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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문화난장] 백건우의 ‘우리, 다시’

중앙일보 2020.07.09 00:33 종합 27면 지면보기
박정호 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백발의 노신사가 명동성당 제대 앞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제대 앞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다. 아기 예수를 안은 마리아상이 노신사를 내려다본다. 그가 연주에 앞서 나직하게 말을 건넨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우리가 아무리 강해져도 신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이어 성호(聖號·가슴에 긋는 십자가)를 그은 다음에 눈을 지그시 감고 건반을 두드린다. 텅 빈 성당 안에 오직 음악만이 고요하게 흐른다.
 

명동성당서 연주한 바흐
지구촌 120개국에 방송
“음악은 배신하지 않는다”
코로나19의 아픔 달래줘

온라인에 공개된 피아니스트 백건우(74)의 티저 영상이다. 오는 11일 KBS 전파를 타고 세계 120개국에 동시 방송되는 ‘우리, 다시: Hope from Korea’ 프로젝트의 일부다. 백씨가 연주할 곡은 바흐의 ‘주여 당신을 소리쳐 부르나이다’. 미약한 인간에 대한 신의 도움을 요청하는 곡이다.
 
지난 주말 백씨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두 달 전 한국에 온 그는 코로나19 사태로 2주간 자가격리를 한 다음 이번 영상을 찍게 됐다. 고난의 지구촌에 위로와 희망을 주자는 제작 취지에 공감했다고 했다. 바흐의 곡을 고른 이유를 물었다. “자만이랄까, 오만이랄까, 과학발전으로 인간이 마치 신이 된 것처럼 우쭐해 했습니다. 하지만 어떤가요.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바이러스에도 꼼짝하지 못한다는 것을 배우지 않았나요. 신 앞에 선 인간의 조건을 다시 생각해 보고 싶었습니다.”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서울 명동성당 제대 앞에서 바흐의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신음하는 지구촌에 보내는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다. [동영상 캡처]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서울 명동성당 제대 앞에서 바흐의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신음하는 지구촌에 보내는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다. [동영상 캡처]

백씨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흔히 ‘건반의 구도자’로 불린다. 영화배우인 아내 윤정희(76)와 함께 음악과 신앙을 인생의 두 버팀목으로 삼아 왔다. 그는 “아직도 많이 모자랍니다. 더 열심히 성당에 다녀야 해요. 음악의 최종 목적은 삶의 본질을 찾는 것인데, 그런 면에서 음악은 신과 가장 가까운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TV 촬영은 쉽지만은 않았어요. 잠깐 나오는 장면인데도 경복궁에서 온종일 찍기도 했습니다.”
 
이번 방송은 백씨에게도 각별한 의미가 있다. 주로 솔로로 활동해온 그가 세계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젊은 연주자 10명과 함께 한 무대에 오른다. 우리 클래식 음악의 현재를 지구촌에 알리는 자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모두 처음 만난 후배들입니다. 젊은이들과 함께 작업하며 경험을 나눌 수 있어서 좋았어요.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더 늘었으면 합니다”라며 환하게 웃었다.
 
원로배우 신영균(왼쪽)과 백건우.

원로배우 신영균(왼쪽)과 백건우.

코로나19는 백씨에게 위기이자 기회가 됐다. 지난여름부터 준비해온 기대작, 즉 독일에서 녹음하려고 한 슈만 새 앨범이 전대미문의 재난으로 중단될 위기에 처했으니 이번 공연을 계기로 한국에서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는 코로나19도 어떻게 보면 나쁜 면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너무 이기적으로 살아왔어요. 코로나19로 가족이 다시 뭉치고, 공동체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어요. 한국은 물론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죠. 그런 면에서 세계가 더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
 
그는 이번 방송에서 새 앨범에 포함된 슈만의 ‘숲의 정령’을 주목해달라고 말했다. “인간은 자연을 파괴하고, 학대했습니다. ‘숲의 정령’은 슈만이 들꽃 한 송이에도, 새 한 마리에도 사랑을 표현한 곡입니다. 자연과 다시 친해지고 자연을 존경하라는 메시지를 느꼈으면 합니다. 코로나19가 우리에게 남긴 교훈이기도 하고요.”
 
그래도 의문이 남는다. 음악이 과연 코로나19를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될까. 엄밀히 말하면 결국 과학의 힘으로 극복해야 하지 않을까. 우문현답이 돌아왔다. “저 자신이 괴로울 때마다 음악이 함께 있었어요. 늘 얘기하는 것이지만 음악은 절대 우리를 배반하지 하지 않습니다. 제가 음악을 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과학의 밑바탕에도 음악에 대한 사랑, 즉 인간에 대한 사랑이 흐르지 않을까요.”
 
지난 주말 자리에는 원로배우 신영균(92)도 함께했다. 신씨는 백씨의 아내 윤정희와 많은 작품에서 호흡을 맞춘 충무로의 큰어른이다. 대화는 지난해 치매 투병 사실이 알려진 윤씨의 근황 쪽으로 흘렀다. “참 나아질 수 없는 병입니다. 아내는 파리 인근 아파트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딸 아이가 옆집에 살며 음식을 해주고, 청소도 해줍니다. 가족들도 못 알아봐 안타깝지만요.” 음악의 힘 덕분일까, 백씨는 어려운 얘기를 하면서도 넉넉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한국 자가격리 기간에 제 생일이 있었어요. 처음으로 혼자 생일을 보냈죠. 가족 생각이 더 깊어졌습니다.”
 
박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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