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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좀 하시라" 文 5년전 이랬던 박지원을 정보수장에…왜

중앙일보 2020.07.05 18:00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정치에선 5년도 긴 모양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박지원 국정원장 후보자 얘기다. 당권을 놓고 싸우는 ‘최대 정적’이었던 두 사람은 지금은 임명권자와 최고정보책임자가 돼 북한을 상대로 호흡을 맞추려 하고 있다.
 
사실 두 사람의 관계는 ‘정적’이란 표현 이상으로 오랜 기간 안 좋았다. 5년 전이던 2015년 2월 더불어민주당 전신 새정치민주연합의 당 대표를 뽑는 전당대회에 나란히 출마한 문 대통령과 박 후보자는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전당대회(8일)를 엿새 앞둔 2일 JTBC 토론회에선 이런 장면이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박지원 전 의원을 국정원장 후보자로 지명한 이유가 뭘까. 국정원장 인선 배경에 대해 청와대는 "문 대통령이 직접 박 후보자로 가닥을 잡았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과 박 후보자는 가깝게 지낸 기간 보다 사이가 안 좋거나 '애매한' 기간이 더 긴 관계다. 사진은 2015년 2월 8일 새정치민주연합 전당대회때의 모습. 당시 2위를 한 박 후보자(오른쪽)가 문 대통령의 1위가 확정되지 악수를 청하고 있다. 가운데는 통일부 장관에 지명된 이인영 의원. 김경빈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박지원 전 의원을 국정원장 후보자로 지명한 이유가 뭘까. 국정원장 인선 배경에 대해 청와대는 "문 대통령이 직접 박 후보자로 가닥을 잡았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과 박 후보자는 가깝게 지낸 기간 보다 사이가 안 좋거나 '애매한' 기간이 더 긴 관계다. 사진은 2015년 2월 8일 새정치민주연합 전당대회때의 모습. 당시 2위를 한 박 후보자(오른쪽)가 문 대통령의 1위가 확정되지 악수를 청하고 있다. 가운데는 통일부 장관에 지명된 이인영 의원. 김경빈 기자

▶박지원 후보=“문재인 후보가 오늘 비노(非盧ㆍ비노무현)와 전면전을 선포하고 있는 거다. 친노(親盧ㆍ친노무현)들이 꼭 선거에서 패배하는 이유를 알겠다.”
▶문재인 후보=“친노, 비노, 그만 좀 하시라.”
▶박 후보=“친노가 이 당을 지배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
▶문 후보=“지금까지 TV 토론이 아슬아슬했는데 가장 저질의 토론이 되고 있다. 국민께 송구스럽다.”
(※당시 두 사람이 거친 말을 주고받는 상황에서 “저는 퇴장하는 게 맞겠다. 이 자리에서 나가겠다”고 했던 이가 이인영 통일부 장관 후보자다.)
 
전당대회 결과 문 대통령(45.3%)이 박 후보자(41.7%)를 간발의 차(3.6%포인트)로 이겼다. 이 후보자는 12.9%로 3위를 했다. 이후 당의 헤게모니는 문 대통령 쪽으로 확 기울었다. 박 후보자는 이듬해인 2016년 1월 민주당을 탈당해 안철수 대표의 국민의당으로 당적을 옮겼고, 2017년엔 국민의당 대표로 대선을 진두지휘하는 등 반문(反文ㆍ반문재인)의 길을 걸었다.
 
두 사람의 인연이 이럴진대, 문 대통령은 왜 박 후보자를 발탁했을까. 인선 발표 당일 청와대의 공식 설명은 “18~20대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활동해 국가정보원 업무에 정통하다. 2000년 6ㆍ15 남북 정상회담 합의를 끌어내는 데 기여했으며, 현 정부에서도 남북 문제에 대한 자문 역할을 하는 등 전문성이 높다”(강민석 대변인)는 것이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5일 기자들과 만나 낙점 배경을 부연했는데, 주요 내용은 이렇다.
문 대통령이 직접 박 후보자로 가닥을 잡았다. 지난달 17일 박 후보자를 비롯한 통일안보 분야 원로 오찬 이후 정리됐다. 원로 오찬이 영향을 미쳤다는 뜻은 아니다. 박 후보자에 대해선 문 대통령이 오래전부터 잘 안다.”
이 관계자는 과거의 악연 관련 질문에는 “문 대통령은 과거사보다는 국정을, 과거보다는 미래를 더 중시한다”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17일 청와대에서 문정인 통일외교안보 특보, 고유한 통일연구원장, 임동원, 박재규, 정세현,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박지원 전 의원과 오찬을 갖고 있다. [사진 청와대]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17일 청와대에서 문정인 통일외교안보 특보, 고유한 통일연구원장, 임동원, 박재규, 정세현,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박지원 전 의원과 오찬을 갖고 있다. [사진 청와대]

지난달 17일은 북한이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한 다음 날이자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이 사의를 표명한 날이다. 당시 박 후보자는 “대북 전단은 현행 법으로도 단속이 가능한데 미온적으로 대처한 것은 잘못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도 북한 비핵화에 동의했지만, 미국 정부가 톱다운 방식이 아니더라. 밑(대통령 보좌그룹)에서 반대하기 때문에 이뤄지지 못해 안타깝다”는 문 대통령의 오찬 발언을 ‘허락’ 하에 외부로 전했다.
 
청와대가 17일 이후라는 기점을 언급했지만, 문 대통령은 국정원장 인선에 꽤 오랜 기간 고심했다고 한다. 청와대 사정을 잘 아는 한 정치학자는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이 사의를 표명한 건 1년쯤 됐고, 그 자리에 서훈 국정원장이 갈 거라는 사실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관건은 후임 국정원장이었는데 낙점까지 기간이 오래 걸렸다”고 전했다. 문 대통령의 초대 비서실장으로 박 후보자와 같은 날 특보로 지명된 임종석 외교안보특보도 후보로 검토됐다고 한다. 그러나 1989년 전대협 3기 의장일 때 이른바 ‘통일의 꽃’이라 불린 임수경 전 의원을 북한에 보낸 당사자가 통일뿐 아니라 방첩까지 총괄하는 국정원장이 되는 데 대한 정치적 부담과 이로 인한 인사청문회 쟁점화에 대한 우려 등이 컸다는 전언이다.
 
여권과 가까운 한 외교안보 전문가는 “문 대통령의 자문 그룹에서 박 후보자가 거론되진 않았다. 임기 2년이 채 안 남은 문 대통령의 승부수”라고 평가했다. 정책의 연속성을 담보할 수 없는 5년 단임 대통령제 국가의 특성상 지금부터는 성과에 조바심 내고 ‘역사의 평가’에 예민한 시기라는 의미다.
 
정치권에선 박 후보자 인선에 대해 벌써 “‘모 아니면 도’가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능숙하거나 능수능란하거나, 또는 치밀하거나 노회하다는 게 박 후보자에 대한 평가다. 한 전문가는 “문 대통령은 행정가의 면모가 더 많지만 박 후보자는 어찌 됐든 정치인”이라고 했다.
 
박 후보자 인선이 발표됐을 때 청와대 기자실에선 “아~” 하는 소리가 나왔다. 청와대는 이에 대해 “탄성이 나온 건 청와대와 박 후보자가 보안을 잘 지켰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그때 나온 소리가 탄성인지, 탄식인지를 판가름하는 건 성과가 답을 해줄 것으로 보인다.
 
권호 기자 gnom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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