추진력 운운하며 강행했을 텐데. 월급쟁이 출신이라 달랐을까.
“글쎄. 직원들 마음을 더 잘 아는 건 사실이다. 아는 걸 나쁘게 이용하면 해롭지만 좋게 활용하면 직원에게 이롭고 결과적으로 회사에도 이로운 정책을 결정할 수 있다. 가령 코로나19 사태 때 정부 방침보다 더 선제적으로 재택근무를 결정하고 근무시간을 조정한 것처럼. AI 도입에 앞서 같이 공부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단 전제조건이 있다. 큰 방향 전환을 앞두고 직원 설득 작업을 하는 동안 회사는 너무 늦지 않도록 할 수 있는 필요한 것을 사전에 미리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시대 흐름에 뒤처지지 않는다.”
 
코스맥스는 AI 관련 어떤 준비를 하고 있나.
“그건 대외비다. 다만 최고 전문가가 이미 6개월 이전부터 우리 회사에 들어와서 함께 일하고 있다고만 말하겠다. 우리 혼자 힘으로는 버겁다. 다행히 한국엔 뛰어난 AI 전문가가 적지 않다. 그런 외부 힘과 합쳐 협업하고 있다.”
 
혹시 올해 서울대에 50억원의 연구개발비를 지원하기로 한 것도 그 일환인가.
“서울대 프로젝트와는 별개다. 서울대의 모든 단과대 교수들로부터 같이할 수 있는 연구 과제 지원을 받아 그중 20개를 추려 프로젝트 진행 중이다. 흔히 화학공학과 같은 곳과의 산학협동을 생각하는데 전자·기계, 심지어 미대 교수가 전 세계인의 피부색을 연구하는 작업 등 다양한 주제를 망라한다.”
 
코스맥스의 산학협동이나 AI 도입 등의 행보에 로레알의 영향이 있나.
“맞다. 처음엔 세계 1위 화장품 기업인 로레알의 앞선 시스템을 우리가 일방적으로 배웠지만 지금은 서로 배우는 관계다. 로레알은 연구소 이름부터가 기업들이 통상 쓰는 R&D(연구개발)가 아니라 R&I(연구혁신)일 정도로 혁신적인 생산방식에 투자를 많이 하는 회사다. 코스맥스는 2014년 로레알의 4번째 파트너(매출 규모)로 올라섰고 지금은 중국 기업과 1, 2위를 다툰다. 이 과정에서 로레알의 오픈 디벨로프먼트 시스템 도움을 많이 받았다. 1년 6개월에서 2년 걸리던 신제품 개발 기간이 이 시스템 도입 후 6~9개월로 단축됐다. 일종의 로레알 맞춤형 사전준비 시스템이다. 이런 경험을 해보니 AI 제조방식 선점이 얼마나 중요한지 더욱 크게 깨닫게 됐다.”(※코스맥스는 로레알 그룹 브랜드인 이브생로랑, 슈에무라를 비롯 전세계 600여 개 고객사가 있다.)
 
요즘 청년실업이 심각하다. 창업을 권하나.
“직장을 구할 것인가, 창업을 할 것인가 보다 우선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라고 말하고 싶다. 직장을 다니고 있다면 현업을 충실히 해서 실력을 먼저 인정받고 신뢰를 쌓아야 (창업) 기회가 왔을 때 좋은 파트너를 구해 사업에도 성공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젊은이들은 꼰대 같은 발언이라고 하지만.”
 
최근 장남에 대표이사 자리를 물려줬다. 오너 경영 체제로 가는 건가.
“한국 기업도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서구 기업처럼 점점 주주는 주주로만 남고 경영은 경영을 잘하는 사람이 하는 그런 시절이 올 거라고 본다. 그런데 일본에서 볼 수 있듯이 전문경영인 체제로 가다 문제가 있으면 오너가 등판하기도 한다. 주주냐 아니냐보다 결국 주인의식이 문제다. 제아무리 유능한 전문경영인이라도 주인의식 없이 재임기간 동안 성과를 내겠다고 적절한 투자를 안 한다면 회사가 제대로 굴러가겠나. 자기는 굶더라도 미래를 위해 준비할 건 한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질문에 답하자면, 아직은 모르겠다. 시대 흐름에 맞춰 오너 체제로, 혹은 전문경영인으로도 갈 수 있다고 열어놓고 있다. 중요한 건 누가 하더라도 세계 최고의 화장품 연구소가 돼야 한다는 점이다. 세상이 바뀌고 유통이 바뀌어도 꼭 필요한 건 연구개발 실력이고, 그것만은 포기할 수 없다.”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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