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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관범의 독사신론(讀史新論)] 명승지 동호와 서호, 개혁사상의 산실 되다

중앙일보 2020.07.16 00:24 종합 24면 지면보기

서울 한강에서 꽃핀 새로운 학문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동네 이름은 무엇일까. 우선 교동이 떠오른다. 교동은 향교가 있는 동네라는 뜻인데 지방에 고을마다 향교가 있었으니 꽤 많았을 것이다. 심지어 서울에도 교동이 있다. 고려 시대의 한양 향교에서 유래한다. 속초에도 교동이 있다. 속초중학교에서 유래한다. 수원 교동은 속초 교동처럼 최근의 동네는 아니지만 조선 후기 정조 임금이 세운 신도시에 들어선 것이니 비교적 젊은 교동이다.
 

권력욕에 망한 한명회의 압구정
율곡은 이곳서 도학정치 꿈 키워
서쪽 마포는 근대 신교육 자극해
동서 아우른 ‘한강학’ 탐구할 만

정자동도 심심치 않게 마주치는 동네 이름이다. 정자동 하면 지하철 정자역이 있는 성남이나 천주교 정자동 성당이 있는 수원이 떠오를 수도 있겠으나 전국 어디에나 정자가 있으면 정자동이 가능했다. 서울의 경우, 정자동이 세 군데 있었음이 확인되는데 꼭 정자동은 아니어도 정자 이름을 따와 만들어진 동네도 적잖이 발견된다. 동대문 밖 동지(東池)라는 못에 정자가 있어서 정자동이 생겼고, 서대문 밖 서지(西池)라는 못에 천연정(天然亭)이라는 정자가 있어서 천연동이 나왔다.
 
조선시대 겸재 정선(1676~1759)은 진경산수화의 대가다. 우리 산하의 진면목을 화폭에 담았다. 겸재는 한강과 한양 일대를 그린 ‘경교명승첩’(보물 1950호)을 남겼다. 총 33장 그림 중에 20여 점이 한강을 소재로 했다. 300여 년 전의 압구정 풍경이다. [사진 간송문화재단]

조선시대 겸재 정선(1676~1759)은 진경산수화의 대가다. 우리 산하의 진면목을 화폭에 담았다. 겸재는 한강과 한양 일대를 그린 ‘경교명승첩’(보물 1950호)을 남겼다. 총 33장 그림 중에 20여 점이 한강을 소재로 했다. 300여 년 전의 압구정 풍경이다. [사진 간송문화재단]

실학자 유득공의 아들 유본예(柳本藝)가 편찬한 『한경지략(漢京識略)』(1830)에는 조선 후기 명승으로 손꼽히던 서울의 유명한 정자가 소개돼 있다. 천연정은 연꽃이 무성한 여름철에 연꽃 구경하러 가는 정자였다. 세검정은 여름 장마철에 물이 불어 오르면 폭포를 구경하러 가는 정자였다. 봄날 꽃구경하러 가기 좋은 곳이 인왕산 자락의 필운대라면 가을날 단풍 구경하러 가기 좋은 곳이 남산 기슭의 쌍회정(雙檜亭)이었다. 필운대와 쌍회정에서 모두 살았던 이항복(李恒福)은 얼마나 좋았을까. 쌍회정 동쪽의 칠송정(七松亭)은 도성 안을 굽어보기 좋은 명소였다.
 
서울의 이름난 정자는 한강 강가에도 흩어져 있었다. 한강에서도 뚝섬에서 두무포(현 옥수동)까지 동호(東湖)라 이르고, 마포에서 양화 나루까지 서호(西湖)라 이르는데, 동호와 서호는 조선시대 서울의 빼어난 풍광을 감상하는 명소로 저명했다. 정조 임금이 서울의 여덟 가지 경치의 하나를 보는 곳으로 동호의 압구정(狎鷗亭)을 골랐다면, 서거정은 서울의 열 가지 경치의 하나를 보는 곳으로 서호의 마포를 꼽았다. 모두 수상 풍광이었다. 진경산수화로 저명한 정선의 화첩 ‘경교명승첩’에는 동호의 압구정 그림과 서호의 양화 그림이 있다.
  
