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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흠결 100개, 우린 1개도 안돼" 울분쏟은 박원순 지지자

중앙일보 2020.07.16 05:00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영결식이 치러진 지난 13일 오전. 지지자들의 눈물을 뒤로 하고 박 전 시장의 영정과 운구가 서울시청사 정문을 통해 들어갔다. 장례 행렬 끝에 남겨진 시민들은 내리는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청사 앞에서 남았다. 정문 유리벽에는 그간 분향소를 다녀간 시민들이 남긴 노란 포스트잇이 붙었고 바닥에는 꽃다발이 놓였다. 울음 소리가 한 동안 계속됐다.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의 영결식이 열린 13일 오전 서울시청 앞에서 한 시민이 절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의 영결식이 열린 13일 오전 서울시청 앞에서 한 시민이 절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울음은 어느 순간 분노에 찬 고함으로 변했다. 한 지지자는 “우리는 흠결이 하나만 있어도 안되느냐”며 “저쪽은 10개, 100개, 1000개가 있는데 우리는 하나만 있어도 안되는 것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보수 진영은 훨씬 도덕적 결함이 많아도 별 문제 없지만 진보 진영 인사는 문제 하나만 터져도 큰 화를 입는다는 얘기로 들렸다. 격앙된 나머지 목소리가 쉬었다. 다른 지지자는 “(박 전 시장을 상대로 낸 성추행) 고소장 내용을 확인도 안 하지 않았느냐. 가짜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박 전 시장 운구를 향해 “적폐가 없는 곳으로 가십시오”라고 외치는 지지자도 있었다.

[현장에서]

 
이들이 말한 저쪽·적폐는 한 곳을 가리킨다. 박 전 시장의 정치적 반대 그룹인 보수 진영이다. 장례식 날 나타난 진영 논리는 박 전 시장의 분향소가 설치됐던 지난 주말에도 계속됐다. 박 전 시장의 한 지지자는 지난 12일 성추행 의혹을 제기하는 시민을 향해 “간도특설대에 복무하며 아녀자를 학살한 백선엽 장군에 대해서는 '미투'를 거론하지 않으면서 왜 박 전 시장만 걸고 넘어지느냐”는 논리를 펼치기도 했다.
13일 오후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 교육관에서 '서울시장에 의한 위혁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이 열렸다.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변호사(오른쪽 두 번째)가 박원순 시장이 고소인에게 보냈다는 비밀대화방 초대문자를 공개하고 있다. 현장기자단.

13일 오후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 교육관에서 '서울시장에 의한 위혁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이 열렸다.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변호사(오른쪽 두 번째)가 박원순 시장이 고소인에게 보냈다는 비밀대화방 초대문자를 공개하고 있다. 현장기자단.

하지만 지난 13일 오후 피해자 측 기자회견을 통해 제기된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의혹 내용은 가볍지 않았다. 피해자 A씨의 변호사와 지원단체는 기자회견에서 “A씨는 4년여에 걸쳐 박 전 시장에게 지속해서 성추행을 당했고 그의 도움 요청에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다”며 “(피해자가) 마치 시베리아 벌판에 혼자 서 있는 것 같았다”고 전했다. 서울시 내부에서는 “시장은 그럴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말만이 돌아왔다고 한다.
 
이중잣대를 들이대는 건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2018년 1월 29일 서지현 검사가 검찰 내 성추행 문제를 폭로했을 당시 더불어민주당 여성 의원 9명은 24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현직 여검사의 용기 있는 '미투'를 응원한다”며 “성추행 사건뿐 아니라 검찰 수뇌부가 지위·권력을 이용해 가한 부당한 인사 불이익과 사건 은폐 여부를 반드시 밝혀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서는 움직임이 늦었다. 박 전 시장이 성추행 혐의로 경찰에 고소됐다는 소식은 사망 당일인 9일 밤 알려졌지만 민주당 여성 의원들은 닷새가 지난 14일에야 입장을 냈다. 이재정, 송옥주, 남인순 의원 등은 “피해 호소 여성에 깊은 위로의 마음을 전하며, 재발 방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반드시 밝혀내야 한다”고 했던 때와는 어조에 다소 차이가 있다.
민주당 이해찬 대표가 1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얼굴을 만지고 있다. 임현동 기자.

민주당 이해찬 대표가 1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얼굴을 만지고 있다. 임현동 기자.

2차 가해 논란도 일었다. 평소 박 전 시장을 존경했다고 밝힌 진혜원 대구지방검찰청 부부장검사는 13일 페이스북에 박 전 시장과 팔짱을 끼고 찍은 사진을 올리고 “냅다 달려가서 덥석 팔짱을 끼는 방법으로 추행했다”며 “페미니스트인 제가 추행했다고 말했으니 추행이다”고 주장했다. A씨의 고소 내용이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박 전 시장 사망 다음날만해도 성추행 의혹에 대한 취재기자 물음에 욕설로 답한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사망 엿새가 지난 15일에야 “국민에게 송구하다”고 사과했다.
 
추정컨대 박 전 시장의 일부 지지자들에게는 ‘우리는 반대 진영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인식이 강한 듯하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과 달리 선악(善惡)은 자신이 속한 진영이나 흠결 개수에 따라 결정되는 건 아니지 않을까. 설사 반대 진영의 흠결이 많다 하더라도 박 전 시장을 둘러싸고 제기된 성추문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영결식 하루 전 박 전 시장을 조용히 조문하고 나온 한 지지자의 말이 인상적이다. 그는 “9년간 청년임대주택, 반값 등록금 등 서민들을 위한 정책을 추진해 온 박 전 시장을 존경한다”면서도 “공(功)은 공대로, 과(過)는 과대로 평가돼야 한다. 피해자에게 용서할 기회를 줬어야 했다”고 말했다. 1988년 박 전 시장이 창립 회원이었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은 “박 전 시장은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를 최초로 대리한 변호사였다”며 “박 전 시장의 명예가 박 전 시장의 행동을 미화하거나 피해자에 대해 비난하는 것에 있지 않다”고 말했다. 비상식적인 힐난도 위험하고 도를 넘는 미화도 금물이다. 차분하게 ‘진실의 시간’을 기다려보는 게 어떨까.
 
허정원 기자 heo.jeong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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