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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재 曰] 폭력 소왕국의 재구성

중앙선데이 2020.07.11 00:28 694호 30면 지면보기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 유망주였던 고(故) 최숙현 선수가 지도자와 선배들의 폭력에 시달리다 스스로 세상을 등진지 보름이 지났다. 사태는 일파만파로 증폭되고 있다. 나는 스포츠계에서 이런 일들이 왜 끊임없이 반복되는지를 알고 싶었다.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 자신을 단련하는 엘리트 스포츠인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정신세계가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런 현상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해야 하나.
 

최숙현 죽인 건 폭력과 비리 카르텔
약자 보호 시스템 있지만 작동 안 해

나는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 팀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들에 대해 많은 자료와 증언을 가진 몇 사람을 전화로 인터뷰했다. 그리고 이 사건을 나름대로 재구성해 보았다. 물론 그들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왜 이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 유추해 볼 수는 있었다. 다음은 그들의 멘트를 정리한 것이다.
 
“경주시청 김규봉 감독은 수영을 전공했고, 국내 철인3종 초창기에 지도자로 들어왔지만 한 번도 철인3종(수영·사이클·마라톤) 경기를 완주해 본 적이 없다. 대신 선수들을 강하게 몰아붙여 성적을 냈다. 수영선수 출신인 여자 선수(나중에 주장이 됨)를 영입했고 그 선수가 국제대회에서 입상했고, 다른 선수들도 전국체전 등에서 메달을 땄다. 밖에서 볼 땐 성적이 잘 나오는 팀이라 고교 유망주들이 입단했지만, 대부분 2년을 버티지 못하고 팀을 나갔다. 구타와 언어폭력 등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건의 핵심으로 등장하는, 팀 닥터로 불린 안모씨는 의사가 아닐뿐더러 정식 물리치료사도 아니다. 주장 선수의 어머니가 우연히 병원에서 안씨의 진료를 받고 효과를 봤다고 한다. 그후 안씨는 슬그머니 경주시청의 팀 닥터로 들어오게 된다. 처음에는 선수들 마사지도 해 주고 상담도 해 주다가 점점 폭행과 금품 갈취 등을 일삼게 된다. 어린 선수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해 선수들을 노예 부리듯 한 것이다.”
 
“녹취 파일을 들어보면 안씨가 술에 취해 최숙현을 때리고 욕을 할 때 김 감독은 이를 방조하거나 부추기는 태도를 보인다. 감독이 안씨에게 쩔쩔맨 건 둘이 ‘공범 관계’이기 때문이다. 안씨는 감독의 비행과 비리를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공모하기도 한 유일한 사람이다. 혹시라도 밖에 나가서 발설할까 감독은 두려워한 것이다.”
 
“감독과 안씨의 비리와 폭력을 경주시청에서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팀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적당히 해. 큰 사고만 내지 마’ 정도로 덮어줬다. 간혹 문제가 생기더라도 10년 이상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 온 시청 공무원들과 경찰들이 막아줬다. 심지어 선수의 부모들도 고통을 호소하는 자녀에게 ‘네가 부족해서 그런 거야. 감독님 말만 잘 들으면 돼’라고 애써 외면했다. 감독의 눈 밖에 나면 대회에 출전할 수 없고, 그러면 생계에 막대한 곤란이 오기 때문이었다.”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 팀은 폭력과 비리로 쌓아 올린 김 감독과 안씨의 ‘소왕국’이었다. 그 안에는 지식과 경험 없이 막무가내로 몰아붙이는 지도자, 성적만 좋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며 방관한 팀 관계자, 부정과 비리를 묵인해주고 유착 관계를 맺은 지역 토호들이 있었다. 어린 선수들은 생살여탈권을 쥔 지도자, 밤낮없이 괴롭히는 선배 밑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이들의 목소리에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경주시청, 대한체육회, 국가인권위원회 등 두드릴 수 있는 문은 다 두드렸지만 대답 없는 현실에 최숙현은 절망했다.
 
우리 사회 곳곳에 이런 ‘폭력 소왕국’이 있다. 이들을 깨뜨릴 수 있는 법령과 제도가 있지만 작동하지 않는 게 문제다. 그래서 최숙현이 죽었다. 진심으로 그의 명복을 빈다.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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