겸재 정선이 그려낸 한강의 진풍경
 
조선시대 겸재 정선(1676~1759)은 진경산수화의 대가다. 우리 산하의 진면목을 화폭에 담았다. 겸재는 한강과 한양 일대를 그린 ‘경교명승첩’(보물 1950호)을 남겼다. 총 33장 그림 중에 20여 점이 한강을 소재로 했다. 300여 년 전의 서호 양화 풍경이다. [사진 간송문화재단]

조선시대 겸재 정선(1676~1759)은 진경산수화의 대가다. 우리 산하의 진면목을 화폭에 담았다. 겸재는 한강과 한양 일대를 그린 ‘경교명승첩’(보물 1950호)을 남겼다. 총 33장 그림 중에 20여 점이 한강을 소재로 했다. 300여 년 전의 서호 양화 풍경이다. [사진 간송문화재단]

압구정은 본래 동호가 아니라 서호에 있었다. 세조 때 권신 한명회가 양화 북쪽과 마포 서쪽에 있는 화도(火島, 현 여의도)에 세운 정자였다. 정자 이름을 압구라고 지어준 예겸(倪謙)은 명나라 사람인데 세종 말년 조선에 사행을 와서 한강을 유람하고 ‘한강유기’(漢江遊記)라는 글도 지었다. 당시 명나라 사신은 조선에 오면 서호 일대를 중심으로 한강을 유람했다. 대개 양화 나루까지 뱃놀이를 즐긴 다음 배에서 내려 인근 잠두봉(蠶頭峯, 현 절두산)이나 희우정(喜雨亭, 현 망원정)에 올라 한강의 풍광을 감상하고 조선 문인들과 시를 수창했다.
 
예겸이 지어준 압구의 뜻은 정자 주인이 사심 없이 갈매기와 친하게 지낸다는 것으로 소와 양이 노닐고 갈매기가 날아가는 소박한 이 섬의 정자에 어울리는 말이었다. 그러나 사심 없이 자연과 벗 삼아야 할 정자 주인의 사심은 점점 커져만 갔다.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이 권력을 장악한 후에 정자를 세웠던 한명회는 성종이 즉위한 후 임금의 국구(國舅·임금의 장인)가 되자 마침내 정자를 서호에서 동호로 옮기고 더욱 위세를 떨쳤다. 명나라 사신을 압구정에서 대접하겠다며 왕실 천막을 함부로 빌리려고 설쳐댔다가 조정의 분노를 샀다.
 
서울 합정동에 있는 정자 망원정. 1424년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이 처음 지었다. 1925년 대홍수로 소실된 것을 1989년 복원했다. [중앙포토]

서울 합정동에 있는 정자 망원정. 1424년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이 처음 지었다. 1925년 대홍수로 소실된 것을 1989년 복원했다. [중앙포토]

훗날 노량에서 강학한 홍직필(洪直弼)은 ‘압구정’이라는 시를 지어 한명회를 비판했다. ‘부질없이 신세를 괴롭혔으니 사심을 썼기 때문이라네’(漫勞身世費機心)라는 시구를 지었는데, 이는 압구의 뜻을 배반한 존재가 압구정이라는 뜻이었다. 그는 압구정 주인이 ‘생전에 부귀영화나 즐기고 사후에 들을 악명을 완전히 망각한’ 사람이니 압구정에 와서는 ‘노량진 쪽으로 시선을 돌려 해와 별처럼 빛나는 사육신의 충절을 생각하라’고 읊었다. 압구정을 향한 노량진의 준엄한 꾸짖음이었다.
 
정조는 생각이 달랐다. 서울의 여덟 경치 중의 하나로 압구정을 꼽은 그는 압구정 앞 동호의 저녁 풍광을 읊으면서 유학의 대도가 주희(朱熹)의 학문에 있음을 강조했다. 압구정에서 주자학이라니 무슨 뜻일까. 조선 유학자 이황의 옛일을 생각한 것일까. 동호를 사이에 두고 압구정 건너편에는 독서당이 있었다.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젊은 문신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함) 혜택으로 중종 때 독서당에서 글을 읽던 이황은 한때 독서당에서 압구정으로 옮겨와 글을 읽었다. 음력 7월 보름 그가 본 압구정은 ‘비바람 부는 어두움 속에서 청개구리 울음소리 들리는’ 곳이었다.
 
