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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범의 문화탐색] 지금, 다시 민중미술을 묻는 까닭은

중앙일보 2020.07.16 00:27 종합 27면 지면보기
최범 디자인 평론가

최범 디자인 평론가

“공공미술은 민중미술의 비판적·저항적 성격을 이어나가되, 저항의 주체로부터 책임의 주체로, 집단적 주체로부터 자율적 개인의 상호작용으로서의 시민사회의 미술로 발전해나가야 한다. 민중미술이 민중을 주체로 삼은 미술이었다면 공공미술은 시민을 주체로 삼는 미술로서 한국 사회가 ‘저항적 근대화’를 넘어서 ‘주체적 근대화’로 나아가는 매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때 민중미술과 공공미술은 단절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일정한 연속성을, 그 한국적 특수성 속에서의 변증법적 운동으로 포착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국 사회의 변혁과
민중미술의 등장
‘역사 주체성의 위기’가
낳은 민중미술 40년
여전히 진보적인가

지난 6월 25일과 26일 양일간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주최로 열린 ‘지금 여기 왜 민중미술인가?’ 심포지엄의 발표에서 나는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내게 주어진 주제는 ‘민중미술과 공공미술’이었다. 나는 주체라는 측면에서 이 주제에 접근했다. 민중미술은 민중을 주체로 내세운 저항의 미술이고 공공미술은 시민을 주체로 하는 시민사회의 미술이라고 본 것이다. 그럴 때 민중미술과 공공미술의 관계는 비록 비대칭적이고 불연속적이지만, ‘민중에서 시민으로’라는 주체의 진화를 그 속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가 주최한 ‘지금 여기 왜 민중미술인가?’ 심포지엄.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가 주최한 ‘지금 여기 왜 민중미술인가?’ 심포지엄.

이 심포지엄은 모처럼 펼쳐진 민중미술 담론의 장이었다. 발표자들의 입장은 크게 둘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동아시아라는 지평으로의 확장’(홍성담, 이나바 마이)과 ‘사회(적)예술로의 보편화’(김준기)를 통해 민중미술의 지속과 계승을 추구하는 시각이었고, 다른 하나는 민중미술이 저항예술을 넘어 시민사회의 예술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나의 주장이었다. 변증법적 지양이라는 조건을 달기는 했지만, 나는 민중미술의 지속 가능성에 대해 유일하게 부정적 입장을 내놓았다. 대부분의 발표자들이 민중미술 ‘안에서’ 말하고자 했다면 나는 민중미술 ‘바깥에서’ 민중미술을 보고자 했고, 그 결과 한국 사회의 변화를 위한 주체의 전환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과 발언’ 40주년 기념 전시회의 모습. [사진 최범]

‘현실과 발언’ 40주년 기념 전시회의 모습. [사진 최범]

민중미술은 1980년대 한국 사회의 변혁 과정에서 등장한 비판적이고 실천적인 미술운동이었다. 몰역사·몰이념의 소위 ‘한국적 모더니즘’과는 달리 역사적·사회적 의식을 표출한 미술로서 민중미술은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보기 드문 족적을 남겼다. 그런 과정에서 민중미술은 보수진영으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기도 했다. ‘못 그린 그림’이라는 치졸한 수준의 비난에서부터 순수하지 못한 정치적 예술이라는 비판에 이르기까지. 민중미술이 민중·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서 뚜렷한 역사적 성과를 남겼음은 말한 대로이다. 하지만 민중미술이 동시대 미술로서 여전히 살아 있고 유효한가 하는 것은 바로 위의 심포지엄에 담긴 문제의식일 것이다.
 
‘현실과 발언’ 40주년 기념 전시 회의 모습. [사진 최범]

‘현실과 발언’ 40주년 기념 전시 회의 모습. [사진 최범]

민중미술은 한국의 민중·민주화운동 내에 배치된 문화적 실천 형식이었다. 재미 역사학자 이남희 교수는 민중운동의 등장이 ‘역사 주체성의 위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민중 만들기』) 19세기 말 이후 전통 공동체의 붕괴는 우리가 역사의 주인이 아니라는 의식을 갖게 하였고 그러한 의식은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민중을 주체로 한 거대한 사회적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역사 주체성의 위기’ 의식이 ‘민중=피지배계급=선/엘리트=지배계급=악’과 ‘민족=선/외세=악’이라는 마니교적인 이분법의 인식을 낳았는데, 이는 역사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본 것으로서 실천상의 한계와 오류를 낳았다는 것이 이남희 교수의 진단이다.
 
이러한 관찰은 소위 ‘민주화 운동 세력’이 권력을 잡은 현재에 대한 평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민주화는 민주주의를 가져왔는가?’(최장집) 지금 다시 민중미술을 묻는 까닭도 이와 다르지 않다. ‘민중미술은 여전히 진보적인가?’ 나는 이에 대해 쉽게 긍정적인 답을 하기가 어렵다.
 
민중미술의 출발점으로는 ‘현실과 발언’ 동인의 결성(1979년)과 전시(1980년)를 꼽는다. 말로만 전위를 내세웠을 뿐 부조리한 시대에 침묵했던 ‘한국적 모더니즘’과는 달리 이들은 미술이 현실에 대한 발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침 그들의 40주년 기념 전시가 열리고 있다.(‘그림과 말 2020’, 학고재, 7월 1일~31일) 이제 40년 전 현실에 대한 발언으로 시작된 민중미술에게 자신들의 문제의식을 되돌려줄 때가 되었다. 민중미술은 여전히 저항미술이자 변혁미술로서 현실에 대해서 발언하고 있는가. 어쨌든 지금은 민중미술계 인사가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이 되고 민중미술 작가의 그림이 청와대에 걸리는 시대 아닌가 말이다.
 
최범 디자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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