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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시시각각] 손정우의 석방

중앙일보 2020.07.08 00:51 종합 30면 지면보기
양성희 논설위원

양성희 논설위원

세계 최대 아동 성 착취 사이트 ‘웰컴투비디오’ 운영자로 미국으로부터 범죄인 인도 청구 요청을 받아 온 손정우(24)가 풀려났다. 법원이 그제 범죄인 인도 청구를 기각하면서다. ‘관련 범죄 수사 지장’ ‘사법 주권’ ‘인도법의 취지’ 등을 내세웠다.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수사에 협조하고 처벌을 받으라”고도 했다. 이미 아동·청소년 성 보호법(아청법) 위반 등으로 1년6개월 형기를 마친 손정우는 자유의 몸이 됐다. 손정우의 아버지는 “아들이 컴퓨터를 많이 해서 생긴 일이다. 앞으로 컴퓨터를 못 하게 하겠다”는 괴이한 소감을 내놨다.
 

성범죄자 미국 인도 불허는 충격적
법원은 국내 수사 도움 기대하지만
솜방망이 처벌 손 들어준 꼴 아닌가

상징성이 큰 사안이었다. 최근 일련의 디지털 성범죄에 대해 국가가 피해자 여성 아닌 가해자 남성 편이라는 사법 불신이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영·유아를 포함해 수천 개 아동 성 착취물을 전 세계에 유통하고, 미국·영국 등 32개국이 수년간 공조수사 끝에 검거한 반인륜적 국제 범죄자에게 1년6개월 솜방망이 처벌이 내려진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비판 여론이 들끓던 참이었다. 당연히 미국의 범죄인 인도 청구에 이목이 쏠렸다. 국내에선 죗값을 치르지 않은 ‘자금세탁’ 혐의였고, 정치범을 제외하고는 범죄인 인도가 불허되는 경우가 드물어 송환을 예상하는 의견이 우세했다. 영상 하나를 다운받는 것만으로도 최소 5년형에 처하는 등 아동 성범죄는 절대 봐주지 않는 미국 법정에 선다면 중형이 불가피해 보였다.
 
인도 불허 판결 후 인터넷에는 “국제 공조 수사는 왜 했는지, 나라 망신” “사법부도 한통속” “시청자 문자투표를 조작한 m.net 오디션 프로 연출자(2년형)보다 형량이 낮다니 말이 되나”라는 냉소와 분노가 들끓었다. 재판장인 강영수 서울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의 대법관 후보 자격을 박탈해 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에도 30만 명 넘게 동의했다.
 
재판부는 손정우의 신병을 확보하는 것이 향후 수사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를 한국에 남겨 관련 범죄를 발본색원하자는 의미다. (미국 송환에 맞선 꼼수로 보이지만) 손정우의 아버지가 ‘범죄수익 은닉’ 혐의로 아들을 고소한 사건을 수사하면서 추가 처벌이 예상되긴 한다. 다른 범죄자들을 검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범죄의 몸통인 아청법 위반 등으로 고작 1년6개월형을 받은 상황에서 얼마나 더 죗값을 물을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그를 활용해 아동 성 착취 범죄의 고리를 끊자고 강조했지만, 범죄자에게 합당한 처벌을 내리는 것만큼 범죄를 뿌리 뽑는 길이 따로 있는가.
 
재판부는 수사와 기소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봤으나 이번 판결 역시 우리 사법 당국의 낮은 젠더 감수성을 드러내며, (아동) 인권과 성평등의 후진성을 벗지 못했음을 세계에 알렸다는 비판을 면키 어려워 보인다. 애초 “나이가 어리고, 초범이고, 반성하고 있으며, 결혼해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각종 감형 사유를 들어 국제 기준에 턱없이 못 미치는 형량을 내렸던 법원이다. “유독 성범죄에 대해 사법 당국은 가해자 남성의 인권을 끝까지 수호하는 박애주의자가 되는지 의아하다”던 최영희 전 국가청소년위원장의 말이 떠오른다. 글로벌 스탠더드와 동떨어진, 그리고 국민 절반을 좌절케 하는 사법 주권이 무슨 의미인지 묻고 싶다.
 
하필 같은 날, 수행비서 성폭행 혐의로 복역 중인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모친상 빈소엔 유력 정치인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대통령 등이 보낸 조화, 조기가 자리를 지켰다. 애도의 마음을 가질 순 있지만, 상대가 성폭행 혐의로 복역 중이란 사실을 잊은 듯했다. 아니 잊고 싶거나 아직도 ‘음모론의 희생자’라며 인정하기 싫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국회 내 페미니즘 단체 ‘국회페미’는 “개인적인 도리일 수는 있지만, 정부· 정당· 부처 이름으로 조의를 표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이런 행태가 ‘성폭력에도 지지 않는 정치권의 연대’로 비칠까 우려스럽다”고 논평했다. 이 모든 게 자칭 페미니스트 정부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입맛이 쓰다.
 
양성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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