여기서 사가독서의 혜택을 받는 조선 관료를 위해 압구정이 임시 독서당으로 기능했음을 발견한다. 세종대에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처음 시작한 사가독서제는 북한산 진관사나 자하문 밖 장의사(藏義寺, 현 세검정초등학교 추정) 같은 사찰에 독서 장소를 두다가 성종대의 용산 독서당 시절을 거쳐 중종대의 동호 독서당 시절에 이르러 제도적으로 전성기를 맞이했다. 동호 독서당에서 글을 읽은 당대 엘리트 관료 중에서 이황과 이이 같은 저명한 유학자가 배출되기도 했다.
  
조선의 엘리트 키워낸 사가독서제
 
선조 때 이이가 독서당에서 글을 읽고 제출한 과제물 ‘동호문답’(1569)은 걸출한 작품이다. 본래는 선왕의 상례를 마치고 본격적인 정치를 개시할 임금을 위해 이이가 개진한 새 정치의 정론서였다. 그는 임금과 신하가 서로 한 몸이 되어 이 땅에서 처음으로 도학정치를 실천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안고 인재 교육과 민생 안정을 논했다. 무엇보다 새 시대의 국시(國是)를 정하는 것이 새 정치의 급선무임을 강조하고 명종조에 사림을 진멸하고 국정을 전횡한 간신들을 처벌하고 시비를 바로잡아 유신(維新)의 정치를 이룰 것을 주장했다.
 
‘동호문답’은 조선 학술의 중심으로 ‘한강학’의 공간적 상상력을 북돋는다. 새 시대의 새 정치를 추구하는 조선 도학의 정치개혁의 꿈이 동호에서 피어났다. 이로부터 약 340년 후 이번에는 ‘서호문답’(1908)이 출현했다. 오직 교육만이 살길이라는 생각으로 신교육운동이 들불처럼 번져가던 시절 대한매일신보에 연재된 이 글은 기독교를 종교로 삼고 투철하게 교육자강에 헌신하는 지사의 활동을 갈망했다. 이 글을 추억하기 좋은 장소는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있는 대한매일신보사 사장 베셀의 묘비 앞이 아닐까.
 
서호의 문학에서 동호의 도학으로. 동호의 도학에서 서호의 서학으로. ‘한강학’의 중심은 그렇게 오고 갔다. 이제는 동호로 갈 차례인가. 우리 시대의 새 학문으로 광의의 동학(東學)을 꿈꾸어본다. 새 학문의 포부를 안고 ‘한강학’의 학술 답사를 떠나본다.
 
정조 임금의 행차 코스, 노량진 용양봉저정
용양봉저정

용양봉저정

한강 노량진에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사진)이 있다. 본래 이름은 망해정(望海亭)이었다. 까치발을 하고 멀리 서쪽을 보면 바다가 보인다는 뜻이었다. 1791년 어느 날 정조 임금은 해 뜰 무렵 정자에 올라 반대로 북쪽과 동쪽을 보았다. 산이 우뚝하고 한강이 흘러와 마치 용이 꿈틀꿈틀하고 봉황이 훨훨 나는 듯한 상서로운 기운을 느꼈다. 용양봉저정이라는 이름의 유래이다.
 
용양봉저정은 노량 행궁이라 부르기도 했다. 정조 이후 국왕의 행차가 아침에 창덕궁을 출발해 배다리로 한강을 건너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화성 행궁에 행차할 때에도 이곳에 머물렀다. 정조 이후 국왕들은 정조의 왕릉에 참배하러 떠나는 길에 이곳에 머물렀다. 헌종과 철종은 이곳에 당도하면 노량 유학자 홍직필의 집에 사관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용양봉저정의 소유권이 왕실에서 민간으로 넘어간 것은 순종 때다. 『서유견문』의 지은이로 유명한 유길준이 망명지 일본에서 귀국하자 순종이 이를 하사했다. 유길준은 새집의 이름을 조호정(詔湖亭)이라 불렀다. 갑오개혁 기간 함께 조선 정부에서 봉직했던 김윤식은 새집의 기문을 짓고 유길준이 시무를 강구하고 인재를 육성해 유신(維新)의 대업을 보좌하기를 당부했다. 오는 11월 개교 112년이 되는 서울 흑석동 은로(恩露)초등학교는 유길준의 조호정에서 시작했다. 용양봉저정에서 은로초등학교까지 작은 테마 답사를 제안한다.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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