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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술상 차리게 만든 투병 남편의 들꽃 선물 이벤트

중앙일보 2020.07.15 07:00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149)

 
얼마 전 국가 공인 자격시험 날이었다. 결혼 후 10년째 전업주부로 사는 딸이 시험 날이 다가오자 생뚱맞게 본인도 시험 친다며 아이들을 좀 봐달란다. 막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자기 시간을 가질 거라 늘 말하던 딸이다. 흐뭇한 미소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너는 계획이 있는 인생을 사는구나”라며 농담을 한다. 틈틈이 무언가를 계획하고 공부하는 모습이 대견하다.
 
시험 잘 치라고 전날부터 아이들을 데려와 봐주었다. 딸 입장에선 어쩌면 껌딱지같이 치마폭을 붙들고 돌아치는 아이가 잠든 시간에나마 점수와 상관없이 시험이라는 자기 몰두에 빠지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돌아와서 가채점을 신중하게 하는 걸 보니 공부를 많이 하긴 했나 보다.  
결혼 후 10년째 전업주부로 사는 딸이 시험 날이 다가오자 생뚱맞게 본인도 시험 친다며 아이들을 좀 봐달란다. [사진 pexels]

결혼 후 10년째 전업주부로 사는 딸이 시험 날이 다가오자 생뚱맞게 본인도 시험 친다며 아이들을 좀 봐달란다. [사진 pexels]

 
저녁이 되니 사위가 맥주와 통닭 꾸러미를 흔들며 처갓집으로 들어온다. 부인 시험 치는 날 기념 이벤트란다. 합격 발표가 나면 하는 게 파티 아니냐는 핀잔에 사위는 손사래를 치며 “에이 장모님, 요즘은 하루하루가 감동이에요. 시험 쳤다고 먹고, 떨어져도 먹고, 합격하면 더 크게 먹고 좋잖아요.” 그러고는 웃는다. 
 
둘은 미래의 모습도 상상한다. 남편이 일을 끝내고 근처에 일하는 부인과 함께 퇴근하는 그림을 그리며 키득거린다. 찰떡 만들어지기도 전에 김칫국 마시는 꼴이지만 마주 보고 호들갑 떠는 모습이 예쁘다. 내가 죽기 전까지는 잘 사는 척하기로 약속한 것인지 지금쯤이면 열심히 전쟁을 치를 시기인데도 복작거리며 잘 살아주고 있다. 정말이지 성실하고 착한 심성을 가진 사위다. 아이 셋과 남편에게 피곤한 잔소리를 퍼붓는 딸을 보면 사위 보기가 민망스러운데 그는 짜증 한번 없이 웃으며 한 수 더 거들어 추겨준다.  
 
“이 정도는 시끄러워야 가족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면서 부인의 목소리만 들어도 아직 가슴이 뛴다며 너스레를 떤다. 고단수 남편이다. 얼마 전엔 결혼 10주년이라며 한바탕 난리를 치른 사진이 송출되었다. 이벤트 때문에 거지 되겠다며 투덜대는 말속엔 행복한 모습이 더 크게 보인다. 딸아이가 잘 살아주니 사돈도 덩달아 아이에게 이벤트를 해준다. 친정 부모로서 그보다 더 큰 감사와 바람은 없는 것 같다.  
 
나도 이벤트의 추억이 있다. 암 치료를 위해 시골로 내려온, 중년이 된 남편의 성격이 도시에서와는 정반대로 바뀌었다. 눈만 뜨면 동네 사람들과 멧돼지를 잡는다고 산을 돌아다녔다. 멧돼지를 핑계 삼아 산행 후 한잔하는 맛으로 가는 거다. 건강은 계산할 수 없이 좋아졌다. 눈 온다고, 꽃 핀다고, 비 온다고 하루하루가 모여서 술잔을 들어야 하는 날이 되었다.  
 
남편은 가끔 산에서 내려오며 딴 들꽃을 한 아름씩 가슴에 팍 안겨 주며 ‘당신 닮아서’ 이벤트를 하곤 했다. [사진 pixabay]

남편은 가끔 산에서 내려오며 딴 들꽃을 한 아름씩 가슴에 팍 안겨 주며 ‘당신 닮아서’ 이벤트를 하곤 했다. [사진 pixabay]

지루한 산속 생활에서 언제부턴가 가끔 나를 주인공으로 한 이벤트도 있었다. 내가 놀라고 웃어주니 ‘님도 보고 뽕도 따고’ 수법으로 써먹었다. 산에서 내려오며 딴, 알알이 영글어 보석같이 박힌 산딸기를 덩굴 채 들고 와 부케라며 안겨주질 않나, 들꽃을 한 아름씩 가슴에 팍 안겨 줄 때도 “당신 닮아서”라며 술상을 차리지 않고는 못베기게 만들었다. 이런 날은 이래서, 저런 날은 저래서 네 생각이 났다며 이유를 달았다. 입만 열면 허튼소리 한다고 투덜대며 전쟁을 치르고 바가지를 긁었다. 그러면서도 술상을 차려준 이유는 예쁜 꽃이 날 닮아서 꺾어 왔다는, 그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 속으론 좋았나 보다. 술을 편안하게 먹는 방법이다. 
 
남편이 떠난 후 가끔 생각나는 건 비싼 선물을 받으며 좋은 음식을 먹고 이벤트를 한 날보다 그런 소소한 거로 투덕거리던 날들이다. 긴 호흡을 맞춰 오래 함께 살려면 철인이 되어버린 부인을 가끔 추켜 주는 ‘당신 닮아서’ 이벤트도 괜찮겠구나 싶다. 그 들꽃 선물이 가슴속에서 시들지 않고 오래 피어 있으니 말이다.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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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옥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필진

[송미옥의 살다보면] 요양보호사 일을 하다 평범한 할머니로 지낸다. 지식은 책이나 그것을 갖춘 이에게서 배우는 것이지만, 인생살이 지혜를 배우는 건 누구든 상관없다는 지론을 편다. 경험에서 터득한 인생을 함께 나누고자 가슴 가득한 사랑·한·기쁨·즐거움·슬픔의 감정을 풀어내는 이야기를 쓴다. 과거는 억만금을 줘도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는 말처럼 이웃과 함께 남은 인생을 멋지게 꾸며 살